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오롯이 ‘나라 위해 사는’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

끊임없는 도전, 그리고 응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으로 점철돼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서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응전이 인간 사회의 문명과 역사를 발전시키는 바탕이 된다고 했다. 개인도 안팎서 덮쳐오는 도전을 극복할 때마다 성장한다.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은 도전과 응전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평생을 바쳤다.
 

<일요시사>는 지난 4일, 서울 여의도의 4·19혁명 UN·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사무실서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을 만났다. 김 전 장관은 인터뷰서 “도전과 응전, 신앙, 약자, 역사, 초심”이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했다. 그의 삶이 응축된 표현이다. 국회의원, 농림부장관, 대학 석좌교수, 재단 이사장, 기념사업회 위원장 등 김 전 장관은 세상의 부름에 답하지 않은 적이 없다.

빈농의 아들
학비없어 고생

“빈직다사(貧職多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김 전 장관은 최근 근황을 묻는 질문에 ‘빈직다사’라고 했다. 직책이 대단치 않지만 일은 바쁘다는 뜻이다. 김 전 장관은 현재 광주대학교 석좌교수, 사단법인 국제사랑재단 대표회장, 사단법인 5·18광주민주화운동/4·19혁명/3·1운동 UN·유네스코 등재 및 아카이브센터 이사장, 사단법인 사랑의 쌀나눔본부 상임대표 등 10여개의 직책을 맡고 있다. 

야인이 되기 전에는 5선 국회의원, 농림부 장관 등의 화려한 명패가 그를 수식했다.


1946년 11월17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장남이었던 그가 네 동생의 학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우체국 사환으로 1년간 일하며 학비를 벌어 이듬해 강진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공부의 꿈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뤄졌다. 가난의 기억은 평생 그가 소외된 사람들에게 헌신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에 입성할 때 다짐한 게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의회 선교의 작은 심부름꾼이 되겠다, 날 닮은 농민과 소외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성심을 쏟겠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명백히 규명하겠다,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김 전 장관은 1988년 4·26총선서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전남 강진·완도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의 국회 입성 과정은 광주서 시작됐다. 1980년 5월 광주는 핏빛으로 물들었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이 과정서 희생이 잇따랐다. 계엄군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민을 상대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자식 잃은 부모들이 통곡했고 부모를 여읜 아이들은 울부짖었다. 하지만 1981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 추모식은 진행되지 못했다. 유족들은 집에서도 제사를 지내지 못해 다른 지역의 사찰로 도망치듯 떠났다가 2∼3일 후 숨죽여 돌아왔다. 그만큼 냉혹한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회장이던 김 전 장관은 전남도청 앞 YMCA서 5·18광주민주화운동 2주기 추모예배를 계획했다. 그는 추모예배 당일까지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후배 집, 교회, 사찰 등을 전전했다.

그가 붙들리면 추모예배는 영락없이 실패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2000명이 운집한 추모예배에 나타난 김 전 장관은 “광주의 죄 없는 양민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을 처단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후 그는 투옥됐다.


민주화운동
두 번 투옥

두 번째 구속은 야간통행 금지제도 해제 운동 때문이다. 1980년 초에는 밤 12시부터 오전 4시까지 4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돌아다닐 수 없었다. 종교활동은 물론이고 생계와 직결되는 논이나 밭에 문제가 생겨도 나갔다가 붙들리면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인권 의식이 바닥을 치던 때였다.

“야간통행 금지제도는 농민의 생존권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습니다. 반드시 없어져야 할 제도였습니다.”

1980년대부터 농가에 비닐하우스 재배가 퍼졌다. 문제는 비닐하우스가 자연재해에 약하다는 점이었다. 눈이 오면 쓸어내고 바람이 불면 붙잡아야 했다. 제때 그러지 못하면 비닐하우스가 주저앉거나 날아가 한 해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김 전 장관이 재해대책피해 관련 법안을 발의하기 전까지 피해는 오롯이 농가의 몫이었다.

또 그는 언제, 어디서든 종교의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야간통행 금지제도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전 장관은 3페이지 분량의 청원서를 만들어 교회 등에서 강연하고 국회우체국을 통해 국회의장에게 1000통가량을 보내는 등 운동을 지속했다. 

계엄사령부는 그런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김 전 장관은 입에 재갈이 물리고 눈에 딱지를 붙인 채 기절해 광주 계엄사 분실에 끌려갔다.

그는 발가벗겨진 채 2.3㎡(0.7평) 크기의 방에서 눈을 떴다. 계엄사령부는 그에게 통금 해제 운동의 배후를 물었다. 김 전 장관은 “자금을 받은 일도 없고 배후도 없다”고 반복해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백열등은 머리 위에서 작열하고 두들겨 맞고 대화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김 전 장관은 당시 말 그대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고 토로했다.

그때 김 전 장관의 귓가에 찬송가가 들렸다. 그의 어머니가 교인들을 이끌고 분실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던 것이다. 농민들도 합세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노랫소리는 높아졌다. 계엄사령부는 김 전 장관에게 ‘분실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않고, 통금 해지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김 전 장관은 이를 거절했다. 분실 앞을 찾는 지역 농민의 수가 점차 불어나자 계엄사령부는 그를 무죄 방면하기에 이른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평생
세상이 부르면 “나는 간다”

“신앙으로 훈련된 일꾼, 약자인 농민이나 서민들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게 제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김 전 장관이 계엄사령부에 끌려가 한 저항은 빠른 속도로 지역 사회에 퍼져 나갔다. 다시 일터로 돌아간 그는 어느 날 지역 농민 대표, 교인 대표 등의 방문을 받는다. 이들은 믿을 만한 사람을 한 명 뽑아서 국회로 보내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말하는지 몰랐던 김 전 장관은 신협 조합원들과 함께 동참하겠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지역 대표들이 자신을 지목했을 때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저는 한 번도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기도해 본 적 없었습니다. 저는 못 합니다.”

그러나 지역 대표들은 거듭 김 전 장관을 찾아왔다. 그는 고민 끝에 출마를 결심했다. 당시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의 공천을 받아 그는 전남에 출마했다. 그의 상대는 전두환·노태우씨의 육사 11기 동기였고, 재선 국회의원인 민주정의당 김식 전 의원이었다. 모두 상대가 너무 강하다고 했지만 개표함을 열어보니 김 전 장관의 승리였다. 
 

호남 출신 고졸 정치인의 등장이었다.

김 전 장관의 초선 시절 활약은 엄청났다. 그는 13대 국회서 부활한 국정감사의 스타였고,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을 위한 ‘광주청문회’서 활약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이해찬 전 총리가 김 전 장관과 함께 광주청문회서 활약했다. 김 전 장관은 저수지서 멱을 감다 총에 맞은 소년들의 사진을 내밀며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노무현과
청문회 스타

1980년 5월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이후 1988년 청문회가 열릴 때까지 광주는 폭도들의 도시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였다. 계엄군에 저항하다 사망한 시민들이 묻힌 망월동은 저주의 땅으로 불렸고 사람들은 그곳에 침을 뱉었다. 광주청문회는 국회의 정부 비판과 견제, 감시 기능을 되살리고 정의를 확립하는 기점이 됐다.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도전을 받게 마련입니다. 정치를 하는 동안 제게 찾아왔던 큰 도전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었습니다.”

그는 초선부터 14대, 15대, 17대까지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이하 농수산 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일반적으로 2년에 1번, 전반기와 후반기 상임위를 바꿀 수 있음에도 김 전 장관은 4선을 하는 동안 농수산 위원회에만 있었다. 

상임위를 정할 때 원내대표실에 희망 상임위를 3개 적어 내는데, 그의 1∼3지망은 늘 농수산위원회였다.

그가 농수산 위원회서 활약할 때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문제가 불거졌다. 협상의 핵심 쟁점은 쌀 시장 개방이었다. 총 농민의 90%가 쌀이라는 단일품목에 생계를 걸고 있던 때였다. 쌀 시장 개방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김 전 장관은 스위스 제네바로 넘어갔다. 

그는 한글과 영어로 ‘미국은 람보식 수입 개방 압력을 당장 중단하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거세게 항의했다.

김 전 장관은 미국 대표를 붙들고 대화를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자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때 나온 방법이 삭발식과 단식 투쟁이다. 그는 머리를 밀고 물과 소금만으로 15일을 버텼다. CNN, NHK 등 외신을 통해 김 전 장관의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농민들이 제네바로 날아와 그에게 힘을 보탰다. 

통역을 위해 제네바에 온 장정애씨도 함께 머리를 밀고 김 전 장관의 곁에 앉았다.

한국서 온 국회의원이 머리를 깎고 단식투쟁을 하는 모습은 국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 전 장관의 행동은 각국 의원들이 모여 만든 연맹의 저항으로 발전했다. 

김 전 장관은 NHK 등 외신과의 인터뷰서 “한국과 제3세계 농민의 생존권을 짓밟는 협상은 인류 공영과 세계 평화라는 UN의 지상 목표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투쟁의 결과는 한국의 쌀 관세화 유예조치로 나타났다.

“어느 날인가 보좌관이 코앞에 봉투를 들이 밀었습니다. 생선 냄새가 강하게 올라왔습니다. 제 지역구 완도군 어민이 생선을 잡아다 판 돈 중 3000원을 봉투에 넣어 후원금으로 낸 겁니다. 물고기 잡는 어민이 저한테 의정활동 잘하라고 격려 차원서 보내주신 돈이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농수산 위원회 외길을 걸었던 김 전 장관은 2003년 노무현정부서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발탁됐다. 노 전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은 민주화 운동 동지이자 ‘야자 트는’ 친구 사이였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당시 제네바서 단식투쟁을 하던 김 전 장관에게 노 전 대통령은 수차례 전화로 응원을 전했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농림부장관 재직 당시 노 전 대통령에게 “북한 어린이들은 피골이 상접해 있다. 3∼4세 때 영양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설령 성인이 된다 해도 인간 구실을 못한다”며 북한에 쌀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반대가 있긴 했지만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쌀 300만석이 북한으로 전달됐다.

약자 보듬고 역사 관심
소외된 사람들에 헌신

“새만금 사업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국민적 합의가 도출된 국책사업이었습니다. 그런 대형 사업이 법원의 결정으로 중단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주무장관인 제가 나서야 했습니다.”

김 전 장관의 장관 재임 기간은 채 5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법원서 새만금 사업 중단을 결정하자 이에 항의하는 뜻에서 사퇴를 결심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에게 사퇴 의사를 철회하라고 권고했지만 김 전 장관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관직서 물러난 그는 새만금 친환경개발 범국민협의회를 만들어 활동을 이어 나갔다. 대법원은 2006년 새만금 사업의 ‘계속 추진’ 판결을 내렸다.
 

5선 국회의원과 장관직을 뒤로 한 김 전 장관이 최근 몰두하고 있는 것은 북한 어린이 돕기 운동과 5·18 광주민주화운동/4·19혁명/3·1운동 UN·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추진이다. 

대표회장을 맡고 있는 국제사랑재단은 그가 농림부장관 재직 당시 쌀 북송과 궤를 같이 한다. 북한 아이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도를 하면서 가족 단위별로 한 끼를 금식하고, 그 금액을 모아 이유식이나 분유, 빵 등을 구입해 북한으로 보내는 것. 올해로 11회째를 맞았다.

김 전 장관의 기록유산 유네스코 등록 추진 여정은 2008년 18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이하 교육위원회)서 시작됐다. 광주 서구을서 당선된 그는 상임위를 교육위원회로 정했다. 

지역구 여론조사 결과 지지자들이 그가 교육위원회서 활동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아태지역 국회 교육위원 야당 중진 자격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찾았다가 유네스코 등재 기록유산에 한국 관련 자료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5·18광주민주화운동, 4·19혁명, 3·1운동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돼있지 않다는 사실에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청조차 돼있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는 2년에 한 번 각국서 들어온 자료를 검토해 선정한다. 그는 고심 끝에 가장 최근에 일어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먼저 등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광주시민들에게 당시의 자료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 결과 수만 점의 자료가 모였다.

“광주여고 1학년 주소연양이 쓴 일기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닙니다. 저는 엄마, 아빠, 오빠들과 함께 인간 띠를 만들어 밤새 광주은행을 지켰습니다.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닙니다’ 그 일기장 끝부분에 눈물자국이 배어 있습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유산 등재를 반대하던 나라도 주소연양의 일기 구절에 마음을 돌렸다. 현재 4·19혁명은 영문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 전 장관은 4·19혁명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되면 5·18광주민주화운동처럼 아카이브를 크게 만들어 국민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우리 역사를 알리고 싶다고 포부를 드러냈다. 

3·1운동까지 기록유산에 등재되면 그가 생각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3대 민족민주화평화운동이 모두 유네스코에 올라가는 셈이다.

기록유산 등재
3·1운동까지

평생 신앙과 약자 그리고 역사라는 세 가지 초심을 지키며 살아온 김 전 장관의 목표는 소박했지만 여전히 사회의 부름에 목말라 있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뭐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전혀 없습니다. 그저 앞으로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사회가 저를 부를 때 어디든지 가서 어떤 역할이든 감당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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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의문 해소 첫 단추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