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24시간 돌아가는 ‘도박 도우미방’ 실체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08.08 12:56:17
  • 호수 1387호
  • 댓글 1개

“돈 따게 도와드립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불법 도박사이트에 들어갔다. 사이트를 찾는 데 걸린 시간은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사이트를 가입하는 데도 그 정도 소요됐다. ‘불법이니까 꼭꼭 숨겨놨겠지’라는 생각은 완벽하게 비켜나갔다. 대신 사이트는 해외에서 관리됐다. 사이트 관리자나 회원은 한마음 한뜻으로 보안에 힘써 사이트를 관리했고, 도박사이트 회원 카톡방은 도박 정보공유로 24시간 쉬지 않았다.

도박은 돈이나 본인의 소유물을 상대에게 걸고, 결과가 불확실한 사건에 내기를 거는 행위다. 이 행위는 경쟁을 포함하는 놀이, 금전을 추구한다. 특징은 승패가 우연성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결과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약 바둑이나 장기 등의 게임을 하면서 돈을 건다면 도박이 된다.

중독되는
시스템

도박 종류는 여러 가지다. 오프라인에서 사람이 하는 스포츠 경기인 축구, 야구, 당구, 골프, 권투, 볼링, 자전거, 자동차, 모터보트 등에서 참여 선수 중 누가 이길지 돈을 거는 방식이 있다. 주로 경마, 경륜, 경정, 체육 진흥 투표권으로 진행된다.

동물 경기로는 경견, 투견, 투계, 소싸움 등이 대표적이다. 기구나 기계를 이용해서 하는 도박도 있다. 윷놀이, 주사위, 장기, 바둑, 체스, 화투, 골패, 마작이 대표적이다.

도박용 기계를 사용하는 스크린 경주, 빙고, 룰렛, 슬롯머신, 전자오락도 있다. 이 경우는 보통 장소가 불법 하우스, 바다 이야기, 스크린 경마, 카지노에서 이뤄진다.


숫자 추첨 방식인 로또나 복권도 도박으로 분류되고, 재물 자체를 걸고 하는 주식 투기 역시 도박으로 분류된다.
온라인에서 하는 도박도 있다. 보통은 오프라인에서 하는 게임을 온라인으로 가져온 형태다. 트럼프, 도박형 웹보드 게임, 사다리, 그래프 로하이 등이 있다.

도박 종류가 많은 만큼 부작용도 잇따른다. 도박은 대중화돼있고, 도박을 접할 기회는 남녀노소 상관없이 어디서나 존재한다. 특히 대부분 사람은 도박을 잠깐의 오락이나 여가로 여기고 시작하기 때문에, 본인이 도박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불법 도박하는 청소년 50% 이상 증가
“중독 탈출 도와주겠다” 사이트 소개

하지만 대부분은 ▲대박에 대한 기대 ▲충동적 행동 ▲잃은 돈을 만회하고자 하는 욕구 ▲도박에 이길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 있다는 생각 ▲불쾌한 일을 대처하기 위한 방법 모색 ▲우울감이나 외로움으로 도박에 중독된다.

도박이 가진 사회적 문제는 너무 많지만, 최근 들어서 더욱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는 도박이 성인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도박을 접하는 연령층이 확연하게 낮아졌다. 

도박 중독으로 진료를 받거나 치료를 받고 있는 청소년이 최근 50%가량 증가했다. 청소년들은 ‘온라인 도박’으로 도박을 접했다.

더불어민주당 오영환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청소년 도박 중독으로 진료를 받은 만 10~19세 청소년이 2018년 65명에서 2020년 98명으로 약 50% 증가했다.


도박 중독으로 인한 청소년 도박 범죄 검거도 증가했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경찰의 청소년 도박범죄 검거 현황을 살펴보면 48명에서 55명으로 증가했다. 연령별로는 제일 어린 연령이 14세였다. 

한국 도박 문제 관리센터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2020년 청소년 도박 문제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도박 첫 인지 경로는 ‘주변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 51.2%, ‘친구나 선후배의 소개’ 19.8%인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들이 접한 도박의 종류는 ▲온라인 스포츠 도박 801건 ▲기타 온라인 도박 796건 ▲카드 38건 ▲기타 27건 ▲화투 12건 ▲성인오락실 6건 ▲체육 진흥 투표권 6건 ▲주식 1건 순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도박은 불법이다. 정확하게는 한국 국적자에게 공인한 도박은 복권, 경마, 경륜, 경정, 강원랜드 카지노, 체육복표사업인 스포츠 토토, 베트맨, 소싸움이다. 모두 성인만 이용이 가능하다.

루저들
돕고 싶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청소년들이 도박을 접근하는 게 이렇게 쉬운 것일까. 게다가 청소년들이 이용을 많이 한다는 온라인 스포츠 도박은 불법이다. 

<일요시사>는 온라인 불법 도박사이트 접근을 시도했다. 일차적으로는 도박사이트 접근이 얼마나 쉬운지 아는 것과 사이트가 유지되는 방법이 궁금해서다. 이용자가 얼마나 많을까.

우선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플랫폼으로 알려진 유튜브(YouTube)에서 ‘도박’을 키워드로 검색했다. 다양한 콘텐츠들이 쏟아졌다. 도박에 관련된 영화 리뷰, 도박 중독자 인터뷰, 도박에 중독되지 않는 법 등이었다. 

그중 눈에 띄는 영상이 있었다. 이 영상에서는 자신을 도박 중독자였다고 소개했다. 과거에 자신은 도박 중독으로 생활이 힘들었던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도박으로 진 빚을 다 갚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그때 든 생각이 단 도박을 하는 것이다. 적은 금액과 적은 시간을 투자해서 아주 가끔 배팅을 즐기다 보니 도박 중독에 쉽게 벗어났다”며 “이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단 도박을 해서 도박 중독에 벗어나도록 도와주고 싶다. 지금은 직장도 그만두고 총판을 하면서 번 돈으로 영상 제작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도박에서 이기는 법 ▲강원랜드 현실 ▲도박 중독 탈출 방법 등의 영상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주저 말고 연락하라고 당부하며 링크를 남겨놨다. 그 링크를 따라 들어가니 카카오 그룹 채팅방으로 넘어갔다.

너무 쉬운
접속 방법


채팅방에 들어가니 상담원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봤던 영상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상담원은 바로 “도박사이트에 가입하겠느냐”고 물었다. 도박 중독에 도움을 주겠다는 영상의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상은 도박에 관심 있는 사람을 모으는 용도였을 뿐이다. 

상담원은 “게임을 잘 모르면 가족방을 보고 알아가면 된다. 처음인 사람도 많은데, 대부분 오래되신 분이라 승률이 높다. 어차피 본인이 게임 배팅을 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사이트에 가입하면 카카오톡 ‘가족방’에 초대받을 수 있다고 했다. 가족방은 도박 게임을 공개적으로 도와주는 곳이었다. 가입비도 없고 요금 충전 강요도 일절 없다고 덧붙였다.

도박사이트 가입은 단순했다. 아이디나 비밀번호 등 일반적인 개인정보를 적으면 끝이었다. 현금을 거래할 은행 계좌번호도 적었다.

사이트에 가입하자 가입 확인 전화가 왔다. 해외에서 연결된 번호였다. 전화 상담원은 “계좌번호가 대포통장인지 확인해야 한다. 계좌로 1원을 보낼 테니 거기 나온 4자리 숫자와 신분증을 보내달라. 신분증 뒷자리는 가려서 보내면 된다”고 말했다. 사이트 가입이 승인되면 공지사항을 꼭 확인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도박사이트에 접속하자마자 게임이 보였다. 여기에는 ▲네임드 달팽이 ▲주사위 게임 ▲파워 사다리 ▲파워볼 게임 ▲로투스 홀짝 ▲로투스 바카라 ▲로투스 용호 ▲로투스 식보 등이 있었다.


이 게임을 하기 위해선 현금을 충전해야 한다. 입금 계좌는 수시로 변경되기 때문에 입금 전 항상 문의를 해야 한다. 경찰 단속을 피하기 위한 용도로 보였다. 또한 도메인 주소도 자주 변경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기는 법’ 미끼로 ‘가족방’ 가입 유도
수시로 바뀌는 입금 계좌·도메인 주소

도메인 주소 변경은 사전 쪽지나 공지를 통해 회원에게 통보 후 문자로 주소를 보내준다고 나와 있다. 또 회원이 보안에 신경 쓰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니 타 사이트와 같이 이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게시판에는 회원들이 남긴 글도 있었다. 대부분은 도박에 이기자고 다짐하는 글이거나, 도박에 진 걸 아쉬워하는 글이었다. 하루에 올라오는 게시물이 많은 것을 감안할 때 도박사이트 이용자 역시 많을 것으로 추측됐다.

이쯤해서 가족방에 초대됐다. 가족방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파워볼, 파워 사다리, 달팽이, 다리다리 게임을 도와주는 ‘미니 게임방’과 로투스, 바카라, 홀짝의 ‘카드 게임방’ 그리고 스포츠 대화방이었다. 

한 가족방당 인원은 300명정도였다. 최소한 이 정도의 인원이 도박사이트를 이용하는 것으로 추측됐다. 사적인 대화는 일절 없이 대부분 게임 정보를 공유했다.

“다니엘, EOS 5분 - 99 일홀 적중, 01 일언” “모아니면모 - #김○○, 09:05 Tepatitlan 2.5?? ○, 09:10 알도시비 2.5?? ○, 다음기준 4.43배, 적중ㅅ ㅅ ㅅ ㅅ ㅅ ㅅ ㅅ ㅅ” 등으로 대부분 도박 은어로 대화했다.

짬이 날 때면 “도박 빚은 일해서 갚는 거다” “돈 왕창 벌어서 복수하자” “날도 더운데 고생이 많다” “꼭 승리하자” 등의 일반적인 대화를 나눴고, 스포츠 경기 방에는 경기를 분석하는 대화를 이어갔다. 

가족방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카카오톡 프로필을 수정할 수 없었는데, 각각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한 눈에 봐도 앳되게 보이는 학생의 사진, 군복을 입은 사진 등이 많았다.

저녁쯤에는 그날 수익을 표로 만들어 게재했다. 이 표는 지난 4일 기준으로, 수익이 얼마나 발생했는지 보여줬다. 현 순수익은 8억2259만원이었고, 매달 최소 100만원에서 최대 4000만원의 수익을 발생시킨 달도 있었다. 손해를 본 달은 딱 한 번뿐이었다.

앞선 표를 보면 도박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직접 도박을 했던 사람은 도박으로 수익을 절대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도박 중독 치료를 받고 있는 A씨는 “도박은 돈을 따기가 쉽다. 그리고 게임을 하다 보면 ‘이길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게임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선심 유혹

이어 “이렇게 만들지 않으면 도박 중독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도박하는 사람들 다 큰돈 만져봤고 수십일 게임에서 이긴다. 그런데도 적자”라며 “365일 중 364일 이기면 뭐하나. 하루 만에 1년 이긴 것과 대출까지 해서 다 잃어버린다. 도박은 그런 것”이라고 귀띔했다.


<alswn@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