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윤석열정부 초대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 앞서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정부에서 모두 차관급 이상 고위직을 거친 데 이은 다섯번째 ‘중용’을 눈앞에 두고 있다. 청문회를 통과한다면 역대 3번째로 진보·보수정권에서 모두 총리에 오른 인물이 된다. 그 비결은 40년간 쌓아온 입지전적인 관직 경력에 있다는 게 중론이다.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는 1949년 6월18일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6남3녀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김대중정부 출범 이전에는 서울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1990년대까지 만연했던 호남 차별 탓에 한때 본적을 숨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름받은
백전노장
호남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한 후보자는 서울 소재의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이후 1967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하면서 이른바 ‘KS 라인(경기고·서울대 경제학과)’에 합류했다.
한 후보자는 서울대 재학 중이던 1970년 제8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첫 발령지는 관세청이었다.
1977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79년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했다. 상공부로 근무하던 1982년 다시 유학길에 올라 1984년 같은 곳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 취득 뒤에도 공직생활은 이어졌다. 상공부 중소기업국장, 산업정책국장, 전자정보국장 등을 역임했다.
1993년 3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하자 잠시 대통령비서실 산업담당비서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94년 상공부로 복귀해 기획관리실장에 이어 통상무역실장을 맡았다. 이때 한 후보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추진, 대일(對日) 무역 규제 해제 등의 굵직한 업무를 처리했다.
1996년 12월, 48세의 나이로 차관 승진에 성공한다. 1997년 3월까지 특허청장을 지낸 뒤 통상산업부 차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임 중 IMF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이를 수습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김대중정부 들어서는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역임했다. 이때 한미자유무역협정(이하 한미 FTA)을 최초로 추진했다. 역임 중 산업자원부 장관 하마평에 여러 차례 올랐지만, 실제 지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01년 주 OECD 대한민국 대표부 이사를 지내고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경제수석비서관으로 연이어 임명됐다. 하지만 임명 6달 만인 2002년 7월, 중국과의 ‘마늘 분쟁’ 관련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한 후보자는 30여년의 공직생활을 뒤로한 채 1년간 숨을 골랐다. 이 기간 국내 유명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고문으로 8개월가량 활동하기도 했다.
김영삼부터 이명박까지 연속 러브콜
확정되면 진보·보수 오간 3번째 총리
그는 노무현정부(이하 참여정부) 들어 공직사회에 복귀했다. 2003년 7월 산업연구원 원장으로 취임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2004년 2월부터 2005년 3월까지 약 1년간 국무조정실장으로 일했다. 이라크 파병, 행정수도 이전 관련 업무를 지원하며 정무‧안보 경험을 쌓았다. 실장 재임 기간 중 노 전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기도 했다.
2005년 3월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영전했다. 당시 “꽤 이례적인 결정”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재무관료들이 주로 배치되던 자리에 통상산업관료의 정도를 걸어온 한 후보자가 임명됐기 때문이다.
한 후보자는 재임 당시 여러 경제정책들을 손봤다.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 금산법(금융-산업자본 분리)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2006년 3월에는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1절 골프 사건’으로 사퇴하면서 국무총리 권한대행을 겸임했다. 다음 달인 4월 한명숙 국무총리가 임명될 때까지 국정 공백을 최소화했다.
부총리 퇴임 직후인 같은 해 8월에는 한미FTA 체결의 ‘마무리 투수’로 나섰다. 체결지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협정 체결 전 막판 협상을 이끌었다.
참여정부 임기 말, 마지막 국무총리로 발탁됐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붕괴되면서 사실상 여소야대 형국이 펼쳐진 상황에서도 인사청문회를 무난하게 통과해 인준받았다.
총리 재임 기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경험했다. 당시 북한 내각 총리 김영일과 남북총리회담을 갖기도 했다. 한 후보자는 임기 말 총리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참여정부 초기 총리였던 고건 전 총리처럼 ‘행정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시 돌아온 보수정권에서도 ‘실무형 인사’라는 평가 속에 어김없이 중용됐다. 이명박정부는 한 후보자가 한미FTA 협상을 주도했던 이력을 높게 사면서 그를 주미대사로 임명했다.
그는 한미FTA 비준 과정에서 미국의 여러 지방정부와 의회를 돌며 이들을 설득했다. ‘한미FTA 전도사’라는 별명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40년 공직
실무형 인사
한 후보자는 2012년 2월 주미대사를 퇴임하면서 40여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지었다. 그 뒤에는 한국무역협회 회장,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등을 거치며 공직 바깥에서 활동해왔다.
그랬던 그가 순식간에 국내 정치의 한복판으로 귀환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한 후보자를 초대 국무총리 후보자로 발표하면서다.
윤 당선인은 경제 및 대미 전문가, 국민 통합 등 여러 요소를 두루 고려해 한 전 총리를 지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정치신인인 윤 당선인에게 부족한 경륜과 국정운영 경험을 보완해줄 수 있다는 점 역시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윤 당선인은 지난 3일 기자회견을 열고 “새 정부는 대내외적 엄중한 환경 속에서 우리 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기틀을 닦아야 하고, 경제와 안보가 하나가 된 ‘경제안보 시대’를 철저히 대비해 나가야 한다”며 “한 후보자는 민관을 아우르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내각을 총괄하고 조정하면서 국정과제를 수행해나갈 적임자라고 생각한다”고 총리 지명 배경을 전했다.
한 후보자는 윤 당선인으로부터 후보자로 지명받은 직후 소감을 남겼다.
한 후보자는 “대한민국을 둘러싼 대내외적 경제와 지정학적 여건이 매우 엄중한 때에 국무총리로 지명되는 큰 짐을 지게 돼 영광스러우면서도 매우 무겁고 큰 책임을 느낀다”며 “새로이 지명되는 총리로서 윤 대통령을 모시고 행정부가 중심이 되는 정책을 꾸준히 만들고, 치열한 토론과 소통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정책들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한 후보자는 “협치와 통합이 굉장히 중요한 정책의 요소가 될 것”이라며 “제 모든 노력을 기울여 윤 당선인과 행정부, 입법부, 국민과 협조하며 좋은 결과를 내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한 후보자는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서 “경제와 안보가 하나로 뭉쳐서 굴러가는 과정에서 기존의 세계화·개방·시장경제를 다소 변경시켜야 하는 과제가 있다”며 ‘국익외교와 국방 자강력’ ‘재정건전성’ ‘국제수지 흑자 유지’ ‘생산력 높은 국가 유지’ 등을 국가 중장기적 운영을 위한 4대 과제로 꼽았다.
경륜 충만
통합 인사
한편 정치권에서는 한 후보자에 대한 환영과 우려가 공존하고 있다. 우선 한 후보자는 올해 73세로 비교적 고령이다. 2012년 주미대사로 일한 이후 10년 넘게 공직에 나서지 않은 점 역시 함께 지적됐다. 고령과 경력 단절이 업무 능력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겠다는 우려다.
이에 대해 한 후보자는 “계속 공부해오는 스타일이라 정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며 “오래 했다는 것은 그만큼 경험과 위기대응 능력이 있을 수 있다는 측면이 있고, 건강도 지금 너무 좋다”고 답했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저축은행 책임론·론스타 관여 의혹 등도 발목을 잡는다.
몇몇 시민단체는 한 후보자가 저축은행 사태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재정경제부 장관이었던 시점에 기업 대출 한도를 무제한으로 풀어주도록 관련 법이 개정된 게 저축은행 부실화의 시발점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2011년 1조원이 넘는 피해를 가져온 ‘저축은행 사태’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한 후보자가 2002년경 8개월간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으로 재직한 이력도 논란이 됐다. 시민단체 ‘투기자본감시센터’는 한 후보자가 김앤장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받은 보수가 론스타 외환은행 불법매각 은폐에 대한 대가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앞서 김앤장은 론스타의 국내 법률대리인으로 활동한 바 있다.
한 후보자는 지난 4일 “론스타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정부의 정책 집행자로서 관여한 부분은 있지만, 김앤장이라는 사적인 직장에서 관여한 바는 전혀 없다. 저는 그 일에 관여된 적이 없다”며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
반면 한 후보자는 국민 분열·여소야대라는 난국 속 험난한 검증 과정을 무난히 통과할 인사라는 기대 역시 받고 있다.
호남·참여정부 출신…여소야대 정국 해법?
저축은행 책임·론스타 의혹 소명이 관건
실제로 그는 공격받을 지점이 상대적으로 적다. 고위 공직자 후보들의 주요 낙마 사유로 꼽히는 군 문제, 자녀 문제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한 후보자는 앞서 참여정부 부총리 청문회 때 육군 병장 만기전역으로 병역의 의무를 다한 사실이 알려졌다. 슬하에 자녀도 없다. 또한 출신에 따라 ‘통합인사’로 분류될 수 있다는 점 역시 장점으로 꼽힌다.
거대 야당이 된 더불어민주당 입장에서도 호남 출신이자 참여정부 총리 출신인 한 후보자를 반대할만한 명분이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한 후보자가 정치색이 옅은, 실무 중심의 관료 출신이라는 점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민주당이 이를 부정하며 검증의 ‘칼날’을 날카롭게 벼르는 탓에, 청문회 분위기는 아직 ‘안갯속’이다. 민주당은 각종 의혹들을 열거하며 송곳 검증을 예고하고 나섰다.
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는 지난 4일 “우리 정부 때도 뭘 했다, 호남이다 이걸 감안해서 한 것 같긴 하지만 염려되는 것은 있다”며 “국민 통합이 중요한데 호남 출신이기 때문에 국민 통합이(자연히) 될 것이라는 건 아주 1차원적인 접근”이라고 말했다.
같은 당 이수진 원내대변인 역시 “총리직을 수행했던 15년 전과 달리 대한민국은 기후위기 극복과 탄소중립, 신냉전 국제질서, 고령화와 청년 불평등 문제 등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문제들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은 앞서 제기된 저축은행 사태 책임론, 론스타 관여 의혹에 이어 ‘김앤장 18억 고문료 의혹’을 짚고 나섰다. 지난 4일 SBS 보도에 따르면, 한 후보자는 2017년부터 4년4개월 동안 김앤장으로부터 18억원이 넘는 고문료를 받아왔다.
박 원내대표는 지난 5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법률가가 아닌 고위 관료가 김앤장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국민이 궁금해한다”며 “(한 후보자가)김앤장으로부터 받은 월 3500만원이 법과 원칙, 공정과 상식, 도덕과 양심의 기준에 맞는지 들여다봐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와 관련해 김은혜 당선인 대변인(현재 사퇴)은 “일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점도 저희가 인지했던 것 같다”면서도 “앞으로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총리 후보자가 이 부분에 대해 국민들게 설명을 드릴 것으로 안다”는 해명을 내놨다.
한 후보자 역시 “최선을 다해 진정성 있게 청문회에 대응하겠다”며 “결과는 진정성 있게 최선의 노력을 한 결과로 받아들이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각종 의혹
해명 어떻게?
한편 한 후보자가 이번에도 국무총리에 오를 경우, 이는 진보-보수정권을 아우르며 국무총리를 지낸 역대 3번째 사례가 된다. 한 후보자 이전에는 박정희정부와 김대중정부에서 국무총리직을 역임한 김종필 총재와 김영삼정부와 노무현정부에서 총리직을 수행한 고건 전 총리가 있었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시장 개방론자’ 한덕수 뚝심 일화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는 대표적인 시장 개방론자로 알려졌다. 시장을 개방하고 다른 국가들과 경쟁해야만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경제관료로 일할 때는 목소리를 높인 때가 거의 없지만, 통상 분야에서는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해왔다.
1998년 통상교섭본부장 시절 장관급 관료 중 최초로 관용차를 수입차로 바꾼 일화는 유명하다. 수입차에 대한 한국 정부의 시장 개방 노력을 알리겠다는 취지였다.
그는 수입자동차협회에 차종을 추천받아 스웨덴 사브 차량으로 관용차를 바꿨다.
스크린쿼터(정해진 기간 동안 한국 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하게 하는 제도) 폐지 주장도 눈길을 모았다. 그는 같은 해 7월 “영화업계 위기 극복을 위해 스크린쿼터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미 투자협정 협상 때 미국 정부가 스크린쿼터제를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한 후보자는 국내 영화계의 거센 반발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부총리 시절인 2006년, 그는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73일로 줄이는 일에 앞장섰다.
아울러 부총리 때 쌀 시장 개방, 추곡수매제(정부가 농민들에게 일정한 가격으로 쌀을 사들이는 제도) 폐지 등을 추진하다가 ‘볍씨 세례’를 당하기도 했다.
2005년 10월 음성군의 한 농촌 마을을 방문했다가 해당 정책들을 반대하는 농민들이 한 후보자와의 대화를 요구하며 관용차에 볍씨를 뿌리고, 앞에 드러눕는 등 격하게 항의한 것이다.
하지만 한 후보자는 이 같은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정책들을 추진했고, 결국 추곡수매제는 2005년을 끝으로 폐지됐다.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