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약 두 달의 기다림 끝에 영화 <사냥의 시간>이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당초 2월26일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개봉일을 연기하다 넷플릭스와 재차 손을 잡았다. 이 과정서 해외 세일즈사 콘텐츠판다와 투자배급사인 리틀빅픽처스 간 법정 소송이 있었고, 진통 끝에 극적으로 합의하며 지난 23일 대중과 만났다. 개봉까지 난항을 겪은 <사냥의 시간>의 속살은 과연 넷플릭스가 탐낼 만한 미덕은 있었다.
<사냥의 시간>은 이름값만으로도 기대가 높았다. 2011년 3월 개봉해 각종 영화제서 상을 쓸어 담은 <파수꾼> 윤성현 감독의 9년 만의 신작이자, 배우 이제훈과 안재홍, 최우식, 박정민, 박해수가 출연하기 때문이다.
소문난 잔치
각종 드라마와 영화서 진가를 발휘한 배우들과 <파수꾼>으로 10대의 방황과 혼란을 내밀하게 풀어내며, 영화계를 뒤집어놨던 윤성현 감독이 뭉치는 것만으로도 <사냥의 시간>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아울러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 갈라에 공식 초청됐으며, 찬사도 쏟아졌다.
소문난 잔치나 다름없었던 <사냥의 시간>에는 맛있는 음식과 맛 없는 음식이 공존한다.
먼저 시작하자마자 몰아치는 강렬한 이야기와 빠른 전개, 철저하게 통제한 빛을 통해 영화 고유의 색감을 만들어내는 분위기, 긴박감을 극대화한 카메라 워킹, 그릇된 욕망에는 거대한 불안이 뒤따른다는 주제 의식과 범죄를 꾸미는 인물들에게조차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배우들의 연기까지, 장점은 다양하다.
반대로 너무 불친절한 탓에 스토리를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 점과 허무한 결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누아르와 스릴러가 교묘하게 섞인 이 영화의 배경은 시스템이 무너진 미래의 한국이다. 병든 사람들이 거리를 헤맨다. 환율은 치솟았고, 한화는 가치를 잃었다. 임금은 달러로 지급된다. 정부는 소통을 거부하고, 국민을 공포로써 통제한다.
법이 무용지물이 된 사회는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이다. 총을 먼저 쏘는 자가 승리한다. 겨우 하나 남은 은행은 범죄자들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으며, 법의 테두리는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정의는 사치가 됐다.
보석상을 털다 붙잡혀 3년의 감옥살이 끝에 세상에 나온 준석(이제훈 분)은 둘도 없는 친구인 장호(안재홍 분)와 기훈(최우식 분)을 만난다. 준석은 3년이라는 시간 끝에 자유를 얻자마자, 진정한 자유를 위해 범죄를 모색한다. 대상은 도박장이다. 엄청난 양의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준석의 제안에 기훈과 장호는 망설인다. 하지만 성실하게 살아도 미래는 어둡다. 심한 안갯속에 겨우 떨어지는 빛 정도가 성실한 사람들 앞에 놓인 희망이다. 도박장을 털기로 결심한 세 친구는 도박장서 근무하는 상수(박정민 분)를 섭외한다. 이어 준석이 감옥서 인연을 맺은 총기 도매상 봉식(조성하 분)으로부터 대량의 총과 총탄을 받아 만반의 준비를 한다.
하와이와 같은 대만의 한 섬에서 편안한 삶을 꿈꾸는 네 친구는 도박장 털이에 성공한다. 이제 밀항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어딘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 상수는 연락이 되지 않고, 봉식은 준석에게 의문의 질문을 던진다. 일이 잘못됐음을 눈치채지만, 이미 늦었다. 한 번 물면 벗어날 수 없는 한(박해수 분)이 이들을 사냥감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과연 준석을 비롯한 세 친구는 한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관객의 목을 부여잡는 서스펜스
지나친 열린 결말, 허무한 엔딩
기념비적인 데뷔작 이후 9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차기작을 내놓지 못했던 윤 감독은 마치 이를 갈고 연출에 임한 듯 싶다. 자욱한 안개와 어두컴컴한 조명, 을씨년스러운 배경의 분위기로 <사냥의 시간>만의 색을 만들었다. 짧은 대사와 장면서조차 정성이 보인다. 특히 인물들에게 주어진 위기의 정도를 빛의 양으로 대변하는 영화적 화법이 눈에 띈다.
네 친구가 도박장을 털고 도망치는 시퀀스, 이들을 뒤쫓는 한과 네 사람이 맞닥뜨리는 시퀀스 등 주요한 장면서의 서스펜스는 밀도가 굉장히 높다. 위기에 위기를 거듭하는 상황서의 몰입감은 숨쉬는 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영화 내내 전달되는 긴박감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버스터즈: 거친 녀석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버금간다. 국내서만큼은 손에 꼽을 만한 긴장감이다.
사냥감을 잡았다 놨다 하며 가지고 노는 짐승의 악랄함이 한에게서 보인다. 영화는 언제나 몇 수를 내다보고 느긋하게 움직이는 한을 통해 막강한 악역이 작품의 매력을 어디까지 올려놓는지 설명한다.
또 아무리 그럴싸한 이유를 내놓는다고 해도, 남의 것을 뺏은 욕망에는 두려움과 불안, 공포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미 덫에 걸린 사냥감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잘못된 욕망은 더 큰 피폐함을 준다. 잃을 것 없는 인생서 마지막 남은 것까지 앗아간다. 누군가의 도움도, 행운도 무의미하다.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스스로 맞서는 것뿐이라는 게 <사냥의 시간>이 전하는 메시지다.
걸출한 배우들의 시너지는 상당하다. <파수꾼>을 통해 이미 윤 감독과 합을 맞춘 이제훈과 박정민은 물론 최우식과 안재홍 모두 주어진 인물에 녹아든다.
영화 화자인 준석 역으로 탁월한 심리묘사를 보여준 이제훈, 친구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에 거리낌 없지만 속 깊은 기훈 역의 최우식, 어딘가 부족해 보이지만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장호 역의 안재홍, 잘못을 뉘우칠 줄도 알고 고마움도 아는 상수 역의 박정민, 주요 배우들이 현실감 있게 개성 있는 캐릭터를 창조한다.
자신만큼 친구들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20대의 치기 어린 우정은 영화 말미 진한 뭉클함을 선사한다.
박해수가 연기한 한은 한국판 안톤 시거(<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하비에르 바르뎀 분)가 연상된다. 몇 마디 대사 없이 존재만으로 공포감을 자아내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강렬하다.
하지만 안톤 시거가 서브텍스트 측면서 재난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도록, 분명한 규칙이 있었던 반면에 한은 비슷한 면이 보이지 않는다. 이유없이 사냥감을 풀어줬다가 다시 꼭 잡으려고 하는 모습, 인물의 설명이 부족해 그가 벌이는 파괴적인 행동 등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스토리면에서 개연성이 떨어지는 감이 느껴진다.
시즌2 염두?
궁금증만 던져 놓은 채 끝내 수습하지 않는 엔딩은 상당히 허무하다. 시즌2를 염두에 뒀다고 하더라도, 너무 열어놓은 결말 때문에 황망한 감정이 밀려온다. 비록 엔딩이 아쉽기는 하나 <사냥의 시간>만의 미덕은 분명하다. 누아르 물을 즐기는 팬들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스토리의 개연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관객에겐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