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6주년특집> <일요시사> 탄생한 1996년 ‘그땐 무슨 일이?’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2.05.25 16: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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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면 치고 받고 터뜨리고…바람 잘 날 없었다

[일요시사=김설아 기자] 화제와 특종에 강한 시사종합주간지 <일요시사>가 창간 16돌을 맞았다. 그리고 이제 어엿한 청년의 모습으로 독자들 앞에 다가섰다. 지난 1996년 5월15일 첫 신문 발행 이후 16년간은 정말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IMF사태, 정권교체, 남북정상회담,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등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일요시사>는 이런 역사적인 순간마다 현장을 지켜왔고, 독자들에게 보다 심층적이고 정확한 뉴스를 전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다.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아 창간 초심을 되돌아본다는 의미에서 1996년 당시 숱한 화제와 이슈들은 물론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사고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


<일요시사>가 갓 태어난 1996년은 ‘문민정부’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김영삼 정부 시절이었다. 당시 국내 사정은 IMF(국제통화기금) 목전이었던 탓에 수많은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등 온 나라가 곡소리로 가득했다. 이 와중에도 국민들을 경악케 한 굵직한 사건·사고들은 끊이지 않았다. 각종 이권이 개입된 메가톤급 권력형 비리가 연거푸 터지기도 했다.

사상 최초
‘여소야대’ 탈바꿈

16년 전 정치이슈는 뭐니 뭐니 해도 15대 총선이었다. 총선을 일주일 앞두고는 판문점 총격사건이 발생, ‘북풍’과 ‘세대교체’ 등 예상치 못한 사태가 선거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아무리 ‘변수’와 ‘이변’이 따라다니는 게 선거라지만 당시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정치파괴의 길’을 선택한 듯 보였다. 만년 야당도시였던 서울이 사상 최초로 여대야소 지대로 탈바꿈 했는가 하면, 내로라하는 정치거물들은 정치신인 돌풍에 휘말려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15대 총선결과 집권당인 신한국당이 과반수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서울 등 수도권에서 승리를 거둬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원내 안정 의석을 확보했다. 반면 새정치국민회의는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자민련은 약진세를 보여 정치권이 ‘3당’ 구조로 재편됐다.


특히 서울지역 절반이 넘는 곳에서 신한국당 후보가 당선돼 여당이 서울에서 승리하는 이변을 낳았다. ‘정치의 1번지’라 불리는 종로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4선의 이종찬 의원이 정치 초년병 이명박 후보에게 일격을 당해 충격을 던져주었다.

‘레임덕·부정부패·경제난’ 3중고 겹쳐 국기 흔들흔들
‘IMF 문전’ 서민들 피눈물 뚝뚝…방방곡곡 곡소리

전국적인 ‘세대교체’ 바람 또한 거셌다. 당시는 한보그룹이 부도나면서 드러난 권력형 금융 부정 비리에 수십 명의 정치인들과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까지 연루된 일명 ‘한보사태’가 불거졌던 시기다.

당시 탄생한 정치신인 수만 140명이었다. 당시 이종찬 의원이 이명박 후보에게 진 것도 휘몰아친 세대교체 바람 때문이었다. 15대 총선 당시 종로에서 결전을 벌였던 이들은 16년이 지난 현재 한 사람은 대통령으로 한사람은 야인으로 지내고 있다.

특히 당시 패자였던 이종찬 전 의원은 15대 총선이후 1997년 대통령인수위원회 위원장, 1998년 김대중정부 초대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하며 활발한 정치활동을 계속 했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다음 초야에 묻혀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정태수 ‘한보사태’
대한민국 ‘발칵’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신경제화와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1996년도에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회생시키겠다던 경제는 바닥 모를 추락을 거듭했다. 경상수지 적자가 220억 달러를 넘어섰고, 외채가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당시 암흑의 시대를 예고한 국내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의 줄도산은 한국경제를 한순간에 몰락시켰다. ‘대우그룹, 쌍용그룹, 동아그룹, 삼미그룹, 진로그룹, 해태그룹…’ 당시 기업의 도산과 감량경영으로 실업자가 40만 명에 육박했다. 한국경제 파탄의 서곡을 알린 기업이 바로 한보그룹이다.

1996년 재계서열 14위였던 한보그룹은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다 결국 이듬해 1월 최종 부도처리 됐다. 이는 대기업들의 연쇄부도로 이어졌고, 한국경제의 파탄을 불러온 IMF 도화선이 됐다. 한보그룹의 부도액은 국내 부도사상 최대 금액인 1조원을 넘어 전 국민을 경악케 했다.

특히 부도과정에서 5조7000억 원에 달하는 특혜 대출 비리가 드러나 온 나라가 술렁거렸다. 권력형 금융스캔들엔 정계와 관계, 금융계 등 핵심 인사들이 연루돼 충격을 더했다. 건국 이래 초유의 금융비리 사건으로 기록된 이른바 한보사태의 주역이 바로 정태수씨다.

한보그룹 오너였던 정씨는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1976년 그룹을 창업했다. 23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접고 52세란 적잖은 나이에 무일푼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분양에 성공한 자금으로 그룹 몸집을 불려 신흥재벌로 급부상했다.

한보그룹은 문민정부 시절 급성장했는데, 정씨의 강력한 로비력으로 일군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이 도약의 디딤돌이었다. 그러나 정씨의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올해 89세인 정씨는 비리 혐의로 법정과 감방을 들락거렸다. 재계 총수 가운데 가장 많이 법원을 드나든 불명예를 안고 있다.

한편, 그해 12월 우리나라는 29번째로 OECD회원국이 됐다. 당시 국민들은 ‘우리나라도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닌 선진국’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사전 대비책도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회원국 가입 추진은 오히려 독이 됐다. 외환자유화를 취하고 나니 해외여행과 해외유학이 급증하고, 사치성 소비재 수입과 과소비 등으로 경상수지 적자폭은 급증했으며 외환보유고는 급감했다. 그렇게 ‘IMF의 망령’이 서서히 다가왔다.

미모의 로비스트
‘린다 김’ 파장

당시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다. 부정부패와 사회기강 해이는 말할 것도 없다. 장학로사건, 이양호사건, 안경사협회사건 등이 문민정부의 도덕성을 뿌리째 흔들었고 은행장비리, 서울시버스비리, 공정거래위비리 등 굵직한 부정에다 나열하기조차 어려운 수많은 비리가 날마다 줄을 이었다. 여기에 미모의 여성 로비스트 ‘린다김’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으며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무기 로비스트로 활동하던 린다김 로비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국방부 장관 등 정부 고위인사들이 백두사업 등의 무기도입 과정에서 린다김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다.

백두사업은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왔던 대북정보 수집능력을 독자적으로 갖추자는 목적에서 1991년부터 추진한 통신감청용 정찰기 도입사업이다. 첨단 전자정보장비를 갖춘 정찰기가 한반도 전역의 음성통신을 감청하고 신호정보를 분석하는 것으로 이는 정찰기에 영상레이더 장치를 실어 평양 이남의 축구공만한 물체까지 촬영, 식별하는 금강사업과 맞물려 있다.

문제는 약 2200억 원이 소요되는 대형 국방프로젝트에 린다김을 고용한 미국의 E-시스템사가 응찰업체 가운데 가장 비싼 가격을 제시했음에도 2개월 뒤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경쟁업체를 물리치고 최종 사업자로 선정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탈락한 업체들이 의혹을 제기하며 반발했고, 실제 최종사업자를 선정하기 3개월 전 당시 이양호 국방부 장관이 정종책 환경부 장관의 소개로 린다김을 만난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린다김은 국방부 장관 등 국내 고위급 인사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 촉망받던 ‘여성로비스트’에서 ‘섹스스캔들’ 주인공으로 전락했다.

같은 해 9월18일에는 북한 특수부대가 상어급 잠수함을 이용해 강릉으로 넘어온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새벽 1시30분경 택시기사가 강릉 대포동 앞바다에 좌초된 북한 잠수정을 발견하고 신고함으로써 드러났다.

당시 26명의 무장공비가 침투되어 신고 후 15시간 만에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날 밤에 달아난 나머지 간첩 8명이 분산 도주하면서 민가식량을 약탈하고 우리 군과 교전을 벌이는 등 긴장이 지속되었다.

줄도산, 권력형 비리 등 초대형 사건·사고 잇달아
말 많고, 탈 많았던 연예계의 슬픈 자화상 ‘침통’
 

그 가운데 잠수함이 좌초된 곳으로부터 서남방 5km지점인 청학산 중턱에서 무장간첩 11명이 숨져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숨진 간첩들은 모두 머리에 관통상을 입은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침투당시 무장공비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광수를 잡아 자세한 침투경로와 작전수행 목적 등 알아냈다. 또 다른 무장공비 한명은 행방이 묘연해 북한으로 도주한 것으로 결정짓고 사건은 종결됐다.

당시 우리군의 피해로는 군인 11명, 경찰 1명, 예비군 1명, 민간인 4명이 희생되는 인명피해를 당했고 엄청난 재산피해와 국가기밀 등 정보들이 북한으로 흘러나갔다. 이 사건은 현 정부에 들어서 많이 경색된 남-북 관계가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과거 본보기 사건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잇따른 자살과 은퇴

연예계 ‘쇼크’

1996년에는 연예계도 다사다난했다. 각종 사건 사고로 세상을 등진 스타들의 슬픈 소식으로 얼룩졌다. 그해 1월은 여느 해와는 사뭇 다른 소식이 한해의 출발을 알렸는데, 미소년의 외모로 10대 소녀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틴 아이돌 가수 서지원이 자살했다.

95년 데뷔해 1집 타이틀곡 ‘또 다른 시작’으로 이름을 알리며 스타로 발돋움한 서지원은 1월1일 유서를 남긴 채 약물 과다복용으로 팬들 곁을 영원히 떠났다.

서지원은 일기장을 통해 “2집 앨범 녹음을 끝내고 활동을 앞둔 나는 더 이상 자신도 없고 군대도 가야하며 사무실 운영과 가족들을 책임지기에도 너무 벅차다. 내가 죽은 뒤에라도 홍보를 잘해 2집 앨범을 성공시켜 주기를 바란다”고 힘든 심경을 토로했다.

아직 어린 나이에 2집을 성공시켜 많은 사람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은 그에게 너무도 과중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이혼을 겪는 등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던 서지원은 소속사와 부모님의 기대감을 이기지 못하고 1996년 1월1일 2집 발표를 앞두고 자살로 세상을 마감했다.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 ‘일어나’, ‘사랑했지만’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90년대 많은 이의 가슴을 적셨던 김광석이 96년 1월6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아픔이 묻어나는 김광석의 애절한 목소리만큼이나 슬픈 결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아직까지도 많은 가수들에게 리메이크되며 사랑받고 있으며 우리는 여전히 그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한다.

두 가수를 떠나보낸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22일, 10대들의 우상이었던 서태지가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갑작스러운 은퇴선언에 팬들은 물론 사회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당시 전국의 팬들이 서태지의 집 앞에 몰려와 장사진을 이뤘고 기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쉴 새 없이 우는 사람, 자살하겠다는 사람 등으로 전국이 연일 들썩였다.


서태지는 한국 가요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당시 한국 가요계에 처음으로 선보인 ‘랩 댄스곡’ 풍의 데뷔곡 ‘난 알아요’로 당시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현란한 안무를 선보이며 혜성같이 등장해 큰 인기를 모았다. 이러한 인기에 서태지에게는 ‘10대들의 대통령’ ‘X세대 문화의 상징’ 등 수 없이 많은 수식어가 붙여졌다. 하지만 4년 뒤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해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지난해에는 탤런트 이지아와 부부였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들은 메가톤급 충격을 안겨줬다. 이 사건으로 서태지는 여배우 염문설, 10억+α설 등의 각종 루머에 휩싸이기도 해 지금껏 ‘신비주의’로 쌓아왔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는 서태지는 현재 9집 앨범을 준비 중이다.

한편, 잇따른 충격소식에 고달픈 와중에도 가수 영턱스 클럽의 히트곡 ‘정’은 1996년 최고의 히트곡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외 엄정화, 김원준, 클론, 김민종 등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추첨을 통해 선정된 팬들이 연예인들과 일주일동안 지내는 <TV데이트>라는 프로그램은 예능프로그램의 독특한 소재로 많은 관심 받기도 했다.

또 1996년은 에로동영상 대중화의 시작을 알린 해이기도 했다. <젖소부인 바람났네>라는 영화가 1996년 등장하자 <만두부인 속 터졌네>, <꽈배기부인 몸 풀렸네>, <연필부인 흑심 품었네> 등 유사 비디오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 사이의 패러디가 유행한 것은 물론이다. 이를테면 명작영화 <은행나무 침대>가 극장 상영을 마치면 <은행나무 침대방>이 에로물로 등장하는 식의 ‘유사품 동영상 시리즈 출시’ 붐이 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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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전국 한의과대학교에는 ‘졸업준비위원회’가 존재한다. 말 그대로 졸업 준비를 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명목상 자발적인 가입을 독려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로 가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졸업준비위원회(이하 졸준위)는 졸업앨범 촬영, 실습 준비, 학번 일정 조율, 학사 일정과 실습 공지, 단체 일정뿐 아니라 국가시험(이하 국시) 대비를 위한 각종 자료 배포를 하고 있다. 매 대학 한의대마다 졸준위는 거의 필수적인 조직이 됐다. 졸준위는 ‘전국한의과대학졸업준비협의체(이하 전졸협)’라는 상위 조직이 존재한다. 자료 독점 전졸협은 각 한의대 졸업준비위원장(이하 졸장)의 연합체로 구성돼있으며, 매년 국시 대비 자료집을 제작해 졸준위에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의텐’ ‘의지’ ‘의맥’ ‘의련’ 등으로 불리는 자료집들이다. 실제 한의대 학생들에게는 ‘국시 준비의 필수 자료’로 통한다. 국시 100일 전에는 ‘의텐’만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졸준위가 없으면 국시 준비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말이 정설이다. 한의계 국시는 직전 1개년의 시험 문제만 공개되기 때문에 시험 대비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시 문제는 오직 졸준위를 통해서만 5개년분 열람이 가능할뿐더러, 이 자료집은 공개자료가 아니라서 학생이 직접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실상 전졸협이 자료들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자료집을 얻을 수 있는 경로는 단 하나, 졸준위를 결성하는 것이다. 졸준위가 학생들의 투표로 결성되면 전졸협이 졸준위에 문제집을 제공한다. 이 체계는 오랫동안 유지돼왔고, 학생들도 졸준위를 통해 시험 자료를 제공 받는 것이 ‘관행’처럼 받아들여왔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반드시 결성돼야만 한다는 기조가 강하다. 학생들의 반대로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시 전졸협은 해당 학교에 문제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은 모든 학생들의 가입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졸준위 가입 여부는 실질적으로 선택이 아니다. 자료집은 전졸협을 통해서만 제공되기 때문에, 졸준위에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이 학생들 사이에서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학생들은 “문제를 얻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경우 현실적으로 문제집을 받아볼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학생들의 해당 학년 학생들을 모두 가입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실제 한 대학교에서는 졸준위 결성을 위한 투표를 진행했는데 익명도 아닌 실명 투표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진행했지만 반대자가 나오자 실명 투표로 전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반대 의견이 나오기 어렵다. 실명으로 투표가 진행되는 데다, 반대표를 던질 경우 이후 자료 배포·학년 일정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 실명 투표로 진행 가입시 200만원 이상 납부 필수 문제는 이 졸준위 가입이 무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졸준위에 가입하면 졸업 준비 비용(이하 졸비)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돈을 걷는데, 그 비용이 상당하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한 대학교의 졸비는 3차에 걸쳐 납부하도록 했는데 1차에 75만원, 2차에 80만원, 3차에 77만원 등 총 232만원 수준이었다. 이는 한 학기 등록금에 맞먹는 금액이다. 금액 산정 방식은 졸준위 가입 학생 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한 명이라도 빠지게 되면 나머지 인원의 비용 부담이 커지게 된다. 심지어 2명 이상 탈퇴하게 된다면 졸준위가 무산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사안은 ‘졸장’의 주도 하에 움직인다. 졸장은 학년 전체를 대변하며 전졸협과 직접 소통하는 역할을 맡는다. 실제 졸장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한 명이라도 탈퇴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이 오갔을 정도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졸준위가 결성되면 가입한 모든 학생들은 졸준위의 통제를 받는다.<일요시사>가 입수한 한 학교의 규칙문에 따르면 졸준위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었다. ▲출석 시간(8시49분59초까지 착석 등) ▲교수·레지던트에게 개인 연락 금지 ▲지각·결석 시 벌금 ▲회의·행사 참여 의무 ▲병결·생리 결 확인 절차 ▲전자기기 사용 제한 ▲비대면 수업 접속 규칙 ▲시험 기간 행동 규칙 ▲기출·족보 자료 관리 규정 등이다. 학생들이 이 규정을 어길 시 졸준위는 ‘벌금’을 부과해 통제하고 있었다. 금액도 적지 않았다. 규정 위반 시 벌금 2만원에서 50만원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병결이다. 졸준위는 병결을 인정하기 위해 학생에게 진단서 제출을 요구하고, 그 내용(질병명·진료 소견·감염 여부 등)을 직접 열람해 판단했다. 제출 병원에 따라 병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지도 있었다. 한 병원의 진단서가 획일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단체가 학생의 개인 의료 정보를 열람해 병결 여부를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은 학생들 사이에서 부담과 압박으로 작용했다. 질병이 있어도 벌금이 부과될 수 있고, 병결을 얻기 위한 절차가 학습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나왔다. 규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졸준위는 대면 면담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3:1로 면담을 진행하는 등 학생이 위축될 수 있는 방식을 행하기도 했다. 전자기기 사용 불가 규칙 어기면 벌금도 이 같은 문제로 탈퇴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실제 A 대학 졸준위 전체 학번 회의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한 학생은 규정에 문제를 느껴 졸준위 측에 탈퇴를 의사를 밝혀왔다. 이 회의에서는 그간 탈퇴 의사를 밝힌 학생과의 카톡 대화 전문이 학생들에게 공개됐다. 공개된 카톡 내용에는 탈퇴 과정이 담겨있었는데 순탄하지 않았다. 졸준위 측은 탈퇴 의사를 즉각적으로 승인하지 않았고, 재고를 요청하거나 면담하는 방식으로 요청을 지연했다. 해당 학생이 다시 한번 탈퇴 의사를 명확히 밝힌 뒤에도, 졸장은 “만나서 얘기하자”며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 대화를 공개한 뒤 학우들에게 ‘졸준위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서약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졸준위 운영이 조직 이탈 자체를 문제로 판단하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압박을 가한 정황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해당 학우는 탈퇴 확인 및 권리 포기 동의서에 서명한 뒤에야 졸준위를 탈퇴할 수 있었다. 탈퇴 이후에도 갈등은 지속됐다. 목격자에 따르면 시험 기간 중, 강의실 앞을 지나던 탈퇴 학생은 졸준위 임원 두 명에게 “제보가 들어왔다”며 불려 세워졌다. 임원들은 이 학생이 학습 플랫폼 ‘퀴즐렛’을 사용한 점을 언급하며, 그 자료 안에 졸준위에서 배포한 기출문제가 포함돼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졸준위에서는 퀴즐렛에 학교 시험 내용이 있다며 탈퇴자가 보지 못하도록 사용자를 색출하기도 했다. 한편, 전졸협은 10년 전 자체 제작한 문제집으로 논란된 적이 있다. 당시 한의사 국가고시 시험문제가 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예상 문제집과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시험이 끝난 직후 시험장 앞에서 수험생 60여명을 상대로 참고서와 문제집을 압수했고, 국가시험원까지 압수수색해 기출문제와 대조 작업에 들어갔다. 기형적 구조 문제가 된 교재는 ‘의맥’ ‘의련’ 등 졸준위 연합체인 전졸협이 제작·배포해 온 자료들이다. 학생들은 교재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신분증을 확인한 후 배포하는 등 통제된 방식으로 유통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는 “학생들이 전졸협을 통해서만 기출문제를 구할 수 있는 구조는 기형적”이라며 “국가고시를 위해 몇백만원씩 돈을 받고 문제를 제공하는 건 문제를 사고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