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욕먹는 빅토르 안

어제의 영웅, 오늘은 역적으로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쇼트트랙 황제’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이 국내 여론의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석연치 않은 판정 논란 속에 실격당한 한국 대표팀 앞에서, 그 덕을 톡톡히 본 중국 선수들과 기뻐하는 장면이 중계화면에 포착된 탓이다. 여론이 들끓으면서 과거 빅토르 안의 행적과 발언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가려졌던 사실들의 파급력은 그동안 대중들에게 빙상연맹 파벌싸움의 철저한 피해자로 각인돼있던 그의 이미지를 뒤바꾸고도 남을만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국위선양에 앞장서던 ‘국민 영웅’이 10여년 뒤 ‘배신자’라고 비난받는 모습은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다. 한국 국가대표에서 러시아 귀화를 거쳐, 중국 대표팀 코치가 된 빅토르 안의 이야기다.

쇼트트랙 황제
파란만장 이력

빅토르 안을 보는 국내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다. 단순히 한국에게서 금메달을 뺏어갔다는 게 이유는 아니다. 많은 국민이 그가 소치에서 러시아에 금메달 3개를 안겼을 때 축하와 응원을 보냈다. 오랜 부침을 이겨내고 정정당당히 재기한 선수에게 서운함보다는 존중과 경의를 표했다.

이번에 빅토르 안이 지도했던 중국 선수들은 정정당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금메달 획득에만 혈안이 돼 온갖 부정과 반칙으로 올림픽 정신을 훼손했다. 유독 자주 포착되는 거친 신체접촉과 편파판정 논란 등으로 중국 대표팀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결국 중국은 쇼트트랙 혼성계주와 남자 1000m 종목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얻은 금메달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빅토르 안의 모습에 국내 여론은 싸늘하게 식었다. 갈수록 깊어지는 반중 정서도 기름을 부었다. 환호하는 중국 대표팀과 고개 숙인 한국 대표팀의 모습이 교차되자, 비난의 화살은 고스란히 빅토르 안과 부인 우나리에게로 향했다.


한때 빅토르 안에게는 ‘쇼트트랙 황제’라고 불리며 국내에서 스포츠 영웅 대접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17세이던 지난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2006년 토리노 대회에서는 1000m·1500m·5000m계주 3개 종목에서 금메달, 500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면서 한국의 쇼트트랙 선전을 이끌었다.

2008년 부상으로 불참하기 전까지 세계선수권 5연패라는 금자탑도 쌓았다. 

당시 그에게는 ‘역대 가장 완벽한 쇼트트랙 선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상적인 스케이트 자세를 가지고 있고, 불필요한 움직임으로 발생하는 에너지를 낭비가 없다는 평가였다. 전성기 시절에는 순발력과 스퍼트·지구력 및 안정성·넓은 시야 등 쇼트트랙 선수에게 요구되는 거의 모든 요소에서 세계 최정상급의 역량을 과시했다.

아울러 어린 나이부터 세계 무대에 진출해 쌓은 경험을 기반으로 한 노련한 경기 운영 능력까지 갖췄다.

빅토르 안은 이 같은 평가를 입증하듯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쇼트트랙 선수가 됐다. 금메달 6개와 동메달 2개를 수확한 올림픽 외에도 세계선수권 등 세계 대회 메달을 휩쓸면서 총 55개의 메달을 받았다.

정점에 올라선 그에게 긴 암흑기가 찾아왔다. 지난 2008년 슬개골 골절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한 이후 기량이 확연하게 떨어졌다. 빅토르 안은 체계적인 재활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서 이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4년 연속 탈락했다.


또 빙상연맹 내 파벌싸움에 휘말려 여자팀에서 훈련을 받고, 대회에 같이 출전한 팀 동료들에게 견제당하는 등 경기장 밖 갈등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2010년에는 소속팀 성남시청까지 해체되면서 악재가 겹쳤다.

결국 그는 2011년 재기를 위해 러시아 귀화를 감행했다. 러시아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당시 크라프초프 러시아 빙상연맹 회장은 “한국은 최상급의 선수층을 보유하고 있지만 장난감이 많은 아이가 조금만 고장나도 (장난감을)쉽게 버리듯이 선수를 대한다”고 비판했다.

모국 밀어낸 억지 금메달에 환호 
실망한 국내 여론…비난 쏟아져

‘빅토르 안’으로 이름을 바꾼 그는 러시아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를 목에 걸었다. 기량이 전성기 시절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세간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유일한 약점으로 꼽히던 초반 속력을 보강해 단거리(500m) 종목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진정한 ‘올라운더’로 거듭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정상급 기량을 보였다. 그는 러시아에 올림픽 메달 4개, 세계선수권 메달 6개, 유럽선수권 메달 16개 등을 안겨주며 믿음에 보답했다.

하지만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러시아 대표팀의 조직적 도핑 스캔들에 연루돼 올림픽 출전 불허 처분이 내려졌다. 결백을 호소하며 재심을 청구했지만 끝내 출전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이후 그는 한 차례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한 뒤, 지난 2020년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은퇴 직후 러시아의 대표팀 코치 제의를 고사하고 딸 양육을 위해 국내로 복귀한다는 얘기가 무성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으로 향했다. 당시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총감독이었던 왕멍의 기술 코치 제의를 수락한 것이다. 

중국 현지 매체 <펑파이>는 “안셴주(안현수의 중국식 발음)는 은퇴를 선언하기 이전부터 중국 대표팀과 자주 교류했다”며 “지난 2019년에는 겨울 동안 중국에서 훈련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는 아쉽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특히 ‘왜 하필 중국, 왜 하필 왕멍 아래냐’는 한탄이 대부분이었다. 왕멍은 지난 2013년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에서 자신의 종합 우승을 지키기 위해 박승희를 상대로 고의적인 반칙을 저질러 국민적인 공분을 산 바 있다. 

일각에서는 2002년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처음 만나 지속적으로 교류를 쌓아왔다는 두 사람의 친분을 들며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국내 여론은 스포츠 영웅 빅토르 안에 대한 호감과 빙상연맹에 대한 반감, 파벌싸움의 피해자라는 이미지에서 나오는 동정론이 뒤섞여 대체로 빅토르 안에게 우호적이었다. 그가 러시아로 향할 당시에도 여론은 그의비판보다는 빙상연맹의 무능과 부패를 문제삼았다.

이후 그가 그동안 빙상연맹의 파벌싸움에 휘말려 갖은 불이익을 겪었다는 안기원(빅토르 안의 부친)씨 폭로가 이어지자, 국내 정치권과 언론들도 빙상연맹 맹폭에 가세했다.


심지어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안 선수의 문제가 파벌주의, 줄 세우기, 심판 부정 등 체육계 저변에 깔린 부조리와 구조적 난맥상에 의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직접 언급하면서 체육계에 대한 전방위적인 검찰 조사가 시작되기도 했다.

비운의 천재?
기회주의자?

그런데 정작 진원지인 빙상연맹이 조사 대상에서 제외된 사실이 드러났고, 빙상연맹에 대한 국민 정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빙상연맹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칠수록, 빅토르 안에 대한 동정론은 공고해졌다. 소치올림픽에서는 일부 국민이 오히려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의 승리를 기원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가 지난 2017년 <현장토크쇼 택시> <슈퍼맨이 돌아왔다> 2018년 <진짜사나이 300> 등 여러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도 반대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이렇듯 빅토르 안은 10여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철저히 ‘피해자’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국내 빙상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그는 파벌싸움의 희생자가 아니라 수혜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빅토르 안은 주류 파벌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특혜를 받으며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일명 전명규(한체대)파로 분류된다. 전명규 전 빙상연맹 부회장은 1990년대부터 15년간 국가대표팀 지도자를 역임하면서 한국 쇼트트랙을 정상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다. 그가 감독이 된 이후로 선수 구타, 차별 등의 구설이 끊이지 않았지만 늘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가 감독이던 때 획득한 메달이 780개에 이를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전 부회장은 결국 2002년 10월경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희생 전략’을 강요당한 선수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김기훈, 김동성, 빅토르 안 등 자신과 자신의 제자가 키워낸 선수를 ‘에이스’로 삼고 이들이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다른 선수들을 희생시키는 전략을 주로 활용했다.

이 작전을 위해 다른 선수들은 에이스가 치고 나갈 때 외국 선수들의 진로를 막아서야만 했다.

비록 전 전 부회장은 물러났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가 키웠던 김기훈이 남자팀을 총괄하게 됐기 때문이다. 김 코치는 빅토르 안을 발굴했다. 빙상계에서는 김 코치가 빅토르 안에게만 추월 요령 등을 전수하며 대놓고 편애한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심지어 빅토르 안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 당시 예비명단에도 포함돼있지 않았지만 김 코치의 특혜를 통해 김동성과 1000m 경기에 출전했다. 올림픽 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탈락했지만 결국 승선했다. 전 전 부회장이 뒤를 봐준 덕분이었다. ‘빅토르 안 키우기’ 사태로 전명규파와 비(非)전명규파 간 균열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김 코치는 2004년 말 터진 스케이트 날 비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하지만 2005년 1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벌어진 구타 논란을 틈타 곧바로 복귀한다. 당시 빅토르 안은 한쪽 눈가에 멍이 든 채로 시상대에 올랐고, 비전명규파였던 윤재명 감독은 사퇴했다.

파벌로 흥망
언론 플레이

이후 김 코치는 올림픽 남자 코치로 발탁된다. 하지만 남자 선수들이 “특정 선수(빅토르 안)만을 편애하고 다른 선수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코치와는 올림픽을 나갈 수 없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선수촌 입촌을 거부했다. 입촌 거부 사태는 김 코치가 물러나면서 일단락됐다.

이후에도 내홍은 이어졌다. 전명규파와 비전명규파의 자리싸움은 극으로 치달았다. 결국 남자팀은 비전명규파로 꼽히는 송재근 코치가, 여자팀은 전명규파로 분류되는 박세우 코치가 맡게 됐다. 그러자 선수들이 성별이 아닌 속한 파벌에 따라 훈련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 빅토르 안이 여자팀에서 훈련받은 것 역시 파벌을 따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06년까지 파벌의 수혜를 입으며 성장한 빅토르 안이었지만 이후에는 파벌로 인해 가시밭길을 걸었다. 양측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대회장에서 서로를 방해하기에 이르렀고, ‘집중견제’를 당한 데다가 부상까지 겹친 빅토르 안은 그대로 오랜 침체기에 빠진다.

빙상 스포츠 팬들은 이 같은 맥락을 들어 빅토르 안이 파벌의 수혜를 톡톡히 봤고, 나중에 피해를 받은 부분도 일부 본인이 자초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빅토르 안과 그의 가족들이 사건 일부만 집중 조명해 여론을 호도했다고 비판한다. 이에 빙상 스포츠 팬들이 주로 이용하는 커뮤니티인 ‘디씨인사이드 빙상갤러리’에서 그는 ‘빅똘안’이라는 일종의 멸칭으로 불리며 주된 비난의 대상이 됐다.

빅토르 안은 빙상연맹 사례 외에도 수차례에 걸쳐 여론을 기만했다. 그는 지난 2010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올림픽 선발전에 뽑히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나라 국기를 달고 출전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한다”며 “어떤 편견이나 태클에도 견뎌낸 후 ‘코리아 안현수’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1년 뒤, 빅토르 안은 돌연 러시아행을 결정했다.

또 그는 러시아 귀화 당시 “한국 국적이 상실되는 것을 사전에 몰랐다”고 해명한 바 있다. 해당 발언은 그 당시에도 진실성이 의심받았지만 이를 지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논란이 불거진 것은 그가 러시아 귀화 절차를 마치기 이전에 국가 연금을 일괄 수령한 것이 알려지면서다.

빙상연맹 파벌싸움 피해자?
가려진 일 뒤늦게 재평가

이를 기점으로 사실 빅토르 안의 한국 국적이 상실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 힘을 받게 됐다. 관련 규정에 따르면 연금은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을 때만 받을 수 있고, 국적 상실 예정자는 그 전에 일괄 수령을 요구할 수 있다.

러시아 도핑 스캔들 당시 내놓은 해명도 ‘본질 흐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당시 그는 “2018년 당시 다른 대회에서 실시한 2번의 검사는 모두 통과했다”며 본인의 무고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러시아 도핑 스캔들이 일어난 시점은 지난 2014년부터 2016년까지다. 2018년 당시 도핑 검사 결과와는 무관한 일이다. 당사자인 본인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2022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빅토르 안에 대한 국내 여론이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에서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러시아는 혼성계주 준결승전에서 중국과 같이 경기를 치른 후 실격당했다. 이후 러시아는 파이널B 참가를 거부하며 해당 판정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일부 러시아 국민은 SNS에 그의 소치올림픽 당시 인터뷰를 공유하면서 ‘왜 러시아의 경쟁상대인 중국으로 가서 앞길을 막느냐. 배신감을 느낀다’고 불쾌감을 표출했다. 빅토르 안은 해당 인터뷰에서 “러시아에 감사하다”며 “은퇴 후에도 러시아에 머무르면서 러시아 대표팀 선수들을 지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빅토르 안의 은퇴 당시 코치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빅토르 안은 SNS를 통해 관련 심경을 밝혔다. 그는 “지금 제가 처한 모든 상황이 과거의 저의 선택이나 잘못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 어떠한 비난이나 질책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도 “아무런 잘못도 없는 가족들이 상처받고 고통을 받는다는 게 지금 저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제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 밖의 일이나 사실이 아닌 기사들로 가족들을 향한 무분별한 욕설이나 악플은 삼가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한국살이
가시밭길?

빅토르 안은 게시글이 화제가 되자 부담감을 느낀 듯 삭제했다. 이후 한국 언론의 인터뷰 요청은 모두 거절하고 있다.

한편 그의 부인과 딸은 모두 한국 국적(딸은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다. 또 그를 제외한 가족들은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빅토르 안의 딸이 올해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국적은 사라졌지만, 한국과의 질긴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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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비선’ 노상원·명태균 오버랩

‘계엄 비선’ 노상원·명태균 오버랩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의 안보 공약과 정치적 스탠스 등에 조언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와 직접적으로 연락하면서 국정 전반에 개입한 의혹을 받는 명태균씨의 모습과 맞닿아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군 인사뿐만 아니라 국방정책과 사업에까지 손을 댔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통상 비선 실세는 외부서 활동한다. 대통령으로부터 보직을 받지 않았음에도 최측근으로 꼽히는 인사들과 정부의 정책과 정치적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윤석열정부서 이 같은 행위를 한 이들은 주로 ‘무속 관련자’들이었다.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등도 정부 정책 및 인사에 개입한 의혹의 당사자들이다. 안보 분야 대책 조언 노 전 사령관은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을 통해 안보 공약이나 지지율 상승 방안 등을 조언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5일 <한겨레> 단독 보도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11일 경찰 조사에서 “(2022년)윤 대통령이 대선 캠프를 구성했을 때, 김 전 장관이 제게 일을 도와달라 부탁했는데 성 관련 범죄 경력 때문에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며 “(그 대신에)대선 토론 때 안보 관련 분야 질문 및 답변 내용에 대해 초안을 잡아주면, (상대 후보의)역공 대비 등 세밀히 검토해서 수정하는 작업을 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윤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김 전 장관이)‘대통령 지지도를 어떻게 하면 올릴 수 있냐’고 묻길래 ‘검사 출신이라 말이 친화적이지 않다. 국민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줘라’고 했다”며 “(시장에 가서)생선 같은 것도 만지면서 친근하게 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광주 5·18(행사)에 참석해라. 그들도 같은 국민”이라며 “일단 내려가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라 건의해라. 이왕 대통령이 됐으면 전라도도 품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실제 윤 대통령은 지난 2023년 7월엔 부산엑스포 유치 홍보를 위해 부산을 찾은 뒤 자갈치시장서 붕장어를 맨손으로 만졌다. 또 2022년 5월 취임 이후 지난해까지 3년 연속 광주를 찾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노 전 사령관은 “나중에 티브이(TV)를 보니까 제 말대로 다 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 같은 상황을 볼 때 윤 대통령은 노 전 사령관의 존재를 수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김 전 장관은 노 전 사령관을 윤 대통령에게 인사시키려 했으나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이 몇 번 (윤 대통령에게 자신을) 인사시키려 했는데, 저 스스로 성 관련 범행에 대한 멍에가 있어서 안 본다고 했다”며 “(김 전 장관이)군인공제회 산하단체 비상근 사외이사 자리를 주겠다고 했는데 (국회)국방위원회서 다 밝혀질 거라 사양했다. 공기업 임원 얘기도 했지만 같은 이유로 사양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의 의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노 전 사령관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국방사업에도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지난 1월16일 “12·3 내란 핵심 주동자인 김용현(전 국방부 장관), 노상원(전 정보사령관), 여인형(방첩사령관), 김용군(예비역 대령)은 방위산업을 고리로 한 경제공동체”라고 주장했다. 추 의원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 2022년 김 전 장관이 경호처장 시절 그의 영향력으로 국가정보원 예산 500억원이 육군 전자전 무인 정찰기(UAV) 사업 예산으로 편성 추진했다. 당시 이 예산은 ‘김용현 처장 꼬리표 예산’으로 불렸다는 게 추 의원의 주장이다. 노, 윤 대선후보 시절부터 감 놔라 배 놔라 실제 김 통해 일부 이행…윤 직접 접촉 시도 추 의원은 “2023년 이 사업에 도입될 기종은 노상원이 (당시)재직 중이던 일광공영이 국내 총판인 이스라엘 항공우주산업(IAI)의 헤론으로 결정됐다. 일광공영은 무기 중개상 1세대로 불리며, 2000년 러시아 무기 도입 사업인 불곰사업으로 유명한 이규태가 운영하는 방산업체다. 노 전 사령관은 최근 3년간 일광공영에 근무했다”고 말했다. 통상 무기체계 등 전력사업은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가 관리한다. 그러나 해당 사업은 당시 육군 정보작전참모부장이던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 사업은 예산이 편성되지 않아 중단됐다. 추 의원은 노 전 사령관과 윤 대통령 일가와의 연결고리 의혹도 제기했다. 그는 “노상원은 이미 2015∼2016년 박근혜정부 때부터 김충식과 후원을 주고받는 관계였다”며 “김충식은 윤석열의 장인 행세를 하는 분이고, 장모 최은순 여사와 사적인 관계 또는 경제공동체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노 전 사령관은 국방·안보 분야 조언에 그쳤다. 명씨는 정부 사업과 정치 권력 전반에 영향을 끼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굳이 둘을 놓고 비교하자면 노 전 사령관보다 명씨의 비선 실세 서열이 한 수 위인 셈이다. <시사IN>이 공개한 윤 대통령 일가와 명씨의 카카오톡·텔레그램 대화 원본을 보면 명씨는 사실상 국회의원 후보 선정과 경제 사업 추진에 판을 짜는 플래너였다. 실제 명씨는 지난 2021년 7월 윤 대통령이 국민의힘에 입당하기 전 이뤄진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 당시 국민의힘 대표였던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과 가진 비공개 회동부터, 그 이후 진행된 윤 대통령의 정치인 접촉을 주도했다. 이 의원과 윤 대통령의 회동 당시 김 여사는 JTBC가 보도한 ‘윤석열·이준석 비공개 회동’ 기사 링크를 보냈다. 김 여사는 명씨에게 “큰일이네요. 왜 준석씨가 이렇게까지 발설했을까요. 남편에게는 완전 악재인데요ㅠ”라며 “선생님(명태균씨)께서 단단히 말씀하셨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닮은 듯 다른 듯 이들은 대선후보 여론조사 결과 보고서를 각각 여러 차례 주고받았다. 명씨가 윤 대통령 부부에게 여론조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그 대가로 2022년 6월 보궐선거서 국민의힘 김영선 전 의원 공천을 받았다는 의혹이 ‘명태균 게이트’의 핵심이다. 명씨는 윤 대통령의 일정과 행보에 대한 사후 보고, 평가, 조언도 김 여사에게 더 자주 했다. 예시로 2021년 7월29일, 명씨가 김 여사에게 윤 대통령의 부산 방문 당시 실언한 점을 포착한 영상 보도 링크를 보냈다. 당시 윤 대통령은 이한열 열사가 새겨진 1987년 6월 항쟁 기념 조형물을 보고 ‘1979년 부마항쟁이냐’라고 물어 논란이 된 상황이었다. 명씨는 말실수를 한 윤 대통령이 아닌 김 여사에게 메시지를 보내 “미리 방문하는 곳 학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021년 9월17일과 18일, 20일에는 명씨가 김 여사에게 윤 대통령의 경북·경남지역 방문 관련 반응이 담긴 언론 기사와 여론조사 결과를 보냈다. 명씨는 이와 관련해 윤 대통령의 일정을 자신이 기획했다고 검찰에 진술하기도 했다. 명씨는 자신의 ‘기획물(지역 방문 일정)’ 결과를 김 여사에게 보고했다. 특히 윤 대통령의 경남 일정 이후 ‘창원 전·현직 도·시의원 33명이 윤석열 지지를 선언했다’는 내용의 기사 링크도 김 여사에게 먼저 보냈다. 대선 캠프에 소속되지 않은 명씨가 후보 일정에 개입한 것이다. 특히 명씨는 검찰서 자신이 기획한 경남 일정 가운데 창녕 방문을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당시 창녕 방문이 윤석열 후보자에게 가장 중요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창녕은 국민의힘 대선 경선 경쟁자인 홍준표 당시 예비후보의 고향이다. 홍 후보를 견제하기 위해 창녕 방문 일정을 넣었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입 열면 쑥대밭 명씨는 윤석열 캠프 인사 개입 의혹도 받는다. 명씨와 김 여사의 대화를 보면, 이 의혹 역시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됐다. 명씨가 김 여사와 캠프 인사 문제를 상의했고, 그 결과가 일부 실현된 사실이 확인된다. 2021년 7월16일 김 여사는 명씨에게 황준국 전 주영국 대사 프로필을 공유했다. 그러면서 “후원회장으로 어떤가요? 이권과 연결도 안 돼있다”고 했다. 김 여사가 명씨에게 이 메시지를 받은 다음날인 7월17일, 황 전 대사는 윤석열의 후원회장으로 위촉됐다. 정통 외교관 출신 인사가 대선후보 후원회장을 맡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2021년 7월19일에는 명씨가 김 여사에게 임태희 경기도교육감 프로필을 보냈다. 그러면서 ‘총장님께서 물어보신 임태희 실장’이라며 장문의 설명을 덧붙였다. 윤 대통령이 먼저 명씨에게 임 교육감 세평을 물었는데, 명씨는 그 답을 윤 대통령이 아닌 김 여사에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 교육감은 2021년 12월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총괄상황본부장을 맡았다. 한 달여 뒤에는 명씨가 김 여사에게 자신이 국민의힘 의원이었던 박완수 경남도지사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캡처해 보냈다. 박 지사는 “명 대표 나도 많이 도와주세요”라고 말했고, 8월1일 “윤 총장 전화 왔습니다. 열심히 할게요”라고 말했다. 7월31일, 명씨는 윤 대통령에게 박 지사 연락처를 전달하면서 “전화하면 총장님을 돕겠다고 할 것”이라고 했다. 이후 8월6일 박완수 당시 의원은 명씨와 윤 대통령 자택인 서울 아크로비스타에 방문했고 윤 대통령과 사진도 찍었다. 이 같은 명씨의 영향력이 정치권서 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한 이후에도 두 사람은 연락을 주고받았다. 2023년(연도 추정) 4월6일 김 여사가 명씨에게 ‘김건희 여사, 명태균과 국사를 논의한다는 소문’이라는 제목의 정보지 글을 공유했다. 김 여사가 천공 스승과 거리를 두고 명씨와 국사를 논의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노·명 전부 무속 의혹 제기 “여사 연결고리?” 명, 침묵하는 노와 대조적 “30명 죽일 수 있다” 윤 대통령이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명씨의 조언 때문이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명씨는 웃으며 “세상에 천벌 받을 사람들이 많네요”라고 했다. 4월15일에는 명씨가 김 여사에게 네잎클로버 사진을 보냈다. 명씨는 “여사님 행운의 징표인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고 여사님께 보내드린다”며 “윤석열정부 꼭 성공한 정부가 될 겁니다”고 했다. 김 여사는 V자 손가락 이모티콘으로 화답했다. 노 전 사령관은 가장 논란이 된 이른바 ‘노상원 수첩’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검찰 조사에서까지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국지전 유도와 북풍 공작 등의 음모론 같은 의혹은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명씨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검찰 조사에 임하면서 국민의힘과 윤 대통령 일가의 ‘뇌관’을 자처하고 있다. 창원구치소에 수감 중인 명씨는 최근 노영희 변호사와의 접견서 “국민의힘 주요 정치인 30명을 죽일 수 있는 카드가 있다”며 “내가 한 말은 전부 증거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명씨와 연루 의혹이 있는 인사들이 정치권 내에서 이른바 ‘명태균 리스트’로 분류되긴 했지만, 명씨가 직접 숫자를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명씨 관련 의혹을 폭로한 강혜경씨는 지난해 10월 명씨와 연관됐다고 주장하며 여야 정치인 27명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명씨의 정치권 인맥은 ‘황금폰’이라고 불리는 명씨 휴대전화서 일부 포착된 적이 있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명씨의 휴대전화를 넘겨받아 포렌식을 진행했다. 당시 검찰은 명씨의 휴대전화에 연락처가 저장된 전·현직 정치인 140명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명씨 측 남상권 변호사는 지난달 13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서 “명씨 황금폰 포렌식 과정서 너무 많은 정치인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며 “명씨 휴대전화에 저장된 전·현직 국회의원이 140명이 넘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황금폰 포렌식 명씨는 “내가 최재형 전 감사원장을 국무총리로, 이준석 의원을 미국 대북특사로 추천을 했었다”면서 “당시 국민의힘 관련 윤한홍, 박완수, 김영선, 김종인 등에 대한 자료가 많다”고 유력 정치인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특히 명씨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홍준표 대구시장에 대해 “(이들에 대해)얘기할 것이 아주 많다”며 “민낯을, 껍질을 벗겨 놓겠다”고 거친 언사를 쓴 것으로도 파악됐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