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욕먹는 빅토르 안

어제의 영웅, 오늘은 역적으로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쇼트트랙 황제’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이 국내 여론의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석연치 않은 판정 논란 속에 실격당한 한국 대표팀 앞에서, 그 덕을 톡톡히 본 중국 선수들과 기뻐하는 장면이 중계화면에 포착된 탓이다. 여론이 들끓으면서 과거 빅토르 안의 행적과 발언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가려졌던 사실들의 파급력은 그동안 대중들에게 빙상연맹 파벌싸움의 철저한 피해자로 각인돼있던 그의 이미지를 뒤바꾸고도 남을만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국위선양에 앞장서던 ‘국민 영웅’이 10여년 뒤 ‘배신자’라고 비난받는 모습은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다. 한국 국가대표에서 러시아 귀화를 거쳐, 중국 대표팀 코치가 된 빅토르 안의 이야기다.

쇼트트랙 황제
파란만장 이력

빅토르 안을 보는 국내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다. 단순히 한국에게서 금메달을 뺏어갔다는 게 이유는 아니다. 많은 국민이 그가 소치에서 러시아에 금메달 3개를 안겼을 때 축하와 응원을 보냈다. 오랜 부침을 이겨내고 정정당당히 재기한 선수에게 서운함보다는 존중과 경의를 표했다.

이번에 빅토르 안이 지도했던 중국 선수들은 정정당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금메달 획득에만 혈안이 돼 온갖 부정과 반칙으로 올림픽 정신을 훼손했다. 유독 자주 포착되는 거친 신체접촉과 편파판정 논란 등으로 중국 대표팀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결국 중국은 쇼트트랙 혼성계주와 남자 1000m 종목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얻은 금메달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빅토르 안의 모습에 국내 여론은 싸늘하게 식었다. 갈수록 깊어지는 반중 정서도 기름을 부었다. 환호하는 중국 대표팀과 고개 숙인 한국 대표팀의 모습이 교차되자, 비난의 화살은 고스란히 빅토르 안과 부인 우나리에게로 향했다.


한때 빅토르 안에게는 ‘쇼트트랙 황제’라고 불리며 국내에서 스포츠 영웅 대접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17세이던 지난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2006년 토리노 대회에서는 1000m·1500m·5000m계주 3개 종목에서 금메달, 500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면서 한국의 쇼트트랙 선전을 이끌었다.

2008년 부상으로 불참하기 전까지 세계선수권 5연패라는 금자탑도 쌓았다. 

당시 그에게는 ‘역대 가장 완벽한 쇼트트랙 선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상적인 스케이트 자세를 가지고 있고, 불필요한 움직임으로 발생하는 에너지를 낭비가 없다는 평가였다. 전성기 시절에는 순발력과 스퍼트·지구력 및 안정성·넓은 시야 등 쇼트트랙 선수에게 요구되는 거의 모든 요소에서 세계 최정상급의 역량을 과시했다.

아울러 어린 나이부터 세계 무대에 진출해 쌓은 경험을 기반으로 한 노련한 경기 운영 능력까지 갖췄다.

빅토르 안은 이 같은 평가를 입증하듯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쇼트트랙 선수가 됐다. 금메달 6개와 동메달 2개를 수확한 올림픽 외에도 세계선수권 등 세계 대회 메달을 휩쓸면서 총 55개의 메달을 받았다.

정점에 올라선 그에게 긴 암흑기가 찾아왔다. 지난 2008년 슬개골 골절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한 이후 기량이 확연하게 떨어졌다. 빅토르 안은 체계적인 재활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서 이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4년 연속 탈락했다.


또 빙상연맹 내 파벌싸움에 휘말려 여자팀에서 훈련을 받고, 대회에 같이 출전한 팀 동료들에게 견제당하는 등 경기장 밖 갈등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2010년에는 소속팀 성남시청까지 해체되면서 악재가 겹쳤다.

결국 그는 2011년 재기를 위해 러시아 귀화를 감행했다. 러시아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당시 크라프초프 러시아 빙상연맹 회장은 “한국은 최상급의 선수층을 보유하고 있지만 장난감이 많은 아이가 조금만 고장나도 (장난감을)쉽게 버리듯이 선수를 대한다”고 비판했다.

모국 밀어낸 억지 금메달에 환호 
실망한 국내 여론…비난 쏟아져

‘빅토르 안’으로 이름을 바꾼 그는 러시아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를 목에 걸었다. 기량이 전성기 시절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세간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유일한 약점으로 꼽히던 초반 속력을 보강해 단거리(500m) 종목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진정한 ‘올라운더’로 거듭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정상급 기량을 보였다. 그는 러시아에 올림픽 메달 4개, 세계선수권 메달 6개, 유럽선수권 메달 16개 등을 안겨주며 믿음에 보답했다.

하지만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러시아 대표팀의 조직적 도핑 스캔들에 연루돼 올림픽 출전 불허 처분이 내려졌다. 결백을 호소하며 재심을 청구했지만 끝내 출전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이후 그는 한 차례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한 뒤, 지난 2020년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은퇴 직후 러시아의 대표팀 코치 제의를 고사하고 딸 양육을 위해 국내로 복귀한다는 얘기가 무성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으로 향했다. 당시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총감독이었던 왕멍의 기술 코치 제의를 수락한 것이다. 

중국 현지 매체 <펑파이>는 “안셴주(안현수의 중국식 발음)는 은퇴를 선언하기 이전부터 중국 대표팀과 자주 교류했다”며 “지난 2019년에는 겨울 동안 중국에서 훈련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는 아쉽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특히 ‘왜 하필 중국, 왜 하필 왕멍 아래냐’는 한탄이 대부분이었다. 왕멍은 지난 2013년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에서 자신의 종합 우승을 지키기 위해 박승희를 상대로 고의적인 반칙을 저질러 국민적인 공분을 산 바 있다. 

일각에서는 2002년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처음 만나 지속적으로 교류를 쌓아왔다는 두 사람의 친분을 들며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국내 여론은 스포츠 영웅 빅토르 안에 대한 호감과 빙상연맹에 대한 반감, 파벌싸움의 피해자라는 이미지에서 나오는 동정론이 뒤섞여 대체로 빅토르 안에게 우호적이었다. 그가 러시아로 향할 당시에도 여론은 그의비판보다는 빙상연맹의 무능과 부패를 문제삼았다.

이후 그가 그동안 빙상연맹의 파벌싸움에 휘말려 갖은 불이익을 겪었다는 안기원(빅토르 안의 부친)씨 폭로가 이어지자, 국내 정치권과 언론들도 빙상연맹 맹폭에 가세했다.


심지어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안 선수의 문제가 파벌주의, 줄 세우기, 심판 부정 등 체육계 저변에 깔린 부조리와 구조적 난맥상에 의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직접 언급하면서 체육계에 대한 전방위적인 검찰 조사가 시작되기도 했다.

비운의 천재?
기회주의자?

그런데 정작 진원지인 빙상연맹이 조사 대상에서 제외된 사실이 드러났고, 빙상연맹에 대한 국민 정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빙상연맹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칠수록, 빅토르 안에 대한 동정론은 공고해졌다. 소치올림픽에서는 일부 국민이 오히려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의 승리를 기원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가 지난 2017년 <현장토크쇼 택시> <슈퍼맨이 돌아왔다> 2018년 <진짜사나이 300> 등 여러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도 반대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이렇듯 빅토르 안은 10여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철저히 ‘피해자’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국내 빙상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그는 파벌싸움의 희생자가 아니라 수혜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빅토르 안은 주류 파벌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특혜를 받으며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일명 전명규(한체대)파로 분류된다. 전명규 전 빙상연맹 부회장은 1990년대부터 15년간 국가대표팀 지도자를 역임하면서 한국 쇼트트랙을 정상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다. 그가 감독이 된 이후로 선수 구타, 차별 등의 구설이 끊이지 않았지만 늘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가 감독이던 때 획득한 메달이 780개에 이를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전 부회장은 결국 2002년 10월경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희생 전략’을 강요당한 선수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김기훈, 김동성, 빅토르 안 등 자신과 자신의 제자가 키워낸 선수를 ‘에이스’로 삼고 이들이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다른 선수들을 희생시키는 전략을 주로 활용했다.

이 작전을 위해 다른 선수들은 에이스가 치고 나갈 때 외국 선수들의 진로를 막아서야만 했다.

비록 전 전 부회장은 물러났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가 키웠던 김기훈이 남자팀을 총괄하게 됐기 때문이다. 김 코치는 빅토르 안을 발굴했다. 빙상계에서는 김 코치가 빅토르 안에게만 추월 요령 등을 전수하며 대놓고 편애한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심지어 빅토르 안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 당시 예비명단에도 포함돼있지 않았지만 김 코치의 특혜를 통해 김동성과 1000m 경기에 출전했다. 올림픽 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탈락했지만 결국 승선했다. 전 전 부회장이 뒤를 봐준 덕분이었다. ‘빅토르 안 키우기’ 사태로 전명규파와 비(非)전명규파 간 균열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김 코치는 2004년 말 터진 스케이트 날 비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하지만 2005년 1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벌어진 구타 논란을 틈타 곧바로 복귀한다. 당시 빅토르 안은 한쪽 눈가에 멍이 든 채로 시상대에 올랐고, 비전명규파였던 윤재명 감독은 사퇴했다.

파벌로 흥망
언론 플레이

이후 김 코치는 올림픽 남자 코치로 발탁된다. 하지만 남자 선수들이 “특정 선수(빅토르 안)만을 편애하고 다른 선수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코치와는 올림픽을 나갈 수 없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선수촌 입촌을 거부했다. 입촌 거부 사태는 김 코치가 물러나면서 일단락됐다.

이후에도 내홍은 이어졌다. 전명규파와 비전명규파의 자리싸움은 극으로 치달았다. 결국 남자팀은 비전명규파로 꼽히는 송재근 코치가, 여자팀은 전명규파로 분류되는 박세우 코치가 맡게 됐다. 그러자 선수들이 성별이 아닌 속한 파벌에 따라 훈련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 빅토르 안이 여자팀에서 훈련받은 것 역시 파벌을 따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06년까지 파벌의 수혜를 입으며 성장한 빅토르 안이었지만 이후에는 파벌로 인해 가시밭길을 걸었다. 양측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대회장에서 서로를 방해하기에 이르렀고, ‘집중견제’를 당한 데다가 부상까지 겹친 빅토르 안은 그대로 오랜 침체기에 빠진다.

빙상 스포츠 팬들은 이 같은 맥락을 들어 빅토르 안이 파벌의 수혜를 톡톡히 봤고, 나중에 피해를 받은 부분도 일부 본인이 자초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빅토르 안과 그의 가족들이 사건 일부만 집중 조명해 여론을 호도했다고 비판한다. 이에 빙상 스포츠 팬들이 주로 이용하는 커뮤니티인 ‘디씨인사이드 빙상갤러리’에서 그는 ‘빅똘안’이라는 일종의 멸칭으로 불리며 주된 비난의 대상이 됐다.

빅토르 안은 빙상연맹 사례 외에도 수차례에 걸쳐 여론을 기만했다. 그는 지난 2010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올림픽 선발전에 뽑히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나라 국기를 달고 출전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한다”며 “어떤 편견이나 태클에도 견뎌낸 후 ‘코리아 안현수’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1년 뒤, 빅토르 안은 돌연 러시아행을 결정했다.

또 그는 러시아 귀화 당시 “한국 국적이 상실되는 것을 사전에 몰랐다”고 해명한 바 있다. 해당 발언은 그 당시에도 진실성이 의심받았지만 이를 지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논란이 불거진 것은 그가 러시아 귀화 절차를 마치기 이전에 국가 연금을 일괄 수령한 것이 알려지면서다.

빙상연맹 파벌싸움 피해자?
가려진 일 뒤늦게 재평가

이를 기점으로 사실 빅토르 안의 한국 국적이 상실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 힘을 받게 됐다. 관련 규정에 따르면 연금은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을 때만 받을 수 있고, 국적 상실 예정자는 그 전에 일괄 수령을 요구할 수 있다.

러시아 도핑 스캔들 당시 내놓은 해명도 ‘본질 흐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당시 그는 “2018년 당시 다른 대회에서 실시한 2번의 검사는 모두 통과했다”며 본인의 무고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러시아 도핑 스캔들이 일어난 시점은 지난 2014년부터 2016년까지다. 2018년 당시 도핑 검사 결과와는 무관한 일이다. 당사자인 본인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2022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빅토르 안에 대한 국내 여론이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에서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러시아는 혼성계주 준결승전에서 중국과 같이 경기를 치른 후 실격당했다. 이후 러시아는 파이널B 참가를 거부하며 해당 판정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일부 러시아 국민은 SNS에 그의 소치올림픽 당시 인터뷰를 공유하면서 ‘왜 러시아의 경쟁상대인 중국으로 가서 앞길을 막느냐. 배신감을 느낀다’고 불쾌감을 표출했다. 빅토르 안은 해당 인터뷰에서 “러시아에 감사하다”며 “은퇴 후에도 러시아에 머무르면서 러시아 대표팀 선수들을 지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빅토르 안의 은퇴 당시 코치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빅토르 안은 SNS를 통해 관련 심경을 밝혔다. 그는 “지금 제가 처한 모든 상황이 과거의 저의 선택이나 잘못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 어떠한 비난이나 질책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도 “아무런 잘못도 없는 가족들이 상처받고 고통을 받는다는 게 지금 저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제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 밖의 일이나 사실이 아닌 기사들로 가족들을 향한 무분별한 욕설이나 악플은 삼가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한국살이
가시밭길?

빅토르 안은 게시글이 화제가 되자 부담감을 느낀 듯 삭제했다. 이후 한국 언론의 인터뷰 요청은 모두 거절하고 있다.

한편 그의 부인과 딸은 모두 한국 국적(딸은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다. 또 그를 제외한 가족들은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빅토르 안의 딸이 올해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국적은 사라졌지만, 한국과의 질긴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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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면 철퇴’ 대법정 417호의 저주

‘걸리면 철퇴’ 대법정 417호의 저주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법원은 내란 혐의로 기소된 전직 대통령에게 철퇴를 내렸다. 2024년 12월 비상계엄 사태 이후 400여일 만이다. 이날 선고로 서울중앙지법 대법정 417호는 ‘전직 대통령의 무덤’이라는 악명을 이어가게 됐다. 5명의 전직 대통령에게 가해진 ‘대법정의 저주’를 <일요시사>가 살펴봤다. 지난달 19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운명의 날’이었다. 각종 혐의로 받는 재판 중에 가장 핵심 사안에 대한 법원의 첫 번째 판결이 이날 나왔다. 1심 재판부는 윤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앞서 관련자들에 대한 판결이 나오는 족족 유죄였기에 반전이라고 할 만큼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다. 443일 걸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부 지귀연 부장판사는 지난달 19일 내란 우두머리 혐의 사건 선고 공판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내란 우두머리죄의 법정형은 사형, 무기징역, 무기금고로 윤 전 대통령은 최고형을 피해갔다. 재판부는 12·3 비상계엄이 형법상 내란죄가 맞다고 판시했다. 지 판사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자체는 헌법상 권한 행사로서 내란죄에 해당할 수 없고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면서도 그 목적에 따라 내란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했다. 비상계엄의 목적이 국회나 행정·사법의 본질적 기능을 침해했다면 내란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사실관계의 핵심으로 군을 국회로 보낸 점을 꼽았다. 지 판사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국회를 제압해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게 실체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결국 군을 국회로 보낸 행위 자체가 내란죄 성립 요건인 ‘국헌문란 목적’과 ‘폭동’에 부합한다는 취지다. 이어 “윤 전 대통령은 국회에 군을 보내 봉쇄하고 주요 정치인 등을 체포하는 방법으로 국회 활동을 저지·마비시켜 국회가 상당 기간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하려는 목적을 내심으로 갖고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며 “군대를 보내 폭동을 일으킨 사실도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야당의 연이은 탄핵, 예산 삭감 등에 따른 국가 위기를 타개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비상계엄이었다는 윤 전 대통령 측 주장에는 “명분과 목적을 혼동한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이 대목에서 지 판사는 “성경을 읽는다는 이유로 촛불을 훔칠 수는 없다”고도 언급했다. 전두환·노태우·박근혜·이명박 법정에 선 전직 대통령 5명 국가 위기 상황 타개는 명분에 불과할 뿐 본질은 헌법기관의 마비였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재판부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의 내란죄 수사에 대해서도 인정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공수처가 내란죄를 수사할 권한이 없다며 수사의 적법성을 문제 삼아 왔다. 재판부는 “공수처에 내란죄 수사권이 없다고 하더라도 검찰은 공수처 송부 기록 외 다른 증거들을 종합해 기소한 것으로 보이고 공수처가 수집한 증거를 다 빼더라도 피고인에 대해 유죄 판단을 할 증거가 충분하다”고 정리했다. 검찰과 조은석 내란특별검사팀(이하 내란 특검)의 주장 중 윤 전 대통령이 장기 독재를 하기 위해 2023년께부터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제압할 의도로 내외적 여건을 조성했다는 공소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준비가 허술했다는 것이다. 또 국회를 무력화할 계획 등에 관한 별다른 증거나 자료,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윤 전 대통령 무기징역 선고 외에도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내란 중요임무종사죄가 인정돼 징역 30년,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은 징역 18년, 조지호 전 경찰청장은 징역 12년, 김종식 전 서울경찰청장은 징역 10년, 목현태 전 서울경찰청 국회경비대장은 징역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최고형 피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선고 닷새 만인 지난달 24일 항소했다. 윤 전 대통령 측 변호인단은 “법정의 기록은 물론, 훗날 역사의 기록 앞에서도 이번 판단의 문제점을 분명히 남겨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특검의 무리한 기소, 그 전제 위에서 이뤄진 1심의 모순된 판단과 그 정치적 배경에 대해 저희는 결코 침묵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윤 전 대통령이 중형을 선고받으면서 서울중앙지법 대법정 417호의 ‘저주’가 이번에도 나타났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대법정 417호는 150석 규모의 형사 법정이다. 대법정 417호가 주목받는 이유는 이곳에서 윤 전 대통령을 포함한 전직 대통령 5명이 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의 ‘무덤’이라는 별칭이 생길만한 대목이다. 전두환씨, 노태우 전 대통령의 하늘색 반팔 수의 차림은 국민의 뇌리에 깊게 남아 있다. 최고 권력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이 법정에 서서 판결을 듣고 있는 모습 자체가 충격인 시대였다.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항쟁 관련 내란 우두머리(당시 내란 수괴) 등 혐의로 넘겨진 전직 대통령은 대법정 417호에서 중형을 선고받았다. 1996년 당시 검찰은 반란 및 내란 수괴 외에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 등 총 10개 죄목으로 전씨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 등 9개 죄목으로 기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전 씨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노 전 대통령은 1심에서 징역 22년6개월, 2심에서 징역 17년, 이후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았다. 국정 농단 다스 재판 그로부터 30여년 뒤 윤 전 대통령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검찰 측 구형도 사형으로 같았다. 내란 특검은 지난 1월13일 “법률가로서 검찰총장까지 지낸 피고인은 대통령으로서 누구보다 앞장서 헌법을 준수하고 헌법 질서를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헌법 질서 파괴로 나아간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며 “피고인은 반성하지 않는다. 양형에 참작할 사유가 없고 오히려 중한 형을 정해야 한다”고 구형 배경을 밝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농단 사건의 1심 선고도 대법정 417호에서 이뤄졌다. 박 전 대통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으로 지위를 잃고 구속 기소됐다.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등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사적으로 남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국민의 공분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 2018년 4월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는 대기업 등으로부터 231억9427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4년, 벌금 180억원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2016년 10월 이후 불거진 국정 혼란의 장본인으로 박 전 대통령을 지목했다. 박 전 대통령이 국정 농단 사태에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면서 “국정 혼란과 대통령 파면의 주된 책임은 피고인과 최순실에게 있다”며 “그럼에도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책임을 주변에 전가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받던 18개 혐의 중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등 16개를 유죄로 봤다. 150명 규모 방청석 역사적 재판의 현장 이명박 전 대통령도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자동차 부품업체 ‘다스’ 자금을 횡령하고 삼성 등에서 거액의 뇌물을 챙긴 혐의로 기소된 이 전 대통령은 2018년 10월5일 1심 재판에서 징역 15년, 벌금 130억원을 선고받았다. 법원이 다스의 실소유주를 이 전 대통령으로 결론 내리면서 ‘다스는 누구 겁니까’라는 논란에 종지부가 찍힌 순간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2007년 대통령선거 기간 내내 피고인에 대한 각종 의혹이 제기됐지만 피고인의 결백을 믿는 다수의 국민 덕분에 피고인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며 “피고인은 대통령으로서의 막강한 권한을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 전체를 위해 행사해야 할 책무를 부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재판 결과 피고인이 친인척 명의를 빌려 다스를 설립해 실소유하면서 246억원가량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며 “범행 기간이 길고 이득액이 상당하며 범행 당시 이미 국회의원, 서울시장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나쁘다”고 비판했다. 또 “의혹만 가득했던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대통령 재임 시절 저질렀던 다른 범행이 함께 드러남으로써 당시 피고인을 믿고 지지했던 국민은 물론 사회 전반에 큰 실망과 불신을 안겼다”며 “그런데도 친인척이나 측근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는 등 책임을 전가해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되풀이된 30년 역사 전직 대통령 관련 재판 등 사회적 관심이 높은 사건이 대법정 417호에서 열리는 건 규모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이 방청을 원하기에 대형 법정에서 재판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5명의 전직 대통령은 방청석의 150여명과 실시간으로 중계된 재판을 본 국민 앞에서 단죄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