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 김태현으로 본 ‘택배와 범죄’ 딜레마

누군가 당신의 주소를 훔쳐본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손바닥 크기의 종이 한 장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종이에 적힌 주소가 문제였다. 피의자는 그 주소로 피해자의 집을 찾아냈다. 그 끝은 일가족의 죽음. 이미 셀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종이 속 주소가 노출되면서 곤혹을 치렀다. 더 이상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이다.

▲ 택배 송장 ⓒ인천본부 세관

서울 노원구 세 모녀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태현은 지난달 23일 퀵서비스 기사로 가장해 집안에 들어갔다. 작은딸이 먼저 살해됐고 뒤이어 귀가한 어머니와 큰딸이 변을 당했다. 김태현은 범행 이후에도 피해자들의 집에 머물며 음식을 먹는 등의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다 큰딸과 연락이 안 된다는 지인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검거됐다. 

아차하다…

김태현은 지난해 12월 한 온라인게임 이용자 모임에서 큰딸 A씨를 만난 이후 줄곧 스토킹 해오다가 A씨가 그의 구애를 거부하자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A씨가 모바일 메신저에 올린 ‘택배상자가 노출된 사진’을 보고 주소를 알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부터 김태현은 A씨의 집 근처를 맴돌았다. A씨는 그를 ‘검은 패딩’이라고 부르며 지인들에게 공포감을 호소했다.

문제는 택배 운송장이 범죄에 악용된 사례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택배 운송장에 적힌 주소가 노출되면서 많은 사건이 일어난 바 있다. 택배 운송장에는 수신인의 이름과 주소, 연락처가 기재돼있다. 운송장만 봐도 누가, 어디서, 무엇을 샀는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운송장에 적힌 몇 가지 정보만 조합해도 이른바 ‘신상털기’가 가능하다. 

지난달 31일 대전지법 형사4단독(재판장 김성준)은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등 혐의로 기소된 70대 남성 B씨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했다. 


B씨는 택배 운송장에서 옆집에 혼자 사는 여성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낸 뒤 ‘영원히 사랑한다’ ‘밤에 목욕해’ 등의 문자메시지를 10여차례 보냈다. 피해 여성이 경찰에 신고한 뒤에는 200여 차례에 걸쳐 공포심을 유발하는 문자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세 모녀 살인사건 피의자
사진에서 주소 보고 범행

B씨는 경찰 조사에서 “옆집 여성이 오랫동안 샤워하는 듯 물소리가 계속 나서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재판부는 “반복적인 문자메시지로 고통 받아 이사까지 하게 된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2018년 10월 한 남성은 택배 운송장에서 얻은 전화번호로 발신자 표시제한 전화를 걸어 70여명에게 성희롱 발언을 일삼았다. 2016년에 부산에서도 택배 운송장 번호를 이용해 택배 기사로 위장한 20대가 경찰에 붙잡혔다. 유명 유튜버의 택배가 영상에 노출되면서 여러 전화번호로 장난전화 피해를 입은 사건도 있었다.

국가물류통합정보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총 택배 물량은 33억7000만개에 이른다. 2019년(27억9000만개)에 비해 20.9% 성장한 수치다. 특히 지난해 코로나19로 비대면 문화가 확산되면서 그 증가세는 앞선 2018년(9.6%), 2019년(9.7%)과 비교해 2배 이상 높았다. 지난해 국민 1인당 택배 이용횟수는 연 65.1회에 달했다.

경제활동인구로 한정하면 연 122회로 늘어난다.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택배를 직접 받지 못하고 집 앞에 두고 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범죄 위험성 때문에 처음부터 대면 수령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 집집마다 택배 상자 한 두 개씩 쌓여있는 광경은 말 그대로 일상이 됐다. 누구나 택배 운송장에 적힌 개인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충분히 악용도 가능한 셈이다.


택배 운송장을 이용한 개인정보 유출, 이로 인한 범죄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하루 이틀 사이에 제기된 게 아니다. 10여년 전인 2012년 9월 행정안전부는 “소비자들이 택배를 받고 나서 운송장을 함부로 방치해 소중한 개인정보가 보이스피싱·스팸 등에 악용되는 사례가 많다”며 민간자율규제기구인 ‘개인정보보호 범국민운동본부’와 함께 개인정보보호 캠페인은 실시한다고 밝혔다.

개인정보보호 수칙을 담은 스티커 10만개를 제작해 택배 운송장 옆에 부착해 배송하는 방식이다. 스티커에는 ▲보이스피싱·스팸 방지를 위해 필수정보만 제공하고 ▲배송용 임시 전화번호(가상번호)를 이용할 수 있으며 ▲택배 수령 후 운송장은 파기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외에도 택배 운송장으로 인한 개인정보 유출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이미 수도 없이 많았다. 

안심번호·무인택배함 아직…
강한 이름·아세톤 궁여지책

결국 돌고 돌아 개인정보보호는 ‘개인’의 몫으로 남았다. 안심번호는 인터넷 쇼핑이나 택배 주문, 개인 간 온라인 거래 등을 할 때 이동통신사가 제공하는 가상 연락처다. 하지만 안심번호는 전화나 문자를 상대방으로부터 받을 때만 유효할 뿐 이용자가 상대방에게 걸 때는 실제 번호가 여과 없이 노출된다. 또 다른 대안인 무인택배함은 보급률이 높지 않다. 

그러다 보니 개인이 택배 운송장 개인정보 유출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곽두팔, 조덕출 등 뭔가 ‘강해 보이는’ 이름을 골라 본명 대신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택배 이름’이라고 검색하면 가장 상단에 ‘택배 받을 때 꿀팁인 XX 쎄보이는 이름 모음’이라는 글이 나온다. 그 아래로 ‘혼자 사는 여자들이 택배 받을 때 꿀팁’ 등의 글도 눈에 띤다.

여성 이용자가 많은 커뮤니티에서는 ‘택배 운송장을 잘게 찢어서 버려라’ ‘개인정보 부분만 잘라서 화장실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라’ ‘파쇄기로 파쇄해서 한꺼번에 버려라’ ‘매직 등으로 개인정보 부분을 검게 칠한 후에 버려라’ ‘아세톤으로 개인정보를 지울 수 있다’ 등의 팁을 공유하기도 한다.

표적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올해 업무계획에서 택배 운송장 등 일상생활 속에서 개인정보보호 수준 자율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또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라 온라인 수요가 급증한 통신대리점(고객정보), 오픈마켓(판매자 계정), 배달앱(주문정보), 택배(운송장), 인터넷 광고(행태 정보) 등 5대 민간분야를 점검하겠다고 강조했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배달앱도 위험하다

배달앱 이용자의 개인정보 유출 피해도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2019년에는 헤어진 남자친구가 배달앱 고객센터를 통해 주소를 알아낸 뒤 찾아와 폭행을 가한 사건도 있었다.


당시 그는 배달앱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어 “이 번호로 주문을 했는데 배달이 안됐다”고 속여 피해 여성의 위치를 알아냈다.

배달앱 고객센터 직원은 간단한 본인확인 절차만 거쳐 집 주소를 알려줬던 것. 

지난해에는 배달앱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불법으로 보관하고 빼돌린 혐의를 받는 업체 대표가 검찰에 송치되기도 했다.

그는 2019년 8월부터 2년간 배달앱 이용자들이 주문을 위해 입력한 개인정보 2300만 건을 빼돌려 자신이 운영하는 업체 서버에 보관한 혐의를 받았다.

또 해당 개인정보를 한 달에 3만원씩 받고 식당 등에 제공해 16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도 받고 있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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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우리에게 추석은 차례를 지내거나 귀향을 하는 것이 익숙한 명절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명절을 보내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특히 차례를 지내는 비중은 줄어들고 MZ세대를 중심으로 긴 연휴를 활용한 여행, 단기 아르바이트, 자기계발 등을 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추석에 차례를 지내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40%대 초반에 그쳤다. 절반 이상은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답한 것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차례와 제사가 더 이상 필수가 아니게 된 셈이다. 알바 우선 통계청 조사에서도 명절 의례를 간소화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가정이 해마다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례를 지내는 대신 긴 연휴를 여행으로 보내려는 수요가 뚜렷하게 증가했다. 한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행 중개 플랫폼 스카이스캐너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77%가 이번 추석 연휴에 여행 계획을 세웠다고 응답했다. 특히 해외여행 비중이 크게 늘었다. 10년 전 대비 명절 여행에 긍정적인 인식이 37%에서 70%로 2배 가까이 상승했다. 검색 데이터에 따르면, 추석 연휴 기간 인기 여행지는 일본(43.1%)이 1위였고, 이어 베트남(13.2%), 중국(9.6%), 태국(7.5%), 대만(6.2%) 순이었다. 도시별로는 일본 후쿠오카(20.2%)가 가장 높은 검색 비율을 기록했으며, 오사카(18.3%), 도쿄(15.4%), 방콕(8.9%), 타이베이(8.0%)가 뒤를 이었다. 여행을 가지 않고 명절 연휴를 일터에서 보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긴 연휴를 활용해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이 늘면서 단기 아르바이트 수요도 급증했다. 당근마켓과 같은 알바 커뮤니티와 플랫폼에는 “추석 알바 구합니다”라는 글이 다수 올라왔다. 한 20대 청년은 “쉬는 날이 길어 잠깐이라도 일을 하려 한다”고 밝혔고, 한 대학생은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선물세트 포장 알바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특히 명절 기간에는 업무강도가 높아 평균 시급의 1.5배를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평상시에 근무할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명절 시즌 알바를 노리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맞춰 구인·구직 플랫폼들은 ‘추석 알바 채용관’을 운영하며 수요를 모으고 있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 도·소매점과 전통시장에서 단기 인력을 모집하고, 선물용 고기·과일 세트 포장, 택배 상·하차, 진열·판매 등의 일자리가 집중적으로 생겨났다. 절반 이상 “안 지내요” 77%가 여행 계획 세워 지난해 추석 구인 구직 사이트 알바천국 조사에서는 응답자 중 절반 이상(53.9%)이 단기 용돈 벌이를 위해, 22.2%는 고물가로 인한 지출 부담 때문에, 18.2%는 여행 경비나 등록금 등 목돈 마련을 위해 명절 알바를 계획했다고 답했다. 이는 명절을 단순히 휴식 시간으로 보내지 않고, 생계와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집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계발하며 추석 나기’가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혼자 추석을 보내는 일명 ‘혼추족’ 중에는 독서나 온라인 강의, 어학 공부, 자격증 준비 등에 연휴를 투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스터디 카페와 도서관을 찾는 이용객이 증가했다는 조사도 나왔다. 일부 출판사나 문화 기획사에서는 명절 연휴에 맞춰 북콘서트 같은 행사를 열기도 했다. 명절이 휴식 기간만이 아닌 스스로를 계발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양상은 가족 모임에도 영향을 받았다. MZ세대는 가족·친척 모임을 스트레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한 청년은 “친척들과 모이면 취업·결혼 얘기 등으로 잔소리를 들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자기계발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친척 모임에 시간을 할애하기보다, 필요한 경우에만 가족을 만나고 나머지 시간에는 개인활동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연휴를 도심에서 보내는 ‘혼추족’을 겨냥해 유통·외식업계도 다양한 이벤트를 내놓고 있다. 수도권 맛집 가이드, 추석맞이 전시·공연, 집콕형 OTT·게임 프로모션 등이 대표적이다. 편의점과 HMR(가정 간편식) 업체는 명절 한정 도시락·한상 차림 제품을 늘리고, 명절 기간 반값·카드 제휴 할인 등 단기 판촉을 강화하고 있다. 추석 선물 시장도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전에는 굴비·한우·고급 과일 세트 등 전통 품목이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실속형·소포장 선물세트가 늘었다. 대표적으로 대형마트에서는 고급 커피·차 세트, 수제 디저트처럼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소포장 구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일과 자기계발이 더 유익해” 명절 스트레스 가족 모임 불참 온라인몰에서는 올리브 오일, 참기름, 견과류, 꿀 등 건강 지향 소품목 세트가 매출 상위에 오르기도 했다. 실속형·소포장 선물을 찾는 배경에는 고물가 부담과 1~2인 가구 증가가 있다. 소비자들은 예전처럼 고가 선물을 준비하기보다, 실용적이고 보관이 편리한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 명절을 함께 보내는 가족 규모가 줄면서 필요한 양만큼만 담긴 선물세트가 ‘부담 없는 선택’으로 자리 잡았다. 가격 대비 효용을 중시하는 MZ세대 소비자층도 이 같은 흐름을 이끌고 있다. 모바일 선물하기 판매는 전년 추석 대비 두 배 이상 늘었고, 온라인몰도 같은 기간 선물세트 매출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편의점 앱을 통한 선물세트 매출은 연중 대비 100% 이상 신장세가 관측됐고, 패션·라이프스타일 플랫폼의 선물하기 거래액도 두 자릿수 증가를 이어가고 있다. 마켓컬리는 추석 기간 한시 선물하기 서비스를 운영하며 홍삼·화장품 등 선물 품목을 확장했다. 명절 식문화 자체도 간편화 된 흐름이 뚜렷하다. 1인 가구 1012만명, 2인 가구 600만명으로 소규모 가구가 크게 늘어난 가운데, 대형마트의 간편 차례상 매출은 최근 3년 연속 증가했다. 편의점의 냉장·냉동 HMR 매출은 두 자릿수 증가했고, 명절 한정 도시락은 1인 가구 밀집 상권에서 판매 비중이 높았다. 이번 추석에도 이런 흐름에 맞춰 대형 마트는 간편 차례상·냉동 밀키트 대형 할인전을, 편의점 4사는 명절 도시락 출시와 제휴 할인행사를 연달아 내놓고 있다. 밀키트와 같은 간편식의 수요가 증가한 데에는 물가 상승이 영향을 미쳤다. 소비자 설문에선 추석 전체 지출 예산이 평균 71만2000원으로 전년 대비 26%가량 늘었다는 응답이 나왔다. 지출 중에는 부모 용돈·선물 비중이 절반을 웃돌았고, 차례상 비용·내식 비용도 적지 않았다. 품목별로 과일·수산물·햅쌀·송편 등의 차례상 음식 가격 부담이 커지면서, 수입 축산물 고려 비율도 늘었다. 이 때문에 “차례상 형식을 간소화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선택의 시대 추석을 준비하는 한 30대 가정주부는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차례를 안 지내거나 설에 한 번만 지내는 집이 많다. 고물가 시대에 음식을 다 준비하는 것은 부담되는 것 같다. 그런 형식적인 것은 간소화하더라도 차례를 지내는 행위에 의미가 있으니 상관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