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김성수 기자] 재계에 한 판결이 회자되고 있다. 모 기업의 회삿돈을 빼돌린 사건인데, 그 전모가 한마디로 기가 막히다. 우선 등장인물들이 시선을 끈다. 병상에 누운 회장과 그의 후처,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가신 등이 주인공. 스토리 또한 한편의 막장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A사장은 해외에서 잘 나가는 한국인 사업가다. 각종 대외 직함을 맡는 등 교민사회에서 유명인사로, 현지에서 호텔·부동산 개발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그의 성공 이면엔 놀라운 비밀이 감춰져 있었다. 한국에서 수상한 돈을 들고 해외로 나가 버젓한 사업가가 된 것이다.
전처 자녀들 고소
그가 큰돈을 쥐게 된 사건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A사장은 아프리카 라이베리아, 홍콩 등 해외에 거점을 둔 모 해운업체 B회장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B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신임을 얻은 A사장은 B회장이 병상에 눕자 숨겼던 본색을 드러냈다. B회장은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병세가 악화돼 치매 증세까지 보였고, 이 사이 A사장은 회삿돈을 빼내기 시작했다.
외국계 은행 홍콩지점에 2개 회사명의로 예금계좌가 있는 것을 이용, 예금인출 서명권자 명의를 바꿔 이 홍콩지점에서 인출하는 수법으로 B회장이 병상에 누워 있던 2001∼2005년 4년 동안 회사자금 1억1500만달러(당시 약 1330억원)를 빼돌렸다. A사장은 이 돈의 일부인 3000만달러(약 350억원)를 갖고 해외로 나가 호텔, 골프연습장 등 여러 사업을 벌였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한인사회에서의 영향력도 넓혀 나갔다.
이도 잠시. 그의 여유로운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B회장이 2007년 75세로 사망하자 상속권자인 자녀들은 재산 분배 과정에서 엄청난 돈이 증발한 사실을 알게 됐고, 갑자기 연락을 끊은 A사장을 의심했다. 자녀들이 수차례에 걸쳐 사실 확인을 요구했으나 A사장은 이를 거부했다.
이들은 결국 A사장을 검찰에 고소했다. 검찰은 해외에 있던 A사장에게 여러 차례 귀국할 것을 종용했지만 이 역시 응하지 않았다. 이에 검찰은 인터폴을 통해 A사장을 수배하는 한편 현지에 협조를 요청했고, 외국인관리청은 A사장을 체포해 검찰에 넘겼다.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는 지난해 6월 해운업체에서 1억1500만달러의 회사 자금을 빼돌린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등)로 A사장을 구속했다.
문제는 인출된 예금액 1억1500만달러 중 A사장이 사업에 쓴 3000만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8500만달러(약 980억원)의 행방이었다. 검찰은 A사장과 공모한 사람이 있다고 보고 추적에 나섰고, A사장 배후에 회장의 후처 C씨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B회장은 C씨와 1996년 결혼했고, 전처와 사이에 3명의 딸을 두고 있었다.
검찰은 두 달 뒤 A사장과 공모해 회삿돈을 빼돌린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로 C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B회장이 전처와 결별한 뒤 재혼한 C씨는 범행을 공모·주도한 혐의를 받았다. 검찰에 따르면 C씨는 뇌경색으로 쓰러진 남편이 치매 증세로 정신이 혼미해진 틈을 타 당시 비서였던 A사장과 범행을 모의했다.
후처-비서 회삿돈 1330억 빼돌린 혐의 기소
정신 오락가락한 오너 의사 관건…1심 무죄
검찰은 "C씨는 B회장이 정상적인 의사결정이 어려워지자 회사명의 계좌 예금인출 서명권자 지위를 사임한다는 사임서와 자신을 남편의 회사 대표이사이자 새로운 예금인출 서명권자로 선출하는 내용의 이사·주주합동총회 회의록 등을 위조했다"며 "이를 증거 삼아 남편의 회사 권리관계에 관한 등록업무를 관장하는 미국 소재 L사에 권리 관계 변동을 신청해 문서가 진짜인 것처럼 꾸몄다"고 지적했다.
C씨는 인출한 돈 가운데 3000만달러를 B사장에게 주고, 나머지 8500만달러를 스위스 등 해외 은행 10여 계좌에 나눠 예치한 뒤 2010년 10월 싱가포르의 한 자산관리회사에 재산관리를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C씨가 빼돌린 돈의 일부를 자신의 성형비용 등으로 사용했다는 게 검찰의 전언이다.
A사장과 C씨는 검찰 조사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공모 여부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진술하면서 치열한 법정 공방을 예고했다. 실제 검찰과 변호인은 재판에서 팽팽히 맞섰다.
재판의 관건은 B회장이 예금인출 서명권자 지위를 사임한다는 사임서에 직접 사인했는지 여부다. 검찰은 "A사장과 C씨가 뇌경색으로 판단 능력이 없는 B회장의 의사와 관계없이 몰래 서류를 위조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변호인은 "B회장의 자발적 의사에 따른 것"이라고 반박했다.
법원은 A사장과 C씨의 손을 들어줬다. B회장이 정상적인 의사결정에 따라 사임서에 직접 서명했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이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는 최근 서류 등을 위조해 1330억원대의 회삿돈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A사장과 C씨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B회장의 진료기록을 보면 사임서를 작성할 당시 뇌경색 등으로 인해 '예금 서명권자에서 사임한다'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상태였다고 보이지 않는다"며 "사임서의 필적감정 결과 역시 B회장이 맞고, 다른 사람이 B회장의 서명을 흉내 낸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A사장과 C씨가) B회장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이용해 서류를 위조했다고 의심 없이 받아들일 만큼 확실한 증거가 없다"며 "B회장이 외부 활동이 어려워지자 예금인출 서명권자를 C씨로 변경하려 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서류에 직접 서명"
다만 재판부는 "B회장이 더 간단한 방법으로 거래 은행과 서명권자를 바꿀 수 있었다는 점과 서명권자가 바뀐 이후 피고인들이 회사자금을 인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금의 흐름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사건 실체에 대한 여지를 남겼다.
재판 결과에 A사장과 C씨는 당연히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검찰은 즉각 항소할 뜻을 내비쳤다. A사장과 C씨를 고소한 B회장의 자녀들 역시 수긍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이미 고인이 된 '회장님 돈'을 놓고 벌인 양측의 불꽃 튀는 공방은 2심에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