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욕먹는 빅토르 안

어제의 영웅, 오늘은 역적으로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쇼트트랙 황제’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이 국내 여론의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석연치 않은 판정 논란 속에 실격당한 한국 대표팀 앞에서, 그 덕을 톡톡히 본 중국 선수들과 기뻐하는 장면이 중계화면에 포착된 탓이다. 여론이 들끓으면서 과거 빅토르 안의 행적과 발언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가려졌던 사실들의 파급력은 그동안 대중들에게 빙상연맹 파벌싸움의 철저한 피해자로 각인돼있던 그의 이미지를 뒤바꾸고도 남을만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국위선양에 앞장서던 ‘국민 영웅’이 10여년 뒤 ‘배신자’라고 비난받는 모습은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다. 한국 국가대표에서 러시아 귀화를 거쳐, 중국 대표팀 코치가 된 빅토르 안의 이야기다.

쇼트트랙 황제
파란만장 이력

빅토르 안을 보는 국내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다. 단순히 한국에게서 금메달을 뺏어갔다는 게 이유는 아니다. 많은 국민이 그가 소치에서 러시아에 금메달 3개를 안겼을 때 축하와 응원을 보냈다. 오랜 부침을 이겨내고 정정당당히 재기한 선수에게 서운함보다는 존중과 경의를 표했다.

이번에 빅토르 안이 지도했던 중국 선수들은 정정당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금메달 획득에만 혈안이 돼 온갖 부정과 반칙으로 올림픽 정신을 훼손했다. 유독 자주 포착되는 거친 신체접촉과 편파판정 논란 등으로 중국 대표팀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결국 중국은 쇼트트랙 혼성계주와 남자 1000m 종목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얻은 금메달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빅토르 안의 모습에 국내 여론은 싸늘하게 식었다. 갈수록 깊어지는 반중 정서도 기름을 부었다. 환호하는 중국 대표팀과 고개 숙인 한국 대표팀의 모습이 교차되자, 비난의 화살은 고스란히 빅토르 안과 부인 우나리에게로 향했다.


한때 빅토르 안에게는 ‘쇼트트랙 황제’라고 불리며 국내에서 스포츠 영웅 대접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17세이던 지난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2006년 토리노 대회에서는 1000m·1500m·5000m계주 3개 종목에서 금메달, 500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면서 한국의 쇼트트랙 선전을 이끌었다.

2008년 부상으로 불참하기 전까지 세계선수권 5연패라는 금자탑도 쌓았다. 

당시 그에게는 ‘역대 가장 완벽한 쇼트트랙 선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상적인 스케이트 자세를 가지고 있고, 불필요한 움직임으로 발생하는 에너지를 낭비가 없다는 평가였다. 전성기 시절에는 순발력과 스퍼트·지구력 및 안정성·넓은 시야 등 쇼트트랙 선수에게 요구되는 거의 모든 요소에서 세계 최정상급의 역량을 과시했다.

아울러 어린 나이부터 세계 무대에 진출해 쌓은 경험을 기반으로 한 노련한 경기 운영 능력까지 갖췄다.

빅토르 안은 이 같은 평가를 입증하듯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쇼트트랙 선수가 됐다. 금메달 6개와 동메달 2개를 수확한 올림픽 외에도 세계선수권 등 세계 대회 메달을 휩쓸면서 총 55개의 메달을 받았다.

정점에 올라선 그에게 긴 암흑기가 찾아왔다. 지난 2008년 슬개골 골절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한 이후 기량이 확연하게 떨어졌다. 빅토르 안은 체계적인 재활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서 이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4년 연속 탈락했다.


또 빙상연맹 내 파벌싸움에 휘말려 여자팀에서 훈련을 받고, 대회에 같이 출전한 팀 동료들에게 견제당하는 등 경기장 밖 갈등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2010년에는 소속팀 성남시청까지 해체되면서 악재가 겹쳤다.

결국 그는 2011년 재기를 위해 러시아 귀화를 감행했다. 러시아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당시 크라프초프 러시아 빙상연맹 회장은 “한국은 최상급의 선수층을 보유하고 있지만 장난감이 많은 아이가 조금만 고장나도 (장난감을)쉽게 버리듯이 선수를 대한다”고 비판했다.

모국 밀어낸 억지 금메달에 환호 
실망한 국내 여론…비난 쏟아져

‘빅토르 안’으로 이름을 바꾼 그는 러시아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를 목에 걸었다. 기량이 전성기 시절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세간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유일한 약점으로 꼽히던 초반 속력을 보강해 단거리(500m) 종목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진정한 ‘올라운더’로 거듭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정상급 기량을 보였다. 그는 러시아에 올림픽 메달 4개, 세계선수권 메달 6개, 유럽선수권 메달 16개 등을 안겨주며 믿음에 보답했다.

하지만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러시아 대표팀의 조직적 도핑 스캔들에 연루돼 올림픽 출전 불허 처분이 내려졌다. 결백을 호소하며 재심을 청구했지만 끝내 출전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이후 그는 한 차례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한 뒤, 지난 2020년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은퇴 직후 러시아의 대표팀 코치 제의를 고사하고 딸 양육을 위해 국내로 복귀한다는 얘기가 무성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으로 향했다. 당시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총감독이었던 왕멍의 기술 코치 제의를 수락한 것이다. 

중국 현지 매체 <펑파이>는 “안셴주(안현수의 중국식 발음)는 은퇴를 선언하기 이전부터 중국 대표팀과 자주 교류했다”며 “지난 2019년에는 겨울 동안 중국에서 훈련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는 아쉽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특히 ‘왜 하필 중국, 왜 하필 왕멍 아래냐’는 한탄이 대부분이었다. 왕멍은 지난 2013년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에서 자신의 종합 우승을 지키기 위해 박승희를 상대로 고의적인 반칙을 저질러 국민적인 공분을 산 바 있다. 

일각에서는 2002년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처음 만나 지속적으로 교류를 쌓아왔다는 두 사람의 친분을 들며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국내 여론은 스포츠 영웅 빅토르 안에 대한 호감과 빙상연맹에 대한 반감, 파벌싸움의 피해자라는 이미지에서 나오는 동정론이 뒤섞여 대체로 빅토르 안에게 우호적이었다. 그가 러시아로 향할 당시에도 여론은 그의비판보다는 빙상연맹의 무능과 부패를 문제삼았다.

이후 그가 그동안 빙상연맹의 파벌싸움에 휘말려 갖은 불이익을 겪었다는 안기원(빅토르 안의 부친)씨 폭로가 이어지자, 국내 정치권과 언론들도 빙상연맹 맹폭에 가세했다.


심지어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안 선수의 문제가 파벌주의, 줄 세우기, 심판 부정 등 체육계 저변에 깔린 부조리와 구조적 난맥상에 의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직접 언급하면서 체육계에 대한 전방위적인 검찰 조사가 시작되기도 했다.

비운의 천재?
기회주의자?

그런데 정작 진원지인 빙상연맹이 조사 대상에서 제외된 사실이 드러났고, 빙상연맹에 대한 국민 정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빙상연맹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칠수록, 빅토르 안에 대한 동정론은 공고해졌다. 소치올림픽에서는 일부 국민이 오히려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의 승리를 기원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가 지난 2017년 <현장토크쇼 택시> <슈퍼맨이 돌아왔다> 2018년 <진짜사나이 300> 등 여러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도 반대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이렇듯 빅토르 안은 10여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철저히 ‘피해자’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국내 빙상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그는 파벌싸움의 희생자가 아니라 수혜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빅토르 안은 주류 파벌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특혜를 받으며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일명 전명규(한체대)파로 분류된다. 전명규 전 빙상연맹 부회장은 1990년대부터 15년간 국가대표팀 지도자를 역임하면서 한국 쇼트트랙을 정상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다. 그가 감독이 된 이후로 선수 구타, 차별 등의 구설이 끊이지 않았지만 늘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가 감독이던 때 획득한 메달이 780개에 이를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전 부회장은 결국 2002년 10월경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희생 전략’을 강요당한 선수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김기훈, 김동성, 빅토르 안 등 자신과 자신의 제자가 키워낸 선수를 ‘에이스’로 삼고 이들이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다른 선수들을 희생시키는 전략을 주로 활용했다.

이 작전을 위해 다른 선수들은 에이스가 치고 나갈 때 외국 선수들의 진로를 막아서야만 했다.

비록 전 전 부회장은 물러났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가 키웠던 김기훈이 남자팀을 총괄하게 됐기 때문이다. 김 코치는 빅토르 안을 발굴했다. 빙상계에서는 김 코치가 빅토르 안에게만 추월 요령 등을 전수하며 대놓고 편애한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심지어 빅토르 안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 당시 예비명단에도 포함돼있지 않았지만 김 코치의 특혜를 통해 김동성과 1000m 경기에 출전했다. 올림픽 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탈락했지만 결국 승선했다. 전 전 부회장이 뒤를 봐준 덕분이었다. ‘빅토르 안 키우기’ 사태로 전명규파와 비(非)전명규파 간 균열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김 코치는 2004년 말 터진 스케이트 날 비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하지만 2005년 1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벌어진 구타 논란을 틈타 곧바로 복귀한다. 당시 빅토르 안은 한쪽 눈가에 멍이 든 채로 시상대에 올랐고, 비전명규파였던 윤재명 감독은 사퇴했다.

파벌로 흥망
언론 플레이

이후 김 코치는 올림픽 남자 코치로 발탁된다. 하지만 남자 선수들이 “특정 선수(빅토르 안)만을 편애하고 다른 선수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코치와는 올림픽을 나갈 수 없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선수촌 입촌을 거부했다. 입촌 거부 사태는 김 코치가 물러나면서 일단락됐다.

이후에도 내홍은 이어졌다. 전명규파와 비전명규파의 자리싸움은 극으로 치달았다. 결국 남자팀은 비전명규파로 꼽히는 송재근 코치가, 여자팀은 전명규파로 분류되는 박세우 코치가 맡게 됐다. 그러자 선수들이 성별이 아닌 속한 파벌에 따라 훈련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 빅토르 안이 여자팀에서 훈련받은 것 역시 파벌을 따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06년까지 파벌의 수혜를 입으며 성장한 빅토르 안이었지만 이후에는 파벌로 인해 가시밭길을 걸었다. 양측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대회장에서 서로를 방해하기에 이르렀고, ‘집중견제’를 당한 데다가 부상까지 겹친 빅토르 안은 그대로 오랜 침체기에 빠진다.

빙상 스포츠 팬들은 이 같은 맥락을 들어 빅토르 안이 파벌의 수혜를 톡톡히 봤고, 나중에 피해를 받은 부분도 일부 본인이 자초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빅토르 안과 그의 가족들이 사건 일부만 집중 조명해 여론을 호도했다고 비판한다. 이에 빙상 스포츠 팬들이 주로 이용하는 커뮤니티인 ‘디씨인사이드 빙상갤러리’에서 그는 ‘빅똘안’이라는 일종의 멸칭으로 불리며 주된 비난의 대상이 됐다.

빅토르 안은 빙상연맹 사례 외에도 수차례에 걸쳐 여론을 기만했다. 그는 지난 2010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올림픽 선발전에 뽑히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나라 국기를 달고 출전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한다”며 “어떤 편견이나 태클에도 견뎌낸 후 ‘코리아 안현수’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1년 뒤, 빅토르 안은 돌연 러시아행을 결정했다.

또 그는 러시아 귀화 당시 “한국 국적이 상실되는 것을 사전에 몰랐다”고 해명한 바 있다. 해당 발언은 그 당시에도 진실성이 의심받았지만 이를 지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논란이 불거진 것은 그가 러시아 귀화 절차를 마치기 이전에 국가 연금을 일괄 수령한 것이 알려지면서다.

빙상연맹 파벌싸움 피해자?
가려진 일 뒤늦게 재평가

이를 기점으로 사실 빅토르 안의 한국 국적이 상실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 힘을 받게 됐다. 관련 규정에 따르면 연금은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을 때만 받을 수 있고, 국적 상실 예정자는 그 전에 일괄 수령을 요구할 수 있다.

러시아 도핑 스캔들 당시 내놓은 해명도 ‘본질 흐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당시 그는 “2018년 당시 다른 대회에서 실시한 2번의 검사는 모두 통과했다”며 본인의 무고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러시아 도핑 스캔들이 일어난 시점은 지난 2014년부터 2016년까지다. 2018년 당시 도핑 검사 결과와는 무관한 일이다. 당사자인 본인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2022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빅토르 안에 대한 국내 여론이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에서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러시아는 혼성계주 준결승전에서 중국과 같이 경기를 치른 후 실격당했다. 이후 러시아는 파이널B 참가를 거부하며 해당 판정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일부 러시아 국민은 SNS에 그의 소치올림픽 당시 인터뷰를 공유하면서 ‘왜 러시아의 경쟁상대인 중국으로 가서 앞길을 막느냐. 배신감을 느낀다’고 불쾌감을 표출했다. 빅토르 안은 해당 인터뷰에서 “러시아에 감사하다”며 “은퇴 후에도 러시아에 머무르면서 러시아 대표팀 선수들을 지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빅토르 안의 은퇴 당시 코치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빅토르 안은 SNS를 통해 관련 심경을 밝혔다. 그는 “지금 제가 처한 모든 상황이 과거의 저의 선택이나 잘못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 어떠한 비난이나 질책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도 “아무런 잘못도 없는 가족들이 상처받고 고통을 받는다는 게 지금 저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제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 밖의 일이나 사실이 아닌 기사들로 가족들을 향한 무분별한 욕설이나 악플은 삼가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한국살이
가시밭길?

빅토르 안은 게시글이 화제가 되자 부담감을 느낀 듯 삭제했다. 이후 한국 언론의 인터뷰 요청은 모두 거절하고 있다.

한편 그의 부인과 딸은 모두 한국 국적(딸은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다. 또 그를 제외한 가족들은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빅토르 안의 딸이 올해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국적은 사라졌지만, 한국과의 질긴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jeongun15@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국힘 축출’ 가시화 한동훈 광야에 서나

‘국힘 축출’ 가시화 한동훈 광야에 서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 가족의 당원 게시판 연루 의혹 가능성을 사실로 확정 짓고 있다. 같은 당 장동혁 대표도 한 전 대표 축출 의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한 전 대표는 점점 광야로 내몰리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지난 2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사실상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 축출 의지를 드러냈다. 장 대표가 한 전 대표를 직접 겨냥한 것은 아니었으나 ‘걸림돌’이라고 호칭했다. “제거돼야 통합 가능” 장 대표는 이날 “당내 통합에 걸림돌이 있다면 제거돼야 대표가 통합을 이루는 공간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표는 개인적 감정에 따라 움직이거나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며 “당원과의 관계를 해결해야 할 당사자인 어떤 걸림돌은 그걸 해결하지 않고는 연대·통합을 함부로 얘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최근 국민의힘의 주요 화제 중 하나는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됐다”는 당원 게시판 의혹이다. “한 전 대표 가족들의 명의를 이용한 아이디로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 비난 글을 다수 작성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30일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무감사위는 이날 “비난 글을 작성한 문제 계정들은 한 전 대표 가족 5인의 명의와 같고, 전체 87.6%는 2개의 IP로 작성된 여론조작 정황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언론 보도 후 연루자들의 탈당·대규모 게시글 삭제가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 이호선 당무감사위원장도 별도의 자료를 발표했다. 그는 “해당 IP를 사용한 계정 10개 중 4개는 같은 휴대전화 뒷번호·같은 선거구(서울 강남병)을 공유한다”며 “동명이인이 이 모든 조건을 우연히 공유할 확률은 사실상 0%고, 탈당 시점도 4일 이내로 집중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문제는 당 대표 본인·가족 명의 계정을 이용해 다수 당원이 지지하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라며, “당심을 왜곡한 후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해서 일반 여론까지 움직이려 했다면 드루킹 사건보다 더 심각한 범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당원 게시판 의혹을 드루킹 사건과 비교했던 사람은 장예찬 여의도연구원 부원장이다. 장 부원장은 지난달 15일 임명된 후 장 대표의 측근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는 지난 2024년 11월 이 사건을 일컬어 ‘온가족 드루킹’ 혹은 ‘한가족 드루킹’ 등 표현을 사용하면서 한 전 대표를 비난했다. 장에 한은 당내 통합 걸림돌 취급 “게시글, 드루킹 사건보다 더 심각” 한 전 대표와 가족을 강하게 비판한 장 부원장이 사용하는 표현을 위원장 발표 자료에 담은 것을 봐선, 이날 당무감사위의 발표는 “국민의힘에서 한 전 대표를 확실하게 내보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당무감사위에 따르면, 한 전 대표에게 소명을 요구하는 질의서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한 전 대표는 방송 출연으로써 하루 격차를 두고 상반된 의견을 냈다. 그는 지난달 30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해 “당시엔 저와 제 가족에 대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 게시물이 당원 게시판을 뒤덮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제 가족이 익명 보장된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윤 전 대통령 부부에 대한 비판적 사설·칼럼을 올렸단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 말했다. 한 전 대표는 이날 “가족이 게시물을 올렸다”고 처음 인정하면서도 “저는 글을 쓴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족 명의로 게시물을 올리는 게 비난받을 일이라면 가족이 아닌 저를 비난하라고 말하고 싶다”면서도 “제가 제 이름으로 글을 쓴 게 있는 것처럼 발표한 것은 명백한 허위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한 전 대표는 다음 날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위원장이 ‘동명이인 한동훈’ 게시물을 제 가족 게시물인 것처럼 조작해서 발표했다”면서 이 위원장에 대한 법적 조치를 예고했다. 이어 “게시물 작성 시기는 제가 정치를 시작하기 전·최근 등 무관한 것을 대표 사례라고 조작해 발표했는데, 저는 당원 게시판에 아예 가입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이런 가운데 장 대표는 지난 7일 국민의힘 당사에서 진행된 ‘이기는 변화’ 기자회견에서 윤 전 대통령이 자행한 12·3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했다. 장 대표는 이날 “12·3 비상계엄은 상황에 맞지 않는 잘못된 수단으로써, 국민께 큰 혼란·불편을 끼쳤고, 당원께 큰 상처가 됐다”며 “국정 운영의 한 축이었던 여당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어 “그 책임을 무겁게 통감하고,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 국민의힘이 부족했으니, 잘못·책임은 국민의힘 안에서 찾겠다”면서 “국민의힘은 오직 국민 눈높이에서 새롭게 시작하겠으니, 과거의 일은 사법부의 공정한 판단·역사의 평가에 맡겨놓고, 계엄과 탄핵의 강을 건너 미래로 나아가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당명 개정 추진 의사도 밝혔다. 장 대표의 이날 기자회견을 놓고, 일각에선 “윤 전 대통령과의 절연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어 윤 전 대통령을 강하게 지지하는 강경 보수 유튜버 고성국씨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 ‘고성국 TV’에 출연한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에게 입당 원서를 직접 전달하는 형식으로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이에 대해선 “장 대표가 국민의힘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끌어들여 세력화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이어 “고씨를 입당시킨 것과 장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대국민 사과는 모순 아니냐”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고씨는 평소 한 전 대표를 강하게 비판하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혀왔다. 이날 김 최고위원도 고씨의 입당 원서 작성을 지켜보면서 “혹시 당원 게시판에 글 올리시면 들통난다”는 등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거를 타선 없는 국힘? 정의당 박원석 전 의원은 지난 6일 MBC 라디오 <권순표의 뉴스 하이킥>에 출연해 “국민의힘이 한 전 대표 세력을 축출하고, 완전히 윤 어게인 세력의 당으로 만들어 훨씬 더 극우화된 정당으로 가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미 고씨와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입당했고, 윤 전 대통령 변호인 김계리 변호사도 곧 입당 심사를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며 “국민의힘은 거를 타선이 없는 정당이 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국민의힘이 한 전 대표를 내보낼 것”이라는 예측은 “한 전 대표에겐 뚜렷한 정치적 기반이 없는 것 아니냐”는 평가로부터 비롯된다. 한 전 대표의 핵심 기반은 팬클럽 ‘위드후니’다. 위드후니는 40대 이상 여성 중심으로 구성돼있고, 활동하는 노년 여성도 다수다. 하지만 선거는 결국 지역 기반으로부터 비롯된다. 한 전 대표의 가장 큰 정치적 약점으로는 지역 기반이 없다는 것이 주로 거론된다. 한 전 대표의 정치 기반에 대해선 ‘중도층·수도권 화이트칼라 계층에서 일정한 지지를 얻고 있다’는 분석이 많았다. 여론조사기관 미디어토마토가 지난 4일 <뉴스토마토> 의뢰로 지난 1일부터 이틀 동안 만 18세 이상 중도 성향을 지닌 전국 18세 이상 남녀 51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15%는 보수 진영을 이끌면 가장 두려운 상대로 한 전 대표를 지목했다. 하지만 “한 전 대표가 중도층을 국민의힘으로 유도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그 객관적 지표는 지난 2024년 총선이다. 당시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총선을 지휘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108석만 겨우 건지는 참패를 당했다. 한 전 대표는 당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과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를 묶어 ‘이조심판론’을 주장하면서 “야당이 2/3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일각에선 “선거에서 이기려면 중·수·청(중도·수도권·청년)을 잡아야 하는데, 왜 안 하느냐”며 비판했다. 당시 국민의힘은 서울 전체 48석 중 11석을 차지했고, 인천·경기 60석 중 6석만을 차지했다. 국민의힘 지도부가 “한 전 대표가 수도권·중도층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올 수 없는 총선 결과”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중도층 영향력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일각에서 주장했던 ‘장·한·석(장동혁·한동훈·이준석)’ 연대 성립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 이유도 한 전 대표였다. 장 대표는 “개혁신당과의 연대에 대한 표현에 특별히 문제 삼지 않겠다”면서도 “당내 인사와 어떻게 정치를 풀어가느냐는 문제에 왜 연대란 이름을 붙이는 건지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당내 인사’도 한 전 대표를 뜻한다. 따라서 장 대표의 지난 2일 발언한 “당내 통합 걸림돌을 제거해야 대표가 통합을 이루는 공간이 생길 것”에서 ‘걸림돌’이 한 대표라면, ‘통합’ 범위엔 개혁신당과의 연대가 포함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은 지난달부터 통일교 특검법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장 대표도 “자강을 논하는 단계에서 연대를 논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면서도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개혁신당은 이준석 대표가 국민의힘 소속이었을 당시 윤석열 전 대통령·친윤(친 윤석열)계와의 갈등 때문에 당원권 정지 6개월 징계를 받은 후 탈당해 창당됐다. 개혁신당 지지자들은 당시 과정에서 쌓인 앙금을 잊지 않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 이후 자멸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다. 일각에선 장 대표가 한 전 대표를 축출한 후 강경 보수 세력을 당내 세력화해 ‘자강’을 이룬 후 개혁신당과의 연대에 나설 가능성을 제기한다. 국민의힘은 지난해 6월 대선에서 ▲서울 41.55% ▲경기 37.95% ▲인천 38.44% 등을 득표했다. 약 12% 이상의 부족분을 중도층으로부터 얻어와야 한단 사실을 모를 가능성은 낮다. 당시 이 대표는 ▲서울 9.67% ▲경기 8.84% ▲인천 8.74% 등 득표했다. 개혁신당 지지자들은 개혁보수·중도 제3지대에 두텁게 포진해 있다. 국민의힘으로선 개혁신당이 확보한 8~9%의 지지가 필요하다. 중도층의 지지를 얻는 게 확실한지 아직 선거에서 검증되지 않은 한 전 대표와 달리 이 대표는 대통령선거에서 거둔 실적이 뚜렷하다. 장 대표는 “국민의힘 최대 아킬레스건인 중도·수도권 공략을 개혁신당과 이 대표의 힘을 빌려 해결하겠다”고 생각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 수도권 영향력 의문…이준석으로 대체? 지방선거 앞두고 신당 창당 가능할지 의문 국민의힘이 한 전 대표를 중징계하거나 한 전 대표가 탈당하면, 한 전 대표의 운신 폭은 매우 좁아질 수도 있다. 정치의 중심은 국회라서 총선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둬야 정치적 영향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는 6월 지방선거는 말 그대로 ‘지방선거’다. 함께 진행되는 재보궐선거는 현시점에선 ▲인천 계양을 ▲충남 아산을 ▲경기 평택을 ▲전북 군산·김제·부안갑 등 4곳이 확정됐다. 지방선거 출마를 선언한 의원들의 지역구도 가능성이 있지만, 후보로 확정된 의원만 사퇴해 재보선을 치른다. 그 외 의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재판이 진행 중이라서 재보선을 치를 가능성이 있는 지역구로는 3곳이 거론된다. 이 정도 규모의 선거에서의 선전을 바라보고 창당하는 것은 모험에 가까우며, 동력이 얼마나 될지 확인하기도 어렵다. 국민의힘 친한(친 한동훈)계 의원들이 모두 한 전 대표의 정치 행보에 무조건 동참할 것으로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지역 구도가 특히 큰 힘을 발휘하는 한국 선거에서 각각 호남·영남을 지역 기반으로 둔 민주당·국민의힘과 달리 한 전 대표는 독자적인 지역 기반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그와 비슷한 이 대표도 젊은 유권자들이 다수 거주하는 데다 민주당·국민의힘에서도 모두 후보를 공천한 경기 화성을에서 3자 구도를 만들어 승리했다. 특히 지방선거·재보선은 대선·총선에 비해 투표율이 낮은 만큼 보수성이 강하며 그만큼 바람을 일으키기도 어렵다. 한 전 대표는 광야에 설 가능성이 크지만, 신당 창당은 동사·벼랑 끝에 서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한 전 대표의 절정은 12·3 비상계엄 사태였다. 당시 한 전 대표는 계파 소속 의원들과 함께 국회에 진입해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다. 이어 윤 전 대통령이 숙청을 시도하던 반대파 중 1명이 됐다. 하지만 한 전 대표의 절정은 여기서 끝이었다. “한 전 대표가 가족 관리에 실패했다”는 취지의 당원 게시판 의혹은 12·3 비상계엄 사태 이전 한 전 대표를 서서히 옥죄고 있었다. 하지만 12·3 비상계엄 사태 발생 이후 한 전 대표는 비상할 수 있었다. 그는 한덕수 당시 국무총리와 ‘총리·여당 당정 협력 담화’ 형식의 일명 ‘한덕수·한동훈 체제’ 성립을 시도했다. 한덕수·한동훈 체제는 각계각층의 강한 비난 때문에 실제로 성립되진 못했다. 이후 한 전 대표는 친한계 일원이란 평가를 받는 진종오 의원을 포함한 최고위원 4명이 전원 사퇴해 지도부가 붕괴하는 상황을 겪었다. 한때 핵심 측근이었던 장 대표는 국민의힘 대표로서 한 전 대표 퇴출을 주도하고 있다. 따라서 현 상황으로 이어진 한 전 대표 최대의 패착은 2024년 12월11일 장 의원이 입을 굳게 다물고 당 대표실을 나갈 때, 문을 잡고 미소 지었던 순간이다. 폭발까지 도화선은? 폭발이 일어날 때 트리거는 하나다. 하지만 폭탄까지 가는 도화선은 여러개일 수도 있다. 트리거가 터져 폭발이 일어나면, 폭발까지 가는 도화선도 모두 다 터진다. 장 대표는 총선이 아닌 지방선거·재보선을 앞두고 그 트리거를 만지고 있다. 트리거가 당겨지면 한 전 대표는 광야에 선다. 한 전 대표는 과연 광야에 서게 될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