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비상이 아닌데 비대위가 출범한다. 국민의힘은 지난 1일 의원총회에서 당 지도부를 해체하고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체제로 전환하기로 합의했다. 지난해 재보궐선거와 올해 대통령선거, 지방선거까지 모두 이긴 정당이 급작스레 비대위를 출범하는 일은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보통 정당이라면 꺼려할 ‘비상 상황’을 국민의힘은 왜 이렇게 좋아할까.
지금쯤 승리의 축배를 들고 신이 나 있어야 할 여당에서 연이은 총소리가 들린다. ‘내부 총질’소리다. 5년 만에 돌려받은 권력을 두고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과 이준석 대표 간의 혈투가 발발한 것이다. 지난 6월 이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 후 곧바로 혁신위원회를 띄우며 당을 전면적으로 쇄신할 것을 선언했다.
비상 상황
여기서부터 국민의힘 총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민의힘 지도부 몇몇이 공개적으로 혁신위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국민의힘 배현진 최고위원은 “혁신위가 이 대표의 사조직에 가깝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며 조직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정진석 국회부의장은 “국민을 위한 혁신위가 아니라 이준석을 위한 혁신위 같다”며 “혁신은 좋은데 갑자기 화두만 던지고 우크라이나에 가버렸기 때문에 이 혁신이 무슨 혁신인가 하는 궁금증이 있다”고 꼬집었다. 정 부의장은 이후 본인의 SNS에 이 대표의 우크라이나행에 대해 더 거센 비판을 이어갔다.
그는 “정부가 난색을 표했는데도(우크라이나행을) 강행했다. 자기 정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본인의 SNS를 통해 “어차피 기차는 달린다”며 우크라이나행과 혁신위에 대한 비판 둘 모두를 견제했다. ‘개가 짖어도’란 말이 빠져있었지만 이 글을 본 누구나 정 부의장의 말을 ‘개 짖는 소리’ 쯤으로 표현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질 때쯤, 갈등은 엉뚱한 곳에서 풀리게 됐다. 이 대표가 성접대 관련 의혹으로 윤리위로부터 중징계를 받은 것이다. 이 대표는 6개월 당원권 정지 처분을 받아 자연스럽게 당 지도부에서 일을 못하게 됐다.
연일 시끄러운 잡음을 내던 국민의힘 내부 총질은 ‘이 대표의 잠행’으로 한동안 휴전에 들어갔다. 징계를 받고 당에서 물러난 이 대표가 지방 잠행에 들어가면서 지도부 간 불협화음이 한층 줄어들게 된 것이다.
총소리가 다시 들린 건 지난달 26일이었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대정부질문이 열리는 국회 끝자리에서 대통령과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한 매체의 카메라 기자가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담은 사진에는 정계를 발칵 뒤집을만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문제의 사진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권 원내대표에게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라고 보낸 문자메시지가 담겼다. 그동안 ‘설’로만 떠돌던 윤 대통령과 이 대표 간의 껄끄러운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잠행을 이어가던 이 대표가 이 문자를 보고 잠행을 깼다. 속으로만 느껴왔던 설움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억지’ 조기 전대…차기 당 대표 임기도 2년?
윤핵관·윤 대통령 당 완전 장악 시나리오 보니…
그는 울릉도에서 올린 SNS글에 “그 섬(여의도)에서는 카메라 사라지면 눈 동그랗게 뜨고 윽박 지르고, 카메라 들어오면 반달 눈웃음으로 악수하러 오고, 앞에서는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뒤에서는 정상배들에게서 개고기를 받아와서 판다”라고 적었다.
앞에서는 이 대표와 웃으며 인사하던 최고위원들과 원내대표, 그리고 더 나아가 대통령을 겨냥한 총질이었다. 당은 크게 휘둘렸고, 정당지지도와 대통령 지지도가 순식간에 빠져 나갔다.
특히 대통령 지지율은 사상 처음으로 두 달 만에 20%대로 진입했다. 당정이 흔들리자 국민의힘 지도부는 하나둘 사퇴하기 시작했다.
사건의 당사자인 권 원내대표는 당시 맡고 있던 당 대표 대행직을 내려놓겠다고 밝혔고, 이 대표와 여러 차례 설전을 벌인 배 최고위원도 최고위원직에서 물러나며 당 내홍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 이들 사퇴에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사퇴함으로써 이 대표를 완전히 아웃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심이다.
지금 비대위가 들어서게 되면, 이 대표는 자동으로 ‘해임’되고 비대위원장이 당 대표 권한을 갖는다. 당헌·당규 해석상 논란은 있지만, 여권 내부 관계자는 현재 영향력 있는 지도부 인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이 대표의 자리를 없애는 방향'을 지지하고 있다고 <일요시사>에 알려왔다.
이렇게 비대위 체제에서 조기 전당대회를 열어 버린다면, 새로운 당 대표가 선출된다. 이 경우 이 대표는 당원권 정지가 풀리는 내년 1월에 국민의힘 평당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전당대회 기간 동안 당원권이 박탈된 이 대표는 전당대회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 뽑히는 당 대표의 임기도 논란이다. 원칙대로라면 새로 뽑히는 당 대표의 임기는 이 대표의 잔여 임기인 6개월이어야 한다.
그러나 국민의힘 전국위원회 의장인 서병수 의원은 지난 3일 소통관에서 “비대위가 출범하게 되면 다음에 열리는 게 전당대회”라며 “해석에 따르면(차기 당 대표는) 2년 임기를 가진 온전한 지도부가 될 것”이라고 발언해 임기가 2년 보장된 당 대표 선출을 밀어붙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대표의 측근으로 알려진 여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현재 이 대표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사실상 가처분 신청밖에 없다”며 “당헌·당규상 비대위 전환도 말이 안 되는데 당 대표를 새로 뽑겠다는 것은 정말 억지 논리다.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억지 쓰는 것을 많이 봐왔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직격했다.
이어 “이 억지 논리대로 임기 2년을 보장받은 차기 당 대표가 선출되면 좋아할 사람은 윤핵관들과 윤 대통령뿐이다. 이들은 당내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조기 전당대회를 연다면 윤핵관 멤버들의 득세가 확실시 되는 분위기다.
문제를 촉발시킨 권 의원은 이미 원내대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최측근으로 알려진 안철수·이철규·유상범 의원, 나경원 전 의원 등이 당 대표 후보 하마평에 올라 있다.
최고위원들 역시 이 대표가 임명한 사람은 모두 사퇴하게 되고 새로운 대표가 임명한 사람들과 선출된 위원들로 채워지게 된다.
동상이몽
국민의힘은 완벽한 ‘친윤당’으로 발돋움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무수히 많은 원칙을 깨야 하는 게 사실이다. ‘원칙’과 ‘공정’을 기치로 내세우며 대통령에 당선된 윤 대통령의 정체성과 매우 상반되는 행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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