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뒤흔든 '희대의 탈옥' 이야기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2.09.24 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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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한 현실판 프리즌 브레이크

[일요시사=김설아 기자]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돼있던 전과 25범의 피의자가 탈옥했다. 탈옥얘기를 다룬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의 치밀한 계획도 <프리즌 브레이크>에서처럼 온몸에 교도소 설계도를 문신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경찰관이 조는 틈을 타 한 뼘 높이의 배식 구멍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 역대 간 큰 탈옥수들을 살펴봤다.

미꾸라지처럼 구멍을 빠져나간 황당 탈옥사건이 발생했다. 전과 25범인 최갑복(50)은 지난 17일 온 몸에 피부연고를 발라 최대한 매끄럽게 만든 뒤 가로 45cm, 세로 16cm의 직사각형 배식구를 통해 도망쳤다. 유치장을 빠져나가는데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성폭행과 강도 등 각종 전과를 갖고 있는 최갑복은 탈주 6일만에 밀양서 검거됐다. 

탈옥 후 브라질서
부인과 살 계획

최갑복의 ‘배식구 탈출’이 최근화제라면 80년대는 조세형(당시39세)의 ‘대낮 대탈주’가 있었다. 전과 11범이던 그는 83년 4월 14일 TV 드라마 속의 죄수처럼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이날 서울 서소문에 있는 서울형사지방법원에 재판을 받으러 갔다가 구치소로 넘겨지기 직전 대기 중인 구치감에서 일을 벌였다. 순식간에 수갑과 포승을 푼 뒤 복도 벽의 환풍기를 뜯어내고 그 구멍으로 도주했다. 그 뒤 건물 옥상과 옥상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조세형은 상습절도범이었다. 1983년 검거 이전에도 절도죄만으로 6번이나 실형을 선고받았다. 부모도 누군지 모른 채 길거리에서 자라 소년원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던 그였다.

사회보호법에 따라 보호감호까지 청구돼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여론의 동정과 은근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조세형은 고관대작의 집만 골라 털어 ‘현대판 홍길동’으로 불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법원행정처가 펴낸 <법원사>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는 주로 고위공직자, 기업체 사장 등 부유한 집만을 골라 귀금속과 금품을 훔쳐왔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대도’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마치 의적처럼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우리 사회의 빈부갈등에 따른 위태로운 위화감이 표출되기도 하였다.”

조세형의 절도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부유층 대저택만 노렸고, 사람을 해치는 강도짓은 하지 않았다. 피 한 방울 흘리게 한 적 없다는 것은 그의 자부심이었다. 또 도둑질로 생긴 돈의 40%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결심까지 했다.

‘대도’ 조세형 대낮 대탈주, 구치감 환풍기 뚫고
전주교도소 탈옥3명, 쇠창살 자르고 담벼락 넘어

탈주 후에도 조씨의 절도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5박6일간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서울 도심을 활보하며 5차례에 걸쳐 주택에 침입해 음식과 현금 등을 훔쳤다.

그러나 이도 잠시. 끈질긴 추적을 벌인 경찰이 쏜 총에 가슴을 맞고 붙잡혔다. 다행히 살았다. 이후 진행된 심문에서 그는 “자신이 무기징역이 구형된 데다 보호감호 10년까지 청구돼 15~20년간을 복역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나이가 60이 가까워지므로 부인 나영씨와의 결혼생활이 지켜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탈주 결심 동기를 밝혔다. 그는 탈출 후 미국을 거쳐 브라질에 정착한 뒤 홍콩에 있는 부인을 불러들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세형은 특수절도에 도주 혐의까지 추가돼 징역 15년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다. 재심청구 등을 통해 16년만인 1998년 출소했다.

출감하자마자 그는 “신앙인으로서 거듭나겠다”며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자신을 검거했던 ‘수사반장’ 최중락씨의 도움으로 에스원 범죄예방 자문위원으로 위촉, ‘범죄예방 전도사’로 새 길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음식 구걸 후
최후의 순간

90년대 발생한 또 다른 탈주사건이다. 노태우 정권이 서슬퍼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지 두 달 밖에 되지 않던 때였다. 조세형처럼 구치감의 환풍기 구멍을 뜯지 않았다. 이들은 아예 감옥 쇠창살을 자르고 교도소 담벼락을 넘었다.

1990년 2월 27일 새벽 전주교도소를 탈출한 박봉선(당시30세), 신광재(당시21세), 김모군(당시17세) 등 3명은 감방 창문에 설치된 철책 2개를 쇠톱으로 자르고 사물함으로 쓰이는 선반으로 2.7m짜리 사다리를 만들어 4.5m 높이의 교도소 담을 넘었다. 그 뒤 경찰의 검문을 받다가 실탄 6발이 장전된 권총까지 빼앗았다.

박봉선과 신광재는 살인범이었다. 박봉선은 무기징역을, 신광재는 징역15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비해 함께 탈주했던 김군은 폭력 초범이었다. 1년만 형을 살면 나오게 돼 있었다.

이들의 도주행각은 이틀 만에 대전에서 경찰 감시망에 걸린다. 이후 경찰포위망이 좁혀오자 이들은 충북 청원군 문의면 대청호 안으로 숨어든다. 경찰은 뒤 쫓아가며 이들에게 자수를 권유했다.

박봉선은 권총을 겨누며 “먹을 것을 보내주면 자수하겠다”고 말했고, 경찰이 “한 명을 보내주면 갈전으로 함께 나가 음식을 가져오겠다”고 하자 김군을 대신 보냈다. 경찰은 김군을 곧바로 고무보트에 태워 연행했다.

경찰헬기에서는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리지 않으면 사살하겠다”는 방송이 잇달아 나왔다. 경찰이 접근해오자 박봉선이 머리에 권총1발을 발사해 자살했으며 신광재 역시 권총을 주워 왼쪽가슴에 쏘았다. 박봉선은 현장에서 숨지고 신광재는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숨졌다.

두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전주교도소 탈옥극’의 전모는 영구 미스터리로 남았다. 경찰에 잡힌 김군은 단순공범이라 아는 게 없었다. 직경 2cm나 되는 쇠창살을 어떻게 잘랐는가 하는 의문도 풀리지 않았다.

수시로 감방 복도를 오가는 교도관의 눈을 피해 이 작업을 완성하려면 20여일 이상 걸린다는데 이를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탈옥 욕망’으로
초인적 다이어트

1997년 1월 20일엔 희대의 탈옥수가 탄생한다. 그 이름은 신창원(당시30세). 그는 부산교도소 감방 화장실 통풍구 철망을 뜯고 사동 밖으로 나온 뒤 교도소 내 공사장을 통해 밖으로 달아났다.

신창원은 강도치사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중범죄자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잃고, 82년 절도죄로 김제경찰서에 붙잡혀 소년원에 처음 들어갔다.


이후 절도 등으로 3번 더 교도소를 들락거렸던 그는 89년 3월 공범 3명과 함께 서울 성북구 돈암동 정모씨 집에 침입, 정씨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해 6개월여 동안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89년 9월 검거된 그는 강도치사죄로 무기형이 확정됐다. 당시 그는 이 형에 몹시도 분노했다고 한다. 자신의 범죄에 비해 너무나 무거운 형을 받았다는 것.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 역대 최장 탈옥기간 달성    
영원한 해방을 꿈꾸던 탈옥수들의 비참한 말로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신창원은 허구헌날 싸움질에 사고를 연발하다가 이감을 거듭하던 중 부산교도소에 온 이후 거짓말처럼 사람이 변했다. 모범수가 됐고, 운동도 열심히 하여 몸을 가꾸는 건실한 수감자로 생활했다.

원래 80kg이 넘던 그가 60kg의 날렵한 체구로 변해갔다. 그러나 그의 초인적인 다이어트 동기는 따로 있었다. 교도소 내 교회 공사를 위해 교도소 외벽 일부가 철거되고 철제 울타리로 대체된 뒤였고, 화장실 환풍구의 쇠창살이 허술하게 보였던 것이 이유였다. 그는 몰래 손에 넣은 쇠톱으로 쇠창살을 조금씩 잘랐고 몰라보게 날씬해진 몸으로 그 사이를 통과했다.

탈옥 후 신창원은 도주하는 동안 모두 5차례에 걸쳐 경찰과 맞닥뜨리고도 유유히 검거망을 벗어나며 2년6개월여 동안 도피행각을 벌여왔다. 1999년 7월 검거되기 전까지 그는 절도 104건, 강도 5건, 강도강간 1건 등 총 142건에 달하는 범죄를 저질렀고 검거 후 22년 6월의 형이 추가됐다.

이처럼 범죄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일들이 철통보안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교도소에서도 간간히 발생했다. 절도를 저지르고 사람을 죽이는 등의 죗값을 치르는 길 대신 감옥을 뛰쳐나와 야수처럼 날뛴 탈옥수들.


시작은 요란
그 끝은 ‘처참’

출소이후 ‘절도인생’의 종지부를 찍을 것 같았던 대도 조세형은 제버릇 남 못주는 절도행각으로 ‘좀도둑’신세로 전락했고, 독 안에 갇혀 먹을 것 좀 달라고 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박봉선과 신광재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그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어쩌다가 사람을 죽였는지, 교도소에서 어떤 처지였는지, 어떻게 탈옥했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역대 탈옥수 중에서 최장 탈옥기간 기록을 달성한 신창원은 체포된 이후 특급의 감시를 받는 죄수로 10년이 넘도록 독방 생활을 했다. 답답함을 못 이기던 그는 지난해 자살 기도까지 했다.

인과응보일까. 사회적 책임일까. 어쨌든 영원한 해방을 꿈꿨던 그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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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