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개념 범죄 집합소 ‘메타버스’ 두 얼굴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4.01.23 07:07:28
  • 호수 14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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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모르는 로블록스? 제페토?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내가 원하는 외모와 체형으로 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메타버스’가 바로 꿈을 이룰 수 있는 실현 장소다. 아동·청소년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메타버스를 이용하기 시작했지만, 동시에 성범죄 장소로 둔갑했다. 진짜 문제는 범죄가 일어나 경찰에 신고해도 처벌이 어렵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각광받은 것이 있다. 메타버스가 이것. 메타버스는 Web 3.0과 NFT 기술 발전과 함께 차세대 플랫폼으로 주목받는다. Web 3.0은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고 데이터 소유를 개인화하는 3세대 인터넷이며, NFT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이란 의미로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서 디지털 자산의 소유주를 증명하는 가상토큰이다.

경제적 활동
사회적 활동

메타버스는 이용되지 않는 분야가 없다. 게임뿐만 아니라 관광, 문화예술, 교육, 의료, 오피스 등에서도 사용된다. 
메타버스가 다양한 분야서 활용되고 사용이 증가하는 이유는 그 특징 때문이다. 기존 사이버 공간은 온라인이라는 특성이 있는데, 메타버스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간 경계가 모호해 사용자가 높은 실재감이나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단순히 아바타를 활용한 게임이나 오락 서비스 제공에 그치지 않고 현실 세계와 유사한 사회·문화·경제활동이 가능한 장을 마련한다. 그런데 이 같은 특징 때문에, 기존 인터넷 환경서 발생하지 않았던 사이버 범죄뿐만 아니라 오프라인까지 각종 위협에 노출된다.

문제는 메타버스의 사용자 대부분이 미성년자라는 것이다. 닐슨코리아 조사에 따르면, 국내서 가장 잘 알려진 메타버스 플랫폼의 이용자의 연령은 ▲7~12세 50.4% ▲13~18세 20.6%로 아동·청소년이 전체 이용자의 70% 이상이다. 성별로 봤을 때 여성 이용자가 전체 이용자의 77%에 달한다. 


결국 메타버스는 규범의식이 자리 잡지 않은 아동·청소년들이 범죄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장이 된 것이다. 특히 단일 게임 플랫폼이 아닌 경제적 활동과 사회적 활동이 함께 결합된 방법으로 성장하고 있어 범죄에 악용될 우려 또한 커지고 있다.

메타버스 이용자는 원하는 아이템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등 현실과 마찬가지인 상황이 발생하는 과정서 ▲가상화폐를 노리는 사기 ▲공갈 ▲해킹 ▲성폭력 범죄까지 노출된다. 여기서 성폭력 범죄는 아바타를 상대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를 유발하는 행동 ▲스토킹 ▲공연 ▲음란 등 새롭게 등장한 범죄 행위로 단속이 쉽지 않다.

우선 메타버스서 일어나는 사이버 범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로는 경찰청서 분류한 사이버 범죄에 해당하는 범죄다. 

이용자 대부분 여성·아동·청소년
꿈 이루는 실현 장소? 범죄 악용도

구체적으로는 ▲접근 권한을 부여받지 않은 사람이 컴퓨터나 정보통신망에 침입해 저지른 시스템 데이터를 훼손·멸실·변경 등의 행위가 포함된 정보통신망 침해 범죄 ▲피싱·스미싱 등의 개인·위치정보 침해 ▲저작권 침해 등의 정보통신망 이용 범죄 ▲법률서 금지하는 재화와 서비스 또는 정보를 정보통신망을 통해 배포 및 판매·임대·전시하는 불법 콘텐츠 범죄다.

두 번째는 메타버스서 사용자와 동일시되는 아바타의 법적 지위 및 기존 사이버상서 찾을 수 없었던 기술과 급진적인 발전 속도와 넓어진 활용 범위 등으로 유형을 구분하기 어려운 범죄다.

정보통신망 침해 범죄 사례로는 2020년 5월, 로블록스 해킹 사건이 있다. 로블록스 직원이 뇌물수수 후 해커에게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백엔드 고객 지원 패널에 접근해 한 달 간 1억명이 넘는 활성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조회하고, 플랫폼 내의 가상화폐를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을 해커에게 넘긴 사건이다.


로블록스는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이 운영하는 게임 플랫폼으로 단일 게임이 아닌 여러 대형 게임에 관한 정보가 모두 유출됐다. 무료로 기본 제공되는 창작 툴을 이용해 이용자가 자유롭게 게임을 만들고 이를 통해 다른 유저에게 인게임 소액 결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구조인데, 단일 게임이 아닌 여러 대형 게임에 관한 정보가 다 유출된 것이다.

전문 게임 크리에이터들은 로블록스의 플랫폼서 기업 형태로 창작 활동을 하고 로블록스는 해당 크리에이터들로부터 중간서 수수료를 취하는 형태로 운영돼왔다. 많은 양의 정보를 가진 해킹 가해자는 로블록스의 주요 게임들에 관련된 정보가 담긴 스프레드시트와 직원들의 민감한 정보들을 볼모삼아 금전적 이익을 취득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로블록스는 협상에 응하지 않았고, 4GB에 달하는 자료가 결국 한 온라인 포럼에 업로드됐다.

넘치는 유혹
다양한 사기

로블록스는 “탈취된 문서는 (해킹범이)갈취 시도의 일환으로 불법적으로 획득한 것이며, 우리는 해킹범의 요구에 따르지 않았다. 사건 발생 이후 조속히 외부 전문가들과 접촉, 자체 보안팀으로 보완했으며 비슷한 시도의 식별과 방지를 위해 시스템을 조정했다”고 전했다.

실제 블록체인 데이터 분석 기업 체이널리시스는 2022년 해킹을 통해 도난당한 가상자산은 19억달러라고 발표한 바 있다. 주공격 대상은 블록체인 기반 금융시스템 디파이(DeFi·탈중앙화 금융)였다.

해킹 외에도 기존 사이버 환경 대비 실시간 소통과 높은 현실감을 보이는 메타버스 특징으로 인해 아바타에 대한 추행이나 폭행 등의 사건도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3월에는 메타버스 아바타를 이용해 10대 여자아이를 상대로 ‘그루밍 성범죄’를 저지른 30대 남성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국내서 메타버스 아바타를 이용한 성범죄자에 대한 첫 번째 수사다. 일산동부경찰서는 아동청소년성보호에 관한 법률·아동복지법 위반으로 A씨(38)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하던 A씨는 2022년 1월 네이버 메타버스 플랫폼인 ‘제페토’를 통해 캐나다에 학교를 다니던 B(11)양에게 접근해 뽀뽀하는 모습이나 입 벌린 사진, 결혼서약서 등을 받은 혐의를 받았다.

경찰 조사 결과, A씨는 B양의 나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나이를 비밀로 하고 놀자”며 아바타 관련 아이템을 사주고 환심을 산 뒤 집주소,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를 수집했다.

또 B양에게 “숙녀로 보인다. 네가 존댓말 쓸 때면 흥분된다. 행동을 확실히 하라” “몸 찍은 영상이나 사진 보내 볼래?” “초콜릿 기프티콘 선물로 줄게. 역할 놀이 하자” 등 심리적으로 지배하려는 전형적 가스라이팅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아바타
법적 지위?


A씨는 제페토에 가입한 뒤 미소년 같은 외모로 아바타를 치장하고 피해자에게 접근해, 길게는 1, 2개월간 연락하며 친분을 쌓은 뒤 성적 대화를 나눴다. 자신의 신체를 찍은 영상을 피해자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같은 수법으로 메타버스서 약 1년간 초등학생부터 고교생까지 아동 청소년 11명의 신체 사진 등을 받아 성착취물을 제작해 보관했다.

국내에 거주 중이던 B양 부모는 A씨 행각을 알게 된 뒤 고소장을 제출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A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뒤 법무부를 통해 범죄인인도청구를 요청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전례가 없는 범죄로 신병을 구속·인도하는 절차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범죄인인도 불 청구 결정을 내렸다.

경찰은 무혐의를 주장하기 위해 귀국한 A씨를 공항서 체포했다. 경찰 관계자는 “선물을 주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한 뒤 피해자들이 노출 사진과 영상을 보내도록 만드는 A씨의 수법은 전형적인 온라인 그루밍”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바타를 스토킹하는 행위는 처벌이 어렵다. 아바타가 행위의 객체라는 지위를 갖지 않아서 법 적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서 스토킹 행위를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 또는 그의 동거인, 가족에 대해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정의해, 행위의 주체가 사람만 인정되고 있다.

앞서 지난 2022년 6월,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은 메타버스 내 아바타 범죄를 처벌하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해당 법안이 처벌 대상 행위를 ‘성적 언동’이라는 포괄적 표현으로 반영한 반면, 같은 당 윤영덕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에는 ‘성적 수치·혐오감을 일으키는 행위’와 ‘스토킹’으로 불법 행위를 구체화했다. 그만큼 메타버스 스토킹 범죄가 심각하다고 본 것이다.


“기프티콘 줄게 역할 놀이 하자”
그루밍, 스토킹, 성착취 등 빈번

온라인 스토킹 피해 실태 조사 결과, 20대 여성 응답자 903명 중 715명(79.2%)이 온라인 스토킹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피해 유형은 대부분 스토킹처벌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들이었다. ▲개인정보를 알아내 저장하기 56.8% ▲사생활 캐내기 56.4% ▲원치 않는 글‧이미지 전송하기 54% 등의 온라인 스토킹을 경험했다는 응답자 수가 절반을 넘었다.

중학교 2학년 C양은 최근 한 메타버스 플랫폼서 사이버 스토킹과 성희롱을 당했다. 한 남성 아바타가 C양의 아바타를 계속 쫓아오며 말을 걸었다. C양이 이를 계속 무시하자 욕설과 함께 성희롱성 발언을 퍼부은 것은 물론 의도적으로 아바타의 신체를 접촉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D양은 메타버스를 기반으로 하는 게임서 한 남성 아바타에게 계속 쫓기고 성적인 요구를 받았다. 제페토, 로블록스 등 메타버스 플랫폼서 ‘아바타’를 대상으로 한 성폭력과 스토킹, 그루밍 등 디지털 성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온라인 및 가상공간에서는 현실 세계와 달리 타인의 접근과 호의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다는 점을 악용하는 이들이 많고, 이런 점 때문에 아동·청소년이 성범죄에 노출되고 있는 실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사이버 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인력이 현저히 부족해, 경찰의 사건 예방은 기대기 힘든 게 현실이다.

경찰청은 경찰공무원 경력 경쟁 채용시험을 실시해 사이버수사 분야에 전문적인 인력을 선발하고는 있지만, 범죄 발생 건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물리적인 인력 부족과 더불어 지능화하는 범죄 수법에 대한 무지도 수사력 가름에 배제할 수 없는 원인이다.

충분한 인력과 전문성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서 새로운 영역인 메타버스서 발생하는 범죄 수사까지 하게 된다면, 수사 효율의 저하 등의 악영향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은밀화
지능화

결국 메타버스 이용자가 아동·청소년인 만큼,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을 철저히 하는 수밖에 없다. 이석원·김민영 자주스쿨 대표는 “최근 10년간 의무적으로 성폭력 예방교육을 진행한 결과 아이들이 성적 자기 결정권, 성적 동의, 성폭력의 정의와 유형, 현실서 해도 되는 성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하는 성 행동 등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가상공간의 성교육은 보편화돼있지 않은 데다 어른들조차 로블록스, 제페토, 이프랜드, 게더타운 등이 뭔지 모르는 만큼 메타버스 시대에 대비해 자녀는 물론 부모의 성교육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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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