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인터뷰> ‘SH공사 숙청 사태’ 직위해제자의 토로

30년 충성했는데 하루아침에 ‘팽’

[일요시사 취재1] 장지선 기자 = SH서울주택도시공사가 대규모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고위급 간부들의 직위가 해제됐다. SH공사는 ‘혁신을 위한 정당한 인사조치’, 직위해제자들은 ‘인사폭거, 인사갑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요시사>가 직위해제자 A씨를 만나 현 상황에 대해 들어봤다.

지난달 21일 SH서울주택도시공사(이하 SH공사)는 ‘시민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인사혁신 단행’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보도자료에는 갑질과 비리를 근절하기 위해 처장급 등 간부직원 28명을 일선서 퇴진시키는 인사 조치를 단행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갑질·비리
미리 방지?

SH공사는 최근 감사원 감사 과정서 센터직원들의 갑질 및 금품수수, 자체 점검과정서 적발한 전직 직원의 보상금 편취 사건과 일부 직원들의 편법 보상 등의 비리 문제가 연이어 터지면서 조직내부의 혁신 요구를 받아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간부직원 28명에 대한 조치는 조직문화를 쇄신하고 비리를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첫 단계라고 밝혔다.

이번 조치로 원장, 처장, 단장 등 관리직에 있던 간부직원들의 직위가 해제됐다. 일부 간부직원들은 경영지원본부 인재개발부로 발령났다. 28명 중 21명은 1960년생, 7명은 1961년생으로 정년이 23년 남은 직원들이 대상이 됐다.

특히 내년이면 전문위원으로 전보되면서 보직을 내놓는 1960년생 간부직원들은 연말까지 채 40일도 남지 않은 상황서 인사 조치의 칼날을 맞았다.


인사 조치 나흘 뒤인 월요일(1125) 직위해제자들은 직위해제 인사폭거 조치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김세용 사장은 내부의 합리적 의사결정을 무시하고 폭압적 인사폭격을 군사작전 하듯이 단행했다이번 사태는 김 사장 본인의 경영상 무능함을 가리기 위한 면피용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임명권자인 박원순 서울시장에게는 김 사장을 해임조치하라고 요구했다.

같은 날 1960년생 간부직원 10명은 김 사장과 인재개발처장, 인재개발부 담당자 등 3명을 인권침해와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이들은 김 사장 등이 SH공사 인사규정과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이하 고령자고용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갑작스런 인사 조치에
간부직원 28명 ‘충격’

SH공사 인사규정 제38(직위해제)에 따르면 사장은 형사사건으로 공소 제기된 자 직무수행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거나 근무성적이 극히 불량한 자 소속직원에 대한 감독능력이 부족한 자 정직 이상에 해당하는 징계의결이 요구 중인 자 비위행위로 직위해제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직위를 해제할 수 있다.

하지만 직위해제자들은 자신들이 인사규정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실제 이번에 인사조치를 당한 28명 가운데 직위해제 요건에 해당하는 직원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SH공사 역시 지난달 26일 내놓은 해명자료서 이번 인사발령은 근무서 완전 배제하거나 급여상 불이익이 있는 조치가 아니라, 직책에서는 제외됐지만 정년 60세까지 향후 2년 동안 근무를 계속하기 때문에 인사 등 불이익을 받는 직위해제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직위해제자들은 SH공사가 고령자고용법상 배치·전보·승진 등에서의 연령차별 금지조항을 어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해당 조항에 따르면 사업주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근로자 또는 근로자가 되려는 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
 

▲ 김세용 SH공사 사장

SH공사는 이번 인사발령은 2019~2020년 임금피크제 대상자 중 일부 간부직원을 대상으로 이뤄졌다원래 임금피크제 대상 직원의 경우 해당 기간이 도래하면 현 직위서 제외되고 전문위원으로 발령 조치되지만, 대상자들의 인사시기를 앞당겨 단행함으로써 조직문화 혁신을 기하고 시민기업으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공사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직위해제자 A씨는 SH공사 해명에 대해 일선서 퇴진시키는 것과 직위해제는 다르다회사 스스로도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지 않으니 이렇게 해명이 꼬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5일 취재과정서 만난 A씨는 이번 인사조치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다음은 A씨와의 일문일답.

-1121일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면.

평소처럼 출근했다. 그러다 오후 2시쯤 다른 부서 직원이 인사발령 소식을 알려줬다. 인사발령 문서에 ○○○직을 면함이라고 돼있는 걸 보고 직위해제를 직감했다. 잘못한 게 있는지, 인사규정서 정한 형사사건에 연루된 게 있는지 돌아봤지만 전혀 없었다.

-소식을 듣고 난 뒤 느낌을 떠올린다면.

정말 멍했다. 혼비백산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그나마 28명이 한꺼번에 이런 일을 당했다는 소식에 창피하다는 생각이 조금 줄어들었고 나름대로 의지가 됐다.

-전조는 전혀 없었는지.

인사발령(1121) 이틀 전쯤 한 직원이 연말 인사 때 1961년생 직원까지 포함해서 정리한다는 소문이 돈다는 걸 말해준 적 있다. 정년이 2년 남은 1960년생 직원들은 올해가 지나면 전문위원으로 가기로 돼있으니 그렇다쳐도, 1961년생 직원까지 인사조치하는 것은 무슨 함정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규정 없는
직위해제?

-함정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1961년생 직원의 경우 교육을 다녀오면 현업 복귀 없이 바로 전문위원으로 발령난다. 회사에서 이번 인사조치에 1961년생 직원을 포함시키면서 원래보다 공석이 늘어나게 됐다. 과거 전임 교수 출신 사장 때도 매년 조직개편을 통해 개방직을 만들면서 고위 간부자리를 외부인사로 채웠는데, 이번에도 여기서 늘어난 간부급 자리에 외부 낙하산 인사들을 앉히려는 건 아닌지 그런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 같은 의심이 들었다.

-내부 분위기는 어떤지.

대부분 침묵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장이 좀 심했다. 얼마 안 있으면 나갈 선배들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등의 반응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런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감·공포감에도 인사상 불이익이 걱정돼 침묵을 지키는 침울한 분위기다.

-현재 상황은 어떤지.

직위해제 상태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눈치도 보이고 미치겠다. ‘좌불안석이라는 말이 딱 맞다. 다른 직원들 보기에도 민망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결재자의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결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니 묘한 감정의 갈등을 겪고 있다. 몇몇 직원들은 다른 직원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길로 다니거나 점심시간에도 따로 식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낙하산 인사
의심 들어


-이번 인사조치서 가장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지금은 회사나 직원 모두에 매우 중요한 시기다. 11월부터 연말까지는 모든 부서에서 내년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세밀하게 다듬는 일을 한다. 고위급 간부는 부서 단위의 사업계획 관련 작업을 총괄한다. 회사는 이런 시기에 고위급 간부를 날려버린 상황이다.

-인사발령 이후 대응이 빨랐는데.

회사의 망신주기식 인사에 우리가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세용 사장이 회사의 인사규정과 고령자고용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전략을 짰다. 월요일(1125) ‘직위해제 인사폭거 조치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고, 같은 날 서울중앙지검에 인권침해, 명예훼손 혐의로 김세용 사장을 고소했다. 국가인권위원회, 노동위원회에도 제소했다.
 

-사측 반응은 어땠는지.

월요일에 발표한 성명서를 내부 게시판에 두 차례 정도 올렸는데 모두 삭제됐다. 회사에서 검찰 고소, 인권위 제소 상황을 알고서는 학연·지연·과거 근무 인연을 중심으로 이야기 좀 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전화 등을 통해 개별적으로 접촉하는 것 같다.

-1960년생 직원들은 내년이면 전문위원으로 가는데.

하루를 살아도 명예롭게 사는 게 중요하다. 인사를 대안도 없이 가볍게 처리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많은 직원들이 정년을 마치고 전문위원으로 가는 때가 되면 상당히 우울해한다. ‘뒷방 노인네신세가 됐다고 생각하는 직원도 많다. 그런데 회사는 군사작전 하듯이 기습적으로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일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고소로 법정공방 예고
“정말 서운하다” 격분

-이번 사태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면.

김세용 사장이 법을 위반하면서 정상을 비정상으로 만든 게 이번 사태의 원인이다. 원상복구 해야 한다. 직위해제 조치를 철회하고, 이로 인해 후생복지가 후퇴됐다면 모자람 없이 채워줘야 한다. 또 노사합의를 통해 재발방지 약속이 담긴 합의서를 만들어야 한다.

회사는 이번 간부직원 28명의 인사발령이 징벌성 직위해제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해당 간부직원의 인사기록에는 ‘2018.11.21. ○○○직을 면함이라는 기록이 남는다. 그렇지 않아도 먼저 퇴직한 선배들이 직급도 직위도 아닌 전문위원이라는 명칭이 경력증명서에 남아 재취업에 곤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징벌성 기록은 이후 족쇄가 될 수 있다.
 

▲ 박원순 서울시장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검찰 고소건이나 인권위, 노동위원회 제소건 모두 끝까지 진행할 생각이다. 회사 차원서 우리의 훼손된 명예를 회복해주지 않는다면 끝까지 가서 법적으로 명예를 회복하겠다.

-김세용 사장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학교서 학생을 대하는 듯한 태도로 회사를 운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기업서 30년 경력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무형의 자산이다. 학문의 이론적 무대와 기업의 현실적 무대는 다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수를 포용하고 소통하며 구성원들의 감정을 잘 읽어야 한다. 직원들이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조정자와 조력자의 역할을 잘해줬으면 한다.

“사장 역할
잘해주길”

A씨는 인터뷰 말미에 솔직히 정말 서운하다며 깊은 속내를 드러냈다. 이번에 인사조치를 당한 직원들의 평균 근속년수는 29~30. A씨도 몇 년의 하위직 공무원 생활 후 30년 가까이 SH공사에서만 일했다.

그는 이 회사에서 번 돈으로 부모님을 부양하고 처자식을 먹여 살렸다. 사실 회사에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하지만 잘못도 없는 우리에게 40일도 못 참고 비리, 갑질의 덫을 씌워 팽개친 공사에 실망감이 크다퇴사한 선배들이 회사 쪽으로 오줌도 누고 싶지 않다고 한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30년을 일한 직원에 대한 작은 예우조차 보여주지 못하는 회사에 평생을 바쳤다고 한탄했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SH공사 반응은?

SH공사 측은 검찰 고소나 국가인권위원회 제소건에 대해 조사가 들어오면 받을 것이라면서도 당연히 기각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달 26일에 낸 해명자료가 SH공사의 공식입장이라며 추가로 드릴 말씀은 없다고 전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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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