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통 큰 여장부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0.08.03 11:00:20
  • 호수 12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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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나온 김에…노벨상 가즈아~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천사가 나타났다. 과학 인재들을 위해 ‘통 큰’ 기부를 한 그 주인공은 바로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다. 이 회장은 “과학이 미래”라고 강조하며 과학 인재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이수영 광원전자 회장 ⓒKAIST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지난달 23일 한국과학기술원(이하 KAIST)에 676억원을 기부했다. 지난 2012년(80억여원)과 2016년(10억여원) 미국 부동산을 유언으로 증여한 것에 이은 세 번째 기부다. 이번 기부로 KAIST 개교 이래 최고액인 766억원으로, 이 회장은 기부 여왕이 됐다. 

교육재단 설립
연구기금 사용

이 회장은 KAIST 대전 본원 학술문화관서 열린 기부 약정식서 676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출연해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이 수익금은 KAIST 싱귤래러티 교수 지원을 통한 노벨상 연구 기금으로 사용된다. 

싱귤래러티 제도는 과학 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교수, 인류 난제를 해결하고 독창적인 과학 지식과 이론을 정립할 수 있는 교수를 선발해 지원한 제도다. 

싱귤래러티 교수로 선정되면 10년간 임용기간 동안 연구비를 지원 받고 논문·특허 중심의 연차 실적 평가가 유예된다. 임용 기간 종료 시 연구 진행 과정 및 특이점 기술 역량 확보 등 평가에 따라 지원 기간을 추가로 10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국가 발전을 위해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본 이 회장의 생각이 ‘통 큰 기부’로 이어진 것.

이 회장은 “나는 과학을 모르지만, 과학의 힘이 얼마나 큰지는 잘 알고 있다.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과학 기술 인재를 키워주시기 바란다.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KASIST 역대 최고액 766억 쾌척
2012년, 2016년 이어 올해 세 번째

이 회장이 KAIST와 처음 인연은 맺은 건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속할 사람이 없었다. 그때부터 자신의 재산을 기부할 곳을 찾았다. 2012년까지 서울대 법대 장학재단 이사장을 맡아 장학사업을 진행했지만, 모교인 법대는 학업은 잘해도 사회에 공헌하는 부분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다른 곳을 찾다가 우연한 기회에 서남표 KAIST 총장이 출연한 TV 인터뷰를 접했다. 

서 총장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국민이 호응해달라”는 이야기에 감명받은 이 회장은 과학기술만이 우리나라가 살 길이라고 생각한 것. 좋은 연구를 통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국가 발전에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 이수영 회장 ⓒKAIST

노벨상은 세계가 인정하는 권위적인 상이자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분야다. 이 회장은 국내 과학기술의 위상을 높이려면 노벨상 수상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추가 기부 계획에 대해 이 회장은 “KAIST를 계속 지켜보려 한다. 연구를 잘하지만 경영능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재단이 금액을 관리해 KAIST가 이익잉여금을 쓰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동안 몸이 좋지 않았던 이 회장은 재산이 의미 있게 사용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으며, 신성철 KAIST 총장의 뜻에 공감해 임기 동안 KAIST 발전의 기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KAIST에는 대한민국 1호 한의학 박사인 고 류근철 박사(578억원),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515억 원), 김병호 전 서전농업 회장(350억원), 고 김영한 여사(340억원) 등의 기부자들이 고액의 발전기금을 기탁했다. 

사시 낙방
신문사로

해방 이전인 1936년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이 회장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했다. 아들보다 강하고 씩씩하게 성장하길 바랐던 부모님의 바람대로 그는 당대 최고 명문이었던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로 진학한다. 하지만 1년간 열심히 공부해 도전한 사법고시에 낙방한 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졌다.

겨우겨우 몸과 마음을 추스른 그는 영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어느 날, 학원 게시판서 공고문 하나를 본 뒤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 공고문은 <서울신문>서 신입 기자를 뽑는다는 안내문이었다.

1963년 <서울신문> 10기 수습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디딘 그녀였지만 ‘따돌림’ 등으로 4개월 만에 사직서를 쓰게 된다. 이에 대해 자서전서 ‘서울대 법대 출신의 자그마한 여기자가 하나 들어와서 고개 빳빳이 들고 편집국을 다니는 내 모습이 곱게 보였을 리 없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한국경제신문>을 거쳐 1969년 <한국일보> 자매지였던 <서울경제신문>에 뿌리를 내렸다. 1980년 전두환정부가 <서울경제신문>을 강제 폐간할 때까지 몸담아 총 17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이 회장은 스스로 “나는 아직도 <서울경제신문>을 친정으로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 시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기자 시절 그는 10원 정도 하는 안양 땅 5000평을 매입해, 돼지 2마리와 암컷 한우 3마리로 목장을 시작했다. 농장이 커지자 낮에는 신문사서 일하고 밤에는 경기도 안양의 목장서 돼지와 소를 키웠다. 목장과 서울을 오가느라 하루에 한 시간 남짓 차 안에서 잠깐씩만 눈을 붙이면서 생활을 이어갔다.
 

기자를 그만두고 나서 본격적으로 농장 일과 사업을 벌였다. 선친이 딸의 결혼 비용 등으로 남긴 50만원짜리 적금 통장 2개가 사업 초기자본금이었다. 돼지 2마리로 시작한 목장은 돼지 100마리, 소 10마리로 규모가 커졌고 전국에 소개될 만큼 주목받기 시작했다.

돼지 출하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했을 때는 국군장병 위문품으로 돌려 이익을 남겼고, 우유가 남아도는 ‘우유파동’ 때는 농림부에 초등학생 우유 무료 제공을 건의해 판로를 뚫었다.

지난 2018년
자서전 출간


목축으로 시작한 이 회장은 모래채취 사업으로 본격적인 부를 일궜다. 1988년 부동산 사업을 시작하며 광원산업을 세우고, 여의도백화점 일부 매입 등을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덕분에 미국의 연방정부가 세 들어 있는 빌딩의 건물주가 됐다.

이 회장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건물의 주인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고 말했다. 이게 바로 KAIST에 유언으로 증여하며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건물이다.

이 회장은 80년 넘게 독신으로 살다가 2018년 서울대 법대 동창이자 첫사랑이었던 김창홍 변호사와 결혼했다. 남편은 대구지검 지청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력가의 기부에는 으레 가족들의 반대가 따를 수 있지만 이 회장은 “남편이 오히려 ‘이왕 마음먹은 거 빨리 하라’며 기부를 독려했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2018년 11월 자서전 <왜 KAIST에 기부했습니까?>를 출간했다. 이 책은 이 회장의 일대기를 담은 책으로 KAIST발전재단이 출판하고 이 회장이 직접 썼다. 이 회장의 어린시절, 학창시절, 기자 시절, 만난 사람들, 기업가, 기부자 등 6부로 구성된 책이다. 
 

▲ 왜 KAIST에 기부했습니까?

1936년생인 이 회장이 늦게나마 펜을 들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기록한 이유는, 자신이 가장 많이 들었던 세 가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첫째, 당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법조인의 길을 걷지 않고 기자의 삶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가? 둘째, 여성의 몸으로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어떻게 그렇게 돈을 모을 수 있었는가? 셋째, 왜 기부를 결심하게 됐고 그것도 KAIST에 기부했는가? 이 회장은 자신의 삶을 하나씩 되돌아보며 이 질문의 답을 찾는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신문기자 생활
땅 사놓은 게 잘 풀려 사업가로 변신

책에는 재계 인사들 관련 일화와 취재 뒷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과는, 소장하고 있던 골동품을 취재하기 위해 어렵게 만난 이야기가 담겼다. 또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함께한 이병철 회장 인터뷰는 이후 한·일 국교 정상화 10주년 기념 전시로 이어졌다. 당시 ‘한국미술 5000년전’에 이 회장은 삼성서 소장하고 있던 국보급 보물을 대거 공개해 전시를 빛냈다.

과자로 시작해 시멘트 회사까지 인수하면서 국내 10대 기업으로 회사를 키운 이양구 동양그룹 창업주는 한때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평소 그가 ‘근면과 성실의 결정체’임을 알고 있었기에, 잠적한 그를 설득했다. 마침내 새벽 5시에 만나겠다는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서 “내게 시간을 달라고 전해달라”며 “채권자들이 어떤 피해도 보지 않게 하겠다”는 이 창업주의 말을 기사로 전했다.

그는 모든 것이 정리된 후 “이수영 기자가 나를 살렸다”고 말했다.

이 회장의 기부 행위를 두고 안종수 단국대학교 보건학 박사는 <뉴스토마토> 칼럼서 “비과학자 출신이 노벨 과학상에 대한 염원을 담아 큰 액수로 기부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 회장이 이런 행위는 두 가지 측면서 정말 의미가 크다. 하나는 우리 사회 부자들의 기부문화를 성찰하게끔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 입국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과학 중요성
일깨워준 행위”

이어 “우리나라가 미국, 유럽 선진국들에 견줘 크게 모자라는 것이 바로 갑부들의 기부문화와 노벨 과학상 수상이다. 서민들이야 기부하고 싶어도 그럴 만한 재산이 없어서라는 이유를 댈 수 있지만, 수백억원 이상의 자산가들도 수두룩한데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사회 기부보다는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데 골몰하고 있다. 기부하더라도 대부분 장학재단 등으로만 내놓지 과학기술 입국 목적으로 내놓은 경우는 희귀하다. 이 회장의 기부가 정말 뜻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덧붙였다. 
 

<9do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또 다른 기부왕’ 고 송금조 이사장

이수영 회장 말고도 노벨상 수상을 위해 재산을 아끼지 않았던 또 한 명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고 송금조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이다. 평생 모은 돈을 지역 교육 문화 발전에 바친 송 이사장이 7월21일 오후 6시14분에 별세했다. 향년 98세. 

송 이사장은 지난 2004년 전 재산인 1000억원을 사회에 환원하며 순수 공익재단인 경암교육문화재단을 세웠다. 그전에는 2003년에는 부산대학교의 양산캠퍼스 설립에 305억원을 기부 약정하고, 195억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개인 기부금 사상 최고액이었다.

1923년 경남 동래군 철마면 송정리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송 이사장은 늘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가난 탓에 17세가 돼서야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에 가지 못해 친구의 집에 놀러가 몰래 교복을 입어봤다는 일화도 있다. 교육열이 울혈처럼 맺혔다.

군 복무 시절, 돈이 없어 면회를 온 어머니에게 설렁탕 한 그릇 못 사드린 게 한이 돼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소소한 점원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이후 1974년 금형 사출공장인 ‘태양사’를 설립해 유럽 전역과 미국에 식기 세트를 수출했다. 봉제공장 ‘태양산업’, 플라스틱 사출공장 ‘태양화성’ 등도 성공시켰다.

1987년에는 ‘1000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했고 1986년에는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악착같이 수천억원대의 재산가가 됐지만, 근검절약 정신은 몸에 배어 있었다. 부인이 세수한 물을 대야에 뒀다가 화장실용으로 사용할 정도로 아끼고 아꼈다.

그렇게 모은 돈은 오직 지역사회 교육에 썼다. 1985년 학교법인 태양학원을 설립했고, 이듬해 경혜여고를 설립해 중등교육 육성에 매진했다.

2000년 봉황장을, 2002년 국민교육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전 재산을 환원할 당시 송 이사장은 “뭐가 아까우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구>


<기사 속 기사> 대한민국 기부왕은?

100세를 눈앞에 둔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회장은 한국의 기부왕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한 언론 인터뷰서 “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할 수 없어도 돈을 사용하는 데 천사처럼 하겠다”는 자신의 기부 철학을 알렸다. 

그는 1959년 삼영화학공업 주식회사를 세운 뒤 2000년 1조원의 사재를 털어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세계 100대 자선재단 순위서 90위에 속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 장학재단이다.

가구업체 한샘의 창업주인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은 2015년 자신이 보유한 한샘 주식 절반인 260만주(당시 종가 기준 약 4400억원)를 한샘드뷰재단에 내놓기로 약속했다. 조 명예회장은 2015년 60만주, 2017년 100만주를 기부했으며 나머지 주식의 재단 증여도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도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의 통일나눔펀드에 개인자산 전액인 약 2000억원을 기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더불어 이 명예회장은 1995년 대구 지하철 공사현장 폭발사고(20억원), 2017년 경북 포항 지진 (10억원), 2020년 코로나19(20억) 등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일에 꾸준한 기부를 이어왔다.

예술계 스타들도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원로배우 신영균씨는 2010년 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규모의 사유재산을 한국 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쾌척했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시가 100억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서 “나중에 내 관 속에는 성경책 하나 함께 묻어주면 된다”며 앞으로 남은 재산도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신씨는 서울대 출신의 잘나가는 치과의사이자 사업가, 배우, 국회의원 등으로 다양한 삶의 궤적을 그린 인물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극단서 활동하다 어머니의 반대로 1995년 서울대 치과대학에 진학했다. 1960∼1978년 영화에 출연해 얼굴을 알린 이후 15·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배우 장나라는 정확한 액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미 2009년 130억원이 넘는 금액을 기부한 바 있다. 대부분의 광고 수익을 기부하는 그는 “사람들에게 장미를 나눠주니 내 손에 장미향이 남았다”는 가훈을 가슴에 담아 선행을 실천한 것.

기부천사로 알려진 가수 션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아내 정혜영과 각종 재단에 개인으로 기부한 금액은 55억원이 넘는다. 그는 한 방송 프로그램서 “한 단체서만 아이 400명 정도 후원을 한다. 총 1000명 정도 후원을 한다”고 말해 놀라움을 안겼다.

또 가수 하춘화도 45년간 200억원이 넘는 기부를 했으며, 가수 조용필도 매년 수억원씩 기부하며 2013년 미국 경제지 포브스 선정 ‘아시아 기부영웅 48인’에 이름을 올렸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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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