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디 오픈’이라고 명하지는 않고 그저 오픈 대회라고 했다. 출전 선수가 8명에 불과한 다소 볼품없는 규모였지만, 이날 경기는 명실 공히 영국 골프의 최강자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이 대회는 수십년에 걸쳐 영국 골프계서 최강자로 군림했던 알렌 로버트슨이 1년 전 사망한 것을 기리는 명분과 함께 공석이 된 영국 골퍼의 1인자를 뽑는 무대였다. 우승 후보는 단연 톰 모리스와 윌리 파크 시니어였다. 27세의 윌리 파크는 머슬버러에 기반을 둔 신성이었다.
반면 39세인 톰 모리스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스승인 알렌 로버트슨에 버금가는 스코틀랜드 최강 골퍼였다. 윌리 파크는 사실 이번 대회가 별로 내키지 않았다. 알렌 로버트슨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바람에 목표를 상실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전설 매치
1853년 20세의 약관에 불과했던 윌리 파크는 알렌에게 거침없이 신문 지상으로 공개 도전장을 내밀었던 전례가 있다. 당시 알렌 로버트슨은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았고 대결은 흐지부지됐다. 윌리 파크는 이 대회가 영국 최초의 오픈 대회였음에도 알렌 로버트슨이 참가하지도 않았다는 이유로 김빠지는 무대쯤으로 여겼다.
물론 세상을 떠난 알렌 로버트슨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알렌 로버트슨을 최고의 골퍼로 인정하고 있었기에 그를 추모하는 의미서 이 대회에 참가했다.
프레스틱에 모인 참가 선수들은 하루 동안 단판으로 승부를 내야 했다. 3800야드의 12홀을 3번 도는 다소 힘에 부치는 총 36홀의 스트로크 방식이었다. 초대 대회인 데다 아마추어 선수까지 참가했던 관계로 상금은 없었다.
대신 공식적인 오픈이었던 만큼 트로피는 준비했다. 골퍼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벨트 4군데에 새긴 은제 버클로 장식된 붉은색 가죽벨트로 만든 트로피였다.
경기는 정오부터 속개됐다. 앞 조에 속했던 윌리 파크가 먼저 출발했다. 승산은 뒷 조에서 있던 톰 모리스에게 더 있었다. 10년 간 자신이 헤드 프로로 속해 있던 홈그라운드 골프장이었기 때문이다. 톰 모리스는 본인이 갈고 다듬었던 벙커, 잔디, 페어웨이, 러프 등의 특성을 꿰뚫었고 공략법을 알고 있었다.
영국 최강자 가린 무대
오랫동안 기억된 명승부
그럼에도 1라운드부터 젊은 패기의 윌리 파크 쪽으로 승부가 기울었다. 1라운드 결과 윌리 파크는 55타, 톰 모리스는 58타를 쳤다. 윌리 파크를 따라가던 수많은 갤러리는 환호성을 올린 반면 톰 모리스를 응원했던 관중은 숨을 죽였다.
쉬는 시간 없이 3타의 차이로 2라운드가 곧바로 재개됐고, 톰 모리스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경력, 나이, 홈그라운드 이외에도 톰 모리스는 이 대회서 우승해야 하는 명분이 있었다. 그는 스승이었던 알렌 로버트슨을 대신해 자신이 영국 최고의 골퍼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2라운드서 톰 모리스는 선전했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59타를 기록했고 윌리 파크가 3타를 리드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쌀쌀한 날씨 속에서 마지막 3라운드가 시작됐다. 윌리 파크와 톰 모리스는 한 조에 속해 정면 승부를 펼쳤다. 윌리 파크는 장신으로부터 뿜어 나오는 장타를 날리면서 톰 모리스를 위협했다.
완숙의 경지에 이른 톰 모리스는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선전했고 관중 1만여명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팽팽한 접전이 계속됐다. 드디어 마지막 3라운드가 끝났다. 3차전은 톰 모리스가 59타, 윌리 파크는 60타였다. 총 스코어는 55-59-60로 174타의 윌리 파크가 58-59-59로 176타인 톰 모리스에게 2타차로 승리했다.
높아진 명성
7년 전 알렌 로버트슨이 제자였던 톰 모리스를 윌리 파크와 상대하게 했고, 윌리 파크는 당시에도 톰 모리스를 2차례나 물리쳤다.
이번 대회서도 윌리 파크는 톰 모리스를 물리쳤고 초대 챔프의 자리에 올랐다. 영국 최강자를 가리는 초대 디 오픈은 이처럼 명승부를 연출했고 윌리 파크의 명성은 스코틀랜드 전역에 퍼졌다. 단 8명만 출전해 조촐하게 치러진 이 대회는 160여년간 이어져 오늘날 디 오픈이 됐다. 명실공히 전 세계서 가장 권위 있는 메이저 대회의 초석이 됐다는 사실을 당시 골퍼들은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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