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9>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골프를 전파하라

15세기 최초로 올드코스가 생긴 이후 스코틀랜드 동쪽 해안 지대를 기준으로 북으로는 몬트로즈(MONTROSE)에서 서쪽의 퍼스(PERTH)까지 곳곳에 골프코스가 만들어졌다. 심지어 스코틀랜드 최북단인 오크니섬(ORKNEY ISLAND)에도 골프장이 생겼다.

교회의 뒷마당과 뜰은 모두 골프코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잉글랜드에는 1608년 런던에서 15㎞ 떨어진 교외인 블랙히스(BLACK HEITH)에 7홀 짜리 코스가 만들어진 이후 17세기 중순부터 영국 전역에 골프장이 유행처럼 세워지기 시작한다. 

동우회

18세기 무렵에는 100여군데가 넘었고, 골프 동우회만도 1000여개를 헤아릴 정도였다. 골프장 건설은 당시 영국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1602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통일을 이루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여왕이 외아들로 스코틀랜드 제임스6세를 두었는데, 마침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1세는 독신으로 자녀가 없었다. 이에 두 나라는 제임스6세를 통일 영국의 제임스 1세로 칭했고 그는 두 나라를 동시에 다스렸던 것이다.

엘리자베스여왕은 메리여왕을 죽였지만 메리의 아들을 후계자로 인정하면서 수백 년 분단의 종지부를 찍는 업적을 이루었다. 제임스1세도 골프를 장려했고, 전쟁의 걱정에서 사라진 국민들도 앞다투어 골프에 눈을 돌렸다.

“국가와 결혼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에 이미 최강의 해상국가가 된 대영제국은 세계 각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골프는 시대 상황에 동승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스포츠로, 세계로 뻗어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영국 내 스포츠

영국인들은 바다를 누비면서 이제는 식민지마다 골프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중 역사적인 최대의 공헌은 미국으로 향한 노력이었다. 17세기부터 신대륙 미국으로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골프도 함께 이주됐다. 골프가 미국으로 이동한 것과 기타 제3국으로 이동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제3국의 골프장 건설은 식민지에 국한된 것이었던 반면, 미국으로의 이동은 골프의 무대를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시키는 ‘골프 역사에서의 대륙 이동’이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생겨난 프로들은 대다수가 클럽과 골프볼 제조업자들 그리고 캐디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선두에서 골프를 이끌어 나갔고, 골퍼는 아마추어와 프로로 나뉘기 시작했다. 왕족과 귀족 등 상류층 골퍼들은 아마추어로 분류됐다. 영국 사람들은 그저 골프를 치는 수준에서 벗어나 선수들의 프로필을 교환하고, 골프에 대한 지식들을 넓혀가면서 골프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근대 골프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해리 바든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문턱에서 영국과 미국을 넘나들면서 골프 외교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위대한 영국 3인방 중 다른 2명인 제임스 블레이드와 존 타일러 역시 골프가 미국에 정착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장본인들이었다.

영국은 5대양 6대주에 발만 붙이면 골프장을 건설했다. 식민지 정책을 위해 부임한 영국관리 등에 의해 골프장이 자연스럽게 세워진 것이다. 이유는 당연했다. 해외에서 유일한 놀이였던 골프를 치기 위해 세계 곳곳에 골프장을 직접 짓기 시작한 것이었다. 빅토리아 왕조 당시 전 세계의 대륙 중 4분의 1이 영국령이었으니, 세계 도처에 골프장이 건설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1829년 최초의 해외 골프장이 인도에 세워졌다. 인도 남부의 콜카타(KOLKATA)지역에 세워진 로얄 캘커타 골프코스에 이어 1942년 봄베이에 로얄 봄베이(ROYAL BOMBAY)골프장이 지어졌다. 1939년에는 호주 대륙남단의 타스마니아 섬에 6홀짜리 보스웰(BOSWELL) 클럽이 세워졌다. 뉴질랜드에는 1869년 오타고(OTAGO) 골프클럽이 만들어졌으며 인도네시아에는 1872년에 자카르타(JAKARTA) 골프장이 세워졌다.

500년 전통 섬 스포츠
어떻게 세계로 보급했나


1873년에는 북미 대륙 최초로 캐나다에 로얄 몬트리올(ROYAL MONTREAL) 클럽이 만들어졌다. 1885년에는 말레이지아에 타이펭 골프코스가 생겼으며 1889년에는 스리랑카와 홍콩에도 골프장이 생겼다. 

영국은 아프리카 대륙에도 발을 뻗었다. 188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로얄 케이프(ROYAL CAPE)클럽이 세워졌다. 짐바브웨를 비롯한 10여곳의 아프리카 내륙 국가에도 역시 골프장이 들어섰다. 

영국의 해상 진출은 극동 지역에도 미쳤다. 한국도 예외일 순 없었다. 그들은 1899년 원산 항구내 세관 구역에다 6홀 짜리 골프장을 지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골프장이었다. 일본은 이보다 한해 늦은 1900년에 세워졌다.

해상국가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영국은 종주국으로서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특히 1887년 대서양을 가로 질러 미국으로의 대륙이동은 골프 역사의 중대 전환점이었다.

미국에서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이르는 150여 년간의 중흥기를 맞이할 준비 작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섬나라에만 존재했던 골프가 어떻게 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었는지의 물음에 대한 답은 강력한 해상 국가였던 영국이 바다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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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