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피에로가 비명을 내질렀다. 누가 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다른 누군가 주전자를 들어 물을 조금씩 손목에다 부었다.
물은 손목을 타고 내려 밑에 받친 밥그릇으로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마 피에로는 지금 자신의 손목 동맥이 끊겨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러나 손목에는 상처가 조금 났을 뿐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피에로는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일말의 소동
용운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눈을 돌려 버렸다.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말의 소동이 끝난 후에 반장이 용운을 향해 말했다.
“얌마, 너는 오늘부터 내 안마 담당이다. 니 쫄따구가 들어올 때까지 매일 저녁 내 다리를 주무른다. 알았냐?”
“예.”
“그리고 너.”
피에로를 지목했다.
“예!”
피에로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대답했다.
“너는 복도 담당이다. 매일 아침 기상하는 즉시 복도부터 점검한다. 어떤 새끼가 고구마 쪄놨으면 책임지고 깨끗이 치워. 만일 눈꼽만큼이라도 흔적을 남겼다가 곡소리 날 줄 알아라. 알았냐?”
“예? 예…….”
“다른 반 앞은 신경 쓸 거 없고 우리 반 앞만 해. 그리고 범인을 잡는 날엔 일계급 특진이다.”
“예.”
피에로가 멍하니 서 있으니까 스라소니가 말했다.
“고구마란 똥을 뜻한다.”
괴이한 노릇이었다. 대체 밤사이 복도에 누가 감히 대변을 본다는 말인가. 또 그게 사실이라면 무엇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래야만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비로소 반장의 입에서 ‘휴식!’ 소리가 떨어졌다.
“니들 자리는 저쪽 문 옆이니 즉시 찌그러져.”
용운은 움직였다. 지정해 주는 곳으로 가서 앉으려니까 아까 맞은 엉덩이가 욱신거렸다. 용운은 쪼그려 앉은 채로 지급받은 일용품들을 챙기다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원생들의 허리에 스푼과 칫솔이 매달려 있었다. 비누에 구멍을 뚫고 끈을 꿰어 목걸이처럼 걸고 있는 놈도 있었다. 도난이 심하고 한 번 분실하면 되찾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허리 꿰찬 일용품들
가끔씩 배불리 먹기
용운은 식기와 담요 같은 것만 관물대에 넣고 나머지는 허리에 꿰찼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충심사 사장 왕거미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야, 곧장 식사 집합 안 해, 이 잡새끼들아?”
“어, 미안. 지금 나간다.”
반장은 반원들에게 식기를 들고 집합하라고 명령했다. 말투로 보아 그들은 서로 트고 지내는 듯싶었다.
식당은 산등성이 밑에 있었다. 모든 원생을 동시에 수용할 만큼 커다란 건물이었다. 밥 한 끼 얻어먹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두가 출입구 앞에 줄을 맞추고 부동자세로 서서 노란 완장을 찬 주번 원생의 마음에 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야, 저쪽 줄 끝에서 세 번째 놈! 너 이 새끼 어디로 눈깔 돌려. 밥 처먹기 싫어? 그 줄 각심사 1반 맞지?”
그러자 나지막한 불만의 소리가 곳곳에서 새어나왔다.
“니기미, 배고파 죽겠는데, 저 새끼 땜에 또 늦네. 개새끼.”
“야, 짱구 움직이지 말그라, 자슥아. 또 우릴 쳐다보잖나.”
우선 착실한 줄부터 입장시키다 보니 용운의 반이 들어갈 때쯤에는 벌써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반도 많았다.
순서대로 용운이 배식구에 식기를 들이밀자 거친 보리밥과 시래기국이 담겨 나왔다. 양도 형편없이 적었다.
“차렷! 식사 개시!”
“감사히 먹겠습니다.”
누군가의 구령에 따라 모두 크게 외치고 밥그릇을 끌어당겼다. 용운도 바삐 숟가락을 움직였다. 잠시 후였다.
“야, 여기야 여기…….”
앞줄의 한 원생이 자신의 식기를 가볍게 두드리며 좌우를 향해 소곤댔다. 그러자 주위의 대여섯 원생이 밥 한 숟가락씩을 크게 떠서 재빨리 그의 식기에 몰아주었다.
그건 밥 계(契)라는 것이었다. 기왕에 먹으나 마나 한 양이니만큼 순번을 정해 놓고 어느 한 사람에게 몰아주어 한 끼나마 가끔씩 배불리 먹어 보자는 생각일 터였다.
고무같은 밥
그 원생의 얼굴에 동물적인 미소가 번지는 것을 곁눈질하며 용운은 급히 숟가락을 들고 밥을 퍼먹었다.
밥은 뜸도 제대로 안 들었는지 설 퍼진 보리알들이 씹히기 싫다는 듯 고무 조각처럼 입안을 맴돌았다. 반찬이라곤 거무튀튀한 소금이 어석어석 씹히는 짜디짠 곤쟁이젓 하나뿐이었다.
너무도 짜서 머릿속이 띵할 정도였다. 차라리 구걸해서 먹을 때보다도 더 못한 것만 같았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