<단독> ‘장어 왕국’ 파주 갈릴리 무슨 일이?

“우리 장어, 다 죽게 생겼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상호만 말해도 ‘아, 거기 알아’ ‘가보진 않았는데 이름은 들어봤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 전국구 맛집이 공공기관과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다. 업체는 ‘미래’ 자산을 보호해 달라고 호소했고, 기관은 ‘현재’로선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맞섰다. 경기도 파주에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파주시의 랜드마크죠. 기업이나 다름없어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갈릴리 농원’. 장어 숯불구이를 판매하는 맛집으로 알려져 있다. 1년에 30만~40만명이 찾는다고 한다. 직접 기른 장어를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고 외부 음식도 반입이 가능해 40~50대 중장년층에게 인기가 높다.

연 30만~40만
파주 랜드마크

지난 25일, 서울 강북 지역에서 강변북로를 타고 자유로를 거쳐 40여분 정도 달리자 길 옆으로 갈릴리 농원이 보였다. 오전 11시경이었는데 주차장은 이미 절반가량 차 있었다. 갈릴리 농원에서 운영하는 카페가 차도를 사이에 두고 자리했다. 천정이 높은 카페에는 갓 만든 빵 냄새가 가득했다.

갈릴리 농원에 장어를 공급하는 양식장은 차로 10~15분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양식장에 가까워질수록 도로가 좁아졌고 차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양식장에 도착했을 땐 갈릴리 농원 관계자의 차와 <일요시사> 취재진의 차만 남았다.

양식장으로 이어진 길은 포장돼있지 않아 차가 지나가자 뿌옇게 흙먼지가 일었다.


양식장 진입로는 두 개였다. 양식장에 인접한 도로를 사이에 둔 양쪽 토지는 모두 갈릴리 농원의 소유다. 자유로 방향으로 서서 오른쪽은 양식장, 왼쪽은 추가 양식장을 만들기 위해 갈릴리 농원이 매입한 땅이다. 양식장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 소형 굴착기 한 대를 조작하는 기사가 보였다.

양식장 부지는 2700여평, 장어를 양식하는 수조는 1100평에 달했다. 대형 장어 공장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규모였다. 양식장에서 기르고 있는 장어 치어(어린 물고기)와 성체 장어 등은 120만마리 정도라고 한다. 이곳에서 양식된 장어는 갈릴리 농원을 통해 전국으로 팔려나간다. 이른바 갈릴리 농원의 ‘젖줄’인 셈이다.

최근 양식장과 인접 도로가 갈릴리 농원과 한국농어촌공사 간 법정 공방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갈등은 부동산 개발업체로 알려진 A사가 양식장 인근 부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도로와 구거를 진출입로로 사용하기로 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구거는 하천보다 규모가 작은 4~5m 폭의 도랑, 개울이다. 농업용수 공급, 배수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인공 수로라고 보면 된다.

전국구 맛집 VS 정부 기관
도로 사용 허가 놓고 갈등

한국농어촌공사에 따르면 해당 도로와 구거는 1975년경 경지 정리사업으로 설치한 농업용 수로 및 도로 부지다. 그때부터 한국농어촌공사가 관리하고 있다. 한국농어촌공사와 A사는 2022년 11월 해당 도로와 구거를 두고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

2023년 1월부터 2033년 1월까지 10년 동안 A사가 이 도로와 구거를 농로 목적 외로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도로 사용 허가를 받은 A사는 파주시에 개발허가를 신청했다. 파주시는 2023년 9월 해당 부지에 사무소, 야적장 등을 지을 수 있는 허가를 내줬다. 파주시에 따르면 올해 A사가 개발 내용을 변경해 신청했고 허가가 나왔다. 어떤 건물이 들어설지 아직 모르지만 허가 내용상으로는 편의점 등 건축법상 소매점도 들어설 수 있는 상태다.

갈릴리 농원 측은 한국농어촌공사와 A사의 계약, 파주시의 개발허가 등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다. 갈릴리 농원 관계자는 “지난해 12월쯤에 인부들이 도로와 구거에 붉은 깃발을 연이어 설치해서 ‘뭘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A사가 도로 확장 공사를 한다고 하더라. 이후 정보공개를 통해 계약 내용을 일부 확인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발생할 수 있는 소음과 진동이다. 갈릴리 농원 관계자에 따르면 장어는 소음과 진동에 매우 취약한 어종이다. 개발을 위한 공사 차량이 도로를 오가면서 생기는 소음과 수조의 진동이 장어를 폐사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소음과 진동에 노출된 양식 어류가 정상 어류와 비교해 사망지수가 6배 가까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갈릴리 농원은 부지 개발을 원하는 A사, 도로 사용 허가를 내준 한국농어촌공사, A사에 개발허가를 내준 파주시 등과 관련 논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갈릴리 농원 관계자는 “A사가 개발하려는 부지로 진입할 수 있는 도로가 두 개다. 하다못해 양식장에 인접하지 않은 도로를 사용하면 안 되냐고 제안했는데 도로 포장비용을 우리에게 부담하라고 해서 (A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농어촌공사
사용 허가

한국농어촌공사가 A사에 사용 허가를 내줄 당시 도로를 포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는데, 진출입로를 변경하는 대신 그 도로를 갈릴리 농원 측에서 포장해 달라는 뜻이다. A사가 양식장에 인접한 도로를 진출입로로 선택한 이유는 옆 도로보다 접근성이 좋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실제 옆 도로는 양식장 인접 도로와 비교해 진입 지점까지 거리가 훨씬 길었다.

갈릴리 농원 측은 한국농어촌공사, 파주시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양식장 피해를 호소하며 사용 허가 및 개발허가를 취소하거나 A사와 협의할 수 있게 조율해 주길 원했지만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갈릴리 농원 관계자는 “한국농어촌공사에서는 기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소송을 걸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문제는 법정 공방으로 번졌다. 갈릴리 농원이 한국농어촌공사를 상대로 ‘국유지 사용계약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한국농어촌공사와 A사가 맺은 임대차계약은 무효라는 내용이 골자다.


갈릴리 농원 관계자는 “파주시가 (A사에) 개발허가를 내준 배경은 한국농어촌공사가 도로 사용 허가를 내줬기 때문”이라며 “모든 일은 그 임대차계약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파주시 관계자는 한국농어촌공사의 도로 사용 허가가 없었으면 개발허가가 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지 묻는 <일요시사>의 질문에 “무조건은 아니지만 안 나갈 수도 있었다”면서도 “그 부분(도로 사용 허가)이 선행돼서 개발허가에 절차상 문제가 생기지 않은 건 맞다”고 말했다.

소송의 가장 큰 쟁점은 한국농어촌공사에 해당 도로에 대한 사용 허가권이 있는지다. 농어촌정비법 제23조(농업생산기반시설의 사용 허가) 조항이 언급됐다. 갈릴리 농원 측은 현행법에 따라 해당 도로의 사용 허가권이 지자체장에게 있다는 견해고 한국농어촌공사는 자사에 허가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파주시는
개발허가

해당 조항은 ‘농업생산기반시설관리자가 농업생산기반시설이나 용수를 본래 목적 외의 목적에 사용하려 하거나 타인에게 사용하게 할 때는 시장·군수·구청장의 사용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농업생산기반시설관리자가 한국농어촌공사인 경우와 농업생산기반시설의 유지·관리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미한 사항이면 그렇지 않다’는 단서가 달렸다.

또 ‘제1항의 따른 사용 허가는 그 본래의 목적 또는 사용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에서 해야 한다. 이 경우 농업생산기반시설 관리자는 미리 관계 주민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갈릴리 농원 측은 허가 주체가 한국농어촌공사가 아니라 지자체장이기에 해당 도로에 대한 임대차 계약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국농어촌공사는 농어촌정비법 제23조, 농어촌정비법 시행령 제31조(농업생산기반시설이나 용수의 사용 허가) 제2항을 들어 허가권이 있다고 반박했다. 해당 조항은 ‘농어촌정비법 제23조 제1항 단서에 따라 한국농어촌공사가 관리하는 농업생산기반시설이나 용수를 본래 목적 외의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자는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사용신청서를 한국농어촌공사에 제출해야 하며, 한국농어촌공사가 관리하는 농업생산기반시설이나 용수의 사용에 관한 사항은 한국농어촌공사 정관으로 정한다’고 명시했다.

문제의 도로는 농로여서 공사를 위한 진·출입로 등 농업 외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한국농어촌공사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자체장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고 임대차계약에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일단 한국농어촌공사의 손을 들어준 상태다. 갈릴리 농원 측은 지난 4월 한국농어촌공사를 상대로 ‘행정처분 효력 정치 신청’을 제기했다. 본안 소송 판결이 나올 때까지 임대차계약의 효력을 정지해 달라는 내용이다. A사가 도로공사를 진행하려고 하자 이를 막기 위한 취지로 신청한 것으로 보인다.

갈릴리 농원 관계자는 “피신청인(한국농어촌공사)이 도로 공사를 하겠다며 우리 땅에서 도로 쪽으로 흘러내린 토사 일부를 원상복구하라고 요구해 왔다. 해당 요구는 도로를 무단 임대한 불법행위를 배경으로 한 부당한 처사”라며 “또 토사가 일부 흘러내렸다고 해서 실제 도로의 효용에는 아무런 지장도 발생하지 않는다. 명백한 권리 남용”이라고 지적했다.

“양식어류, 소음과 진동에 취약”
“실질적 피해 없다” 가처분 패소

그러면서 도로 공사를 위해 중장비 차량이 오가는 사이 발생한 소음과 진동으로 장어가 먹이를 먹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3년 동안 2주에 한번씩 갈릴리 농원에서 양식 중인 장어를 대상으로 ‘병성 감정 업무’를 수행해온 수산질병관리원의 소견서도 제시했다.

소견서에 따르면 “최근(2025년 4월1일) 실시한 검사에서 특별한 병원체의 감염은 확인되지 않으나 사료 섭이가 떨어지는 증상이 관찰되고 있다”며 “이 같은 섭이 저하 증상이 대형 차량 운행에 의한 소음, 진동과 상관관계가 있는지 확인을 위해서는 세부적인 분석이 필요하지만 사육 중인 장어에 지속적인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갈릴리 농원 측은 검사 사흘 전인 지난 3월29일 도로 공사를 위한 중장비 차량이 오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정부지법은 갈릴리 농원 측의 신청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신청인(갈릴리 농원)이 제출한 자료만으로는 신청 취지 기재 처분으로 인해 신청인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한다거나 이를 예방하기 위해 그 효력을 정지할 긴급할 필요가 있음이 소명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소송 상대인 한국농어촌공사나 개발허가를 내준 파주시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파주시 관계자는 “시가 봐야 할 부분은 허가 과정에서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는지다. 개발허가를 내주기 전 양어장 주변까지 고려해 도시계획 심의도 진행했다. 도시계획 심의는 법적인 부분 외에도 주변 환경 등을 포괄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는 갈릴리 농원과 A사가 ‘민사’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어느 한쪽의 입장을 고려하면 다른 한쪽이 손해 보는 구조다. 인허가 문제로 시가 개입하는 사례도 있지만 이 건은 서로 입장 차가 뚜렷해 시는 절차의 적법성만 따졌고 (그 부분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덧붙였다.

한국농어촌공사는 “갈릴리 농원 측에서 장어 피해와 관련한 소송을 제기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A사와 맺은 임대차계약을 문제 삼아서 의외였다”며 “우리는 현행법에 따라 우리가 관리하는 농업생산기반시설을 목적 외로 사용하겠다는 신청이 들어오면 농기계 통행 등 농민에게 피해가 있는지를 검토해 허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히려 이런 문제는 지자체가 개발허가를 내줄 때 전체적으로 고려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 “결국 비용 문제”라며 “갈릴리 농원과 A사, 두 업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덧붙였다.

“책임 없다”
핑퐁 게임?

갈릴리 농원 관계자는 “인터넷에서 ‘한국농어촌공사’를 검색하면 ‘국민의 먹을거리 생산 기반을 확충하고 농어촌 생활환경 개선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농정 최일선 기관’이라는 글이 뜬다. 하지만 지금 하는 행태를 보면 한국농어촌공사는 양식업에 종사하는 우리보다 부동산 개발업체의 편을 들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한국농어촌공사의 존재 의의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한다”고 토로했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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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