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개념 범죄 집합소 ‘메타버스’ 두 얼굴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4.01.23 07:07:28
  • 호수 14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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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모르는 로블록스? 제페토?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내가 원하는 외모와 체형으로 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메타버스’가 바로 꿈을 이룰 수 있는 실현 장소다. 아동·청소년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메타버스를 이용하기 시작했지만, 동시에 성범죄 장소로 둔갑했다. 진짜 문제는 범죄가 일어나 경찰에 신고해도 처벌이 어렵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각광받은 것이 있다. 메타버스가 이것. 메타버스는 Web 3.0과 NFT 기술 발전과 함께 차세대 플랫폼으로 주목받는다. Web 3.0은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고 데이터 소유를 개인화하는 3세대 인터넷이며, NFT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이란 의미로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서 디지털 자산의 소유주를 증명하는 가상토큰이다.

경제적 활동
사회적 활동

메타버스는 이용되지 않는 분야가 없다. 게임뿐만 아니라 관광, 문화예술, 교육, 의료, 오피스 등에서도 사용된다. 
메타버스가 다양한 분야서 활용되고 사용이 증가하는 이유는 그 특징 때문이다. 기존 사이버 공간은 온라인이라는 특성이 있는데, 메타버스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간 경계가 모호해 사용자가 높은 실재감이나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단순히 아바타를 활용한 게임이나 오락 서비스 제공에 그치지 않고 현실 세계와 유사한 사회·문화·경제활동이 가능한 장을 마련한다. 그런데 이 같은 특징 때문에, 기존 인터넷 환경서 발생하지 않았던 사이버 범죄뿐만 아니라 오프라인까지 각종 위협에 노출된다.

문제는 메타버스의 사용자 대부분이 미성년자라는 것이다. 닐슨코리아 조사에 따르면, 국내서 가장 잘 알려진 메타버스 플랫폼의 이용자의 연령은 ▲7~12세 50.4% ▲13~18세 20.6%로 아동·청소년이 전체 이용자의 70% 이상이다. 성별로 봤을 때 여성 이용자가 전체 이용자의 77%에 달한다. 


결국 메타버스는 규범의식이 자리 잡지 않은 아동·청소년들이 범죄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장이 된 것이다. 특히 단일 게임 플랫폼이 아닌 경제적 활동과 사회적 활동이 함께 결합된 방법으로 성장하고 있어 범죄에 악용될 우려 또한 커지고 있다.

메타버스 이용자는 원하는 아이템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등 현실과 마찬가지인 상황이 발생하는 과정서 ▲가상화폐를 노리는 사기 ▲공갈 ▲해킹 ▲성폭력 범죄까지 노출된다. 여기서 성폭력 범죄는 아바타를 상대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를 유발하는 행동 ▲스토킹 ▲공연 ▲음란 등 새롭게 등장한 범죄 행위로 단속이 쉽지 않다.

우선 메타버스서 일어나는 사이버 범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로는 경찰청서 분류한 사이버 범죄에 해당하는 범죄다. 

이용자 대부분 여성·아동·청소년
꿈 이루는 실현 장소? 범죄 악용도

구체적으로는 ▲접근 권한을 부여받지 않은 사람이 컴퓨터나 정보통신망에 침입해 저지른 시스템 데이터를 훼손·멸실·변경 등의 행위가 포함된 정보통신망 침해 범죄 ▲피싱·스미싱 등의 개인·위치정보 침해 ▲저작권 침해 등의 정보통신망 이용 범죄 ▲법률서 금지하는 재화와 서비스 또는 정보를 정보통신망을 통해 배포 및 판매·임대·전시하는 불법 콘텐츠 범죄다.

두 번째는 메타버스서 사용자와 동일시되는 아바타의 법적 지위 및 기존 사이버상서 찾을 수 없었던 기술과 급진적인 발전 속도와 넓어진 활용 범위 등으로 유형을 구분하기 어려운 범죄다.

정보통신망 침해 범죄 사례로는 2020년 5월, 로블록스 해킹 사건이 있다. 로블록스 직원이 뇌물수수 후 해커에게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백엔드 고객 지원 패널에 접근해 한 달 간 1억명이 넘는 활성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조회하고, 플랫폼 내의 가상화폐를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을 해커에게 넘긴 사건이다.


로블록스는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이 운영하는 게임 플랫폼으로 단일 게임이 아닌 여러 대형 게임에 관한 정보가 모두 유출됐다. 무료로 기본 제공되는 창작 툴을 이용해 이용자가 자유롭게 게임을 만들고 이를 통해 다른 유저에게 인게임 소액 결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구조인데, 단일 게임이 아닌 여러 대형 게임에 관한 정보가 다 유출된 것이다.

전문 게임 크리에이터들은 로블록스의 플랫폼서 기업 형태로 창작 활동을 하고 로블록스는 해당 크리에이터들로부터 중간서 수수료를 취하는 형태로 운영돼왔다. 많은 양의 정보를 가진 해킹 가해자는 로블록스의 주요 게임들에 관련된 정보가 담긴 스프레드시트와 직원들의 민감한 정보들을 볼모삼아 금전적 이익을 취득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로블록스는 협상에 응하지 않았고, 4GB에 달하는 자료가 결국 한 온라인 포럼에 업로드됐다.

넘치는 유혹
다양한 사기

로블록스는 “탈취된 문서는 (해킹범이)갈취 시도의 일환으로 불법적으로 획득한 것이며, 우리는 해킹범의 요구에 따르지 않았다. 사건 발생 이후 조속히 외부 전문가들과 접촉, 자체 보안팀으로 보완했으며 비슷한 시도의 식별과 방지를 위해 시스템을 조정했다”고 전했다.

실제 블록체인 데이터 분석 기업 체이널리시스는 2022년 해킹을 통해 도난당한 가상자산은 19억달러라고 발표한 바 있다. 주공격 대상은 블록체인 기반 금융시스템 디파이(DeFi·탈중앙화 금융)였다.

해킹 외에도 기존 사이버 환경 대비 실시간 소통과 높은 현실감을 보이는 메타버스 특징으로 인해 아바타에 대한 추행이나 폭행 등의 사건도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3월에는 메타버스 아바타를 이용해 10대 여자아이를 상대로 ‘그루밍 성범죄’를 저지른 30대 남성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국내서 메타버스 아바타를 이용한 성범죄자에 대한 첫 번째 수사다. 일산동부경찰서는 아동청소년성보호에 관한 법률·아동복지법 위반으로 A씨(38)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하던 A씨는 2022년 1월 네이버 메타버스 플랫폼인 ‘제페토’를 통해 캐나다에 학교를 다니던 B(11)양에게 접근해 뽀뽀하는 모습이나 입 벌린 사진, 결혼서약서 등을 받은 혐의를 받았다.

경찰 조사 결과, A씨는 B양의 나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나이를 비밀로 하고 놀자”며 아바타 관련 아이템을 사주고 환심을 산 뒤 집주소,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를 수집했다.

또 B양에게 “숙녀로 보인다. 네가 존댓말 쓸 때면 흥분된다. 행동을 확실히 하라” “몸 찍은 영상이나 사진 보내 볼래?” “초콜릿 기프티콘 선물로 줄게. 역할 놀이 하자” 등 심리적으로 지배하려는 전형적 가스라이팅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아바타
법적 지위?


A씨는 제페토에 가입한 뒤 미소년 같은 외모로 아바타를 치장하고 피해자에게 접근해, 길게는 1, 2개월간 연락하며 친분을 쌓은 뒤 성적 대화를 나눴다. 자신의 신체를 찍은 영상을 피해자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같은 수법으로 메타버스서 약 1년간 초등학생부터 고교생까지 아동 청소년 11명의 신체 사진 등을 받아 성착취물을 제작해 보관했다.

국내에 거주 중이던 B양 부모는 A씨 행각을 알게 된 뒤 고소장을 제출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A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뒤 법무부를 통해 범죄인인도청구를 요청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전례가 없는 범죄로 신병을 구속·인도하는 절차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범죄인인도 불 청구 결정을 내렸다.

경찰은 무혐의를 주장하기 위해 귀국한 A씨를 공항서 체포했다. 경찰 관계자는 “선물을 주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한 뒤 피해자들이 노출 사진과 영상을 보내도록 만드는 A씨의 수법은 전형적인 온라인 그루밍”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바타를 스토킹하는 행위는 처벌이 어렵다. 아바타가 행위의 객체라는 지위를 갖지 않아서 법 적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서 스토킹 행위를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 또는 그의 동거인, 가족에 대해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정의해, 행위의 주체가 사람만 인정되고 있다.

앞서 지난 2022년 6월,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은 메타버스 내 아바타 범죄를 처벌하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해당 법안이 처벌 대상 행위를 ‘성적 언동’이라는 포괄적 표현으로 반영한 반면, 같은 당 윤영덕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에는 ‘성적 수치·혐오감을 일으키는 행위’와 ‘스토킹’으로 불법 행위를 구체화했다. 그만큼 메타버스 스토킹 범죄가 심각하다고 본 것이다.


“기프티콘 줄게 역할 놀이 하자”
그루밍, 스토킹, 성착취 등 빈번

온라인 스토킹 피해 실태 조사 결과, 20대 여성 응답자 903명 중 715명(79.2%)이 온라인 스토킹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피해 유형은 대부분 스토킹처벌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들이었다. ▲개인정보를 알아내 저장하기 56.8% ▲사생활 캐내기 56.4% ▲원치 않는 글‧이미지 전송하기 54% 등의 온라인 스토킹을 경험했다는 응답자 수가 절반을 넘었다.

중학교 2학년 C양은 최근 한 메타버스 플랫폼서 사이버 스토킹과 성희롱을 당했다. 한 남성 아바타가 C양의 아바타를 계속 쫓아오며 말을 걸었다. C양이 이를 계속 무시하자 욕설과 함께 성희롱성 발언을 퍼부은 것은 물론 의도적으로 아바타의 신체를 접촉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D양은 메타버스를 기반으로 하는 게임서 한 남성 아바타에게 계속 쫓기고 성적인 요구를 받았다. 제페토, 로블록스 등 메타버스 플랫폼서 ‘아바타’를 대상으로 한 성폭력과 스토킹, 그루밍 등 디지털 성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온라인 및 가상공간에서는 현실 세계와 달리 타인의 접근과 호의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다는 점을 악용하는 이들이 많고, 이런 점 때문에 아동·청소년이 성범죄에 노출되고 있는 실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사이버 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인력이 현저히 부족해, 경찰의 사건 예방은 기대기 힘든 게 현실이다.

경찰청은 경찰공무원 경력 경쟁 채용시험을 실시해 사이버수사 분야에 전문적인 인력을 선발하고는 있지만, 범죄 발생 건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물리적인 인력 부족과 더불어 지능화하는 범죄 수법에 대한 무지도 수사력 가름에 배제할 수 없는 원인이다.

충분한 인력과 전문성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서 새로운 영역인 메타버스서 발생하는 범죄 수사까지 하게 된다면, 수사 효율의 저하 등의 악영향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은밀화
지능화

결국 메타버스 이용자가 아동·청소년인 만큼,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을 철저히 하는 수밖에 없다. 이석원·김민영 자주스쿨 대표는 “최근 10년간 의무적으로 성폭력 예방교육을 진행한 결과 아이들이 성적 자기 결정권, 성적 동의, 성폭력의 정의와 유형, 현실서 해도 되는 성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하는 성 행동 등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가상공간의 성교육은 보편화돼있지 않은 데다 어른들조차 로블록스, 제페토, 이프랜드, 게더타운 등이 뭔지 모르는 만큼 메타버스 시대에 대비해 자녀는 물론 부모의 성교육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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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