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데뷔 50주년’ 조용필

반세기 감동 선사 ‘영원한 가왕’

[일요시사 취재1팀] 박호민 기자 = ‘가왕’(가요계의 제왕) 조용필이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국민들은 그와 함께 울고 웃었다. 그는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 이는 곧 고스란히 국내 가요계의 역사가 됐다. 반세기 동안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그의 활동 발자취를 확인했다.
 

“영미권 음악을 비틀즈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누듯 한국의 대중음악은 조용필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눌 수 있다” (임진모 평론가)

“아이돌적인 인기와 아티스트적인 위상을 거의 처음으로 한꺼번에 거머쥐었던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 사실 한국서 가능한 음악적인 실험을 거의 다 한 인물” (이무원 평론가)

콘서트 따라
지하철 변동

조용필은 국내 가요 역사서 제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줄여서 가왕 조용필. 그런 그가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조용필은 1950년 3월21일 경기도 화성서 7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했다. 

화성서 염전업을 하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면서 화성 최고의 부잣집 막내아들로 나고 자랐다. 


별다른 금전적인 고민은 없었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와는 잘 맞지 않았다. 아버지는 큰형을 데리고 사냥을 즐겨 나가곤 했는데 그때 어린 조용필은 하모니카를 불고 놀았다. 이런 모습을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았다. 

음악을 사랑했던 청년 조용필은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고교 2학년 때 가출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는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8년부터 록그룹 애트킨즈로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그의 음악인생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그는 기라성 같은 가수를 배출해낸 미8군의 마지막 가수로 기억됐다. 

조용필은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한 뒤 1980년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이 수록된 1집으로 국내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가왕 탄생의 서막을 연 셈. 

눈길을 끄는 것은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조용필이 처음 부른 노래가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다른 가수들이 발표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못 받다가 조용필의 목소리가 얹어지면서 국민가요가 됐다. 이후 그는 수많은 히트곡을 부르면서 가왕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대표곡으로는 ‘고독한 Runner’ ‘고추잠자리’ ‘그 겨울의 찻집’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그대여’ ‘기다리는 아픔’ ‘꿈’ ‘나는 너 좋아’ ‘눈물의 파티’ ‘내 이름은 구름이여’ ‘단발머리’ ‘돌아오지 않는 강’ ‘마도요’ ‘모나리자’ ‘못 찾겠다 꾀꼬리’ ‘미워미워미워’ ‘미지의 세계’ ‘바운스’ ‘서울 서울 서울’ ‘어제, 오늘, 그리고’ ‘여행을 떠나요’ 등으로 한 번 언급하기에도 숨이 차다. 

세종문화회관서 그의 히트곡을 부른 적이 있었는데 한 번 부르는 데만도 이틀이 걸렸다는 일화는 팬들 사이서 두고두고 회자된다.


1968년부터 활동 미8군서 음악인생
숱한 히트곡으로 국민들 울고 웃어

조용필은 후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풍운아 이미지의 신해철은 조용필의 전화를 받자마자 두 손으로 전화기를 고쳐잡는 모습이 방송을 타면서 후배들 사이에서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가요계의 거장 이승철이나 이은미도 그 앞에서 겸손한 후배가 된다는 전언이다.

조용필은 모든 세대에서 보기드문 인기를 누렸다. 그와 비견되는 가수는 대중가요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서태지 정도지만 조용필이 더욱 폭넓고 다양한 팬층에게 사랑받았다.

조용필은 다양한 장르에 대한 음악적 도전을 했다. 그가 시도한 장르는 록 음악(미지의 세계), 팝(Jungle City), 발라드(슬픈 베아트리체), 블루스(대전 블루스), 민요(자존심), 트로트(허공), 동요(난 아니야), 오페라(도시의 Opera) 등이다. 

이들 중 다수의 곡들이 히트하면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춘 실력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그가 잠실종합운동장서 콘서트를 열면 지하철 배차 간격이 바뀌어 막차시간이 연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기록만으로도 그의 위상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는 70년대와 80년대, 90년대, 10년대에 음악순위 차트 1위에 자신의 곡을 모두 올려놨다. 특히 80년대 1위를 너무 많이 해 순위 프로그램의 1곡당 1위 횟수를 제한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가 가장 길게 1위를 한 곡은 고추잠자리다. 

무려 24주동안 1위를 고수하면서 가왕의 면모를 과시했다.

노력형 순정파
최초 오빠부대

그는 인기순위 자신의 곡을 가장 많이 진입시킨 가수이기도 하다. TV 차트에는 4곡, 연예지에는 6곡을 순위에 올려놨다. MBC 10대가수 가요제서 가수왕을 6차례(80, 81, 83, 84, 85, 86년) 수상했다. 

KBS ‘가요대상’에선 최고인기가수상을 4차례(81, 82, 83, 85년) 수상했다. 그 외 많은 가요제에서 대상을 거머쥐었으며, 2000년 가수 최초 명예의 전당에 등재됐다.


그는 한류의 원조이기도 하다. 1985년 도쿄서 열린 제14회 도쿄세계음악제를 기점으로 일본에서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일본 내 대표적인 공연기업 교토도쿄와 독점 계약을 맺을 만큼 이름값을 인정받았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서 인기곡이 됐다.
 

그가 일본 활동 기간동안 판매한 음반은 공식 600만장, 비공식 800만장으로 전해진다. 또 현재 일본 내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NHK 홍백가합전에 4년 연속(87∼90년)으로 출연했다. 그는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익숙하게 만든 인물이다. 

당시 뉴스에서는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부대에 대한 보도를 할 정도였다.

음악인생이 마냥 달콤했던 것은 아니었다. 음악적인 시련도 있었다. 2000년에는 저작곡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조용필은 자신의 곡 가운데 31곡 저작권이 지구레코드의 임정수 사장에게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용필은 1986년 지구레코드사와 계약할 당시 ‘지적재산권 일부 양도’ 계약을 체결했다. 조용필은 방송권과 공영권을, 복제권과 배포권을 지구레코드 측이 가져간다는 내용이 담겼다.


조용필은 소송을 벌였지만 대법원까지 소송이 진행된 끝에 패소로 마무리됐다. 이후 조용필과 제작사는 합의점을 찾아 곡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시 소유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던 곡은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너무 짧아요, 여행을 떠나요 등이다.

조용필의 감성은 세대를 아울렀다. 지난 2013년 조용필은 10년 만에 정규 앨범 19집 ‘헬로’를 발매했다. 타이틀곡 ‘바운스’는 그가 여전히 음악계에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포효’와 같았다.

음원이 공개되자 가요계는 들썩거렸다. 예순 넘어 발매한 신곡은 전 세대를 감동시켰지만, 특히 젊은 세대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엠넷, 네이버뮤직, 다음뮤직, 벅스 등 주요 음원사이트에서 젊은 뮤지션의 노래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바운스’는 멜론 등 다수의 음원사이트에서도 5위권 내를 유지했다. 환갑을 넘긴 가수가 아이돌과 경쟁해 차트 1위를 차지하는 유례없던 일이 일어났다.

신곡 공개 때마다 가요계 들썩
남녀노소 세대 아우르는 감성

그의 도전에 젊은 뮤지션의 존경담긴 극찬이 이어졌다. 

랩퍼 주석은 “조용필 19집 신곡 대박이네요. 이건 형용하기 힘든 여러 가지가 응축된 느낌. 곡이 소리의 질감서부터 짜임새까지 나무랄 데가 없는데다가 극도로 절제되고 정돈되면서도 화려함이 있는 목소리. 조 선생님은 월드 ‘스타’가 아닌 진정한 한국대표 월드 ‘클래스’ 뮤지션입니다”라고 말했다.

가수 태양은 “조용필 선배님, 미리듣기 음원이 이렇게 좋을 수가.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두근대”라고 전했다. 그룹 ‘샤이니’의 종현은 “말이 필요 없지요. 들어보세요. 존경해요. 선생님”이라고 감탄했다.

해외서도 주목했다. ‘강남스타일’로 빌보드차트 2위에 오른 월드스타 싸이의 ‘젠틀맨’ 누르고 음악차트 1위에 오르면서 해외서도 그를 주목했다. 빌보드는 당시 ‘조용필이 싸이를 K팝 핫 100차트 1위에서 끌어내렸다’는 제목의 칼럼으로 그의 활약을 조명했다.

빌보드닷컴은 “조용필은 한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며 “1980년대부터 여러 장의 LP를 발표해 각종 시상식을 휩쓰는 등 패권을 지켰다”고 보도했다.

이어 “조용필은 팝이나 록 장르부터 한국 전통 음악, 트로트까지 폭넓은 음악적 시도를 했다”고 덧붙였다. 조용필의 ‘바운스’는 빌보드 K팝 차트 1위로 뛰어오르며 싸이의 ‘젠틀맨’을 밀어내며 가왕의 면모를 드러냈다.

음악 창작자로서 조용필도 훌륭했다. 조용필이 작사하거나 작곡한 히트곡은 50곡에 달한다. ‘단발머리’ ‘모나리자’ ‘여행을 떠나요’ 등은 지금도 후배 가수들을 통해 수없이 리메이크 되며 사랑받고 있다.
 

이는 편견없는 그의 음악 열정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평소에도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음악을 듣는다. 그가 소장하는 음반은, 비틀즈나 마빈 게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핑크 플로이드, AC/DC, 폴리스, 스팅, 퀸 나아가 메탈리카까지 모든 장르를 망라한다. 

가왕 조용필이 아닌 인간 조용필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동안 조용필은 이웃 사랑을 통해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눠주기도 했다.

한센병 환자들에게 희망을 전하기 위해 전남 소록도서 2년 연속으로 공연했다. 조용필은 첫 공연 당시 내년에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를 지킨 것이다. 재방문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가수는  그가 유일했다. 자신의 콘서트 수익금 전액을 소아암 환자 500명에게 기부하기도 했다. 

인기 순위에 
가장 많은 곡

조용필은 두 번의 결혼을 했다. 1984년 3선 국회의원 박찬씨의 딸 박지숙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기간을 오래가지 않았다. 결혼 4년 만에 합의 이혼을 했다. 조용필은 이혼이 자신의 잘못이라며 대부분의 재산을 위자료로 주고 원만하게 이혼했다. 

이후 1994년 미국 사업가 출신 안진현과 재혼하며 화제를 낳았다. 1993년 미국 공연 당시 친누나의 소개로 안진현씨와 사랑에 빠졌다. 안진현은 그의 음악 세계를 존중했다. 조용필 역시 아내에 대한 애정이 컸다. 

그러나 결혼 5년 만에 안진현은 심장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이어가다 2003년 사망하게 되면서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안씨의 유해는 조용필의 선산이 있는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안장됐다. 

조용필의 아내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망 이후 받은 상속액은 전액 심장병을 앓는 환자를 위해 기부했다. 2003년 18집에는 그녀를 그리워하는 ‘진’이라는 노래를 수록해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틈틈이 먼저 떠난 아내 산소를 찾곤 한다.

조용필은 2016년 아내의 생일을 맞아 묘소를 찾은 사실이 처제인 제니퍼 안씨의 남편 SNS를 통해 알려졌다. 제니퍼 안씨는 남편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형부는 지금도 틈틈이 언니 산소를 찾는 순정파”라고 말해 화제가 됐다.
 

기수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겪은 희노애락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이제 조용필은 가수로서 50년간 활동을 팬들과 함께 기념하려 한다. 오는 5월 열리는 그의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그의 절친이자 대배우 안성기가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안성기는 ‘조용필 50주년 추진위원회’가 진행하는 50인 축하 영상 ‘50&50인’을 통해 ‘땡큐 조용필’이라고 쓰여진 피켓을 들고 응원했다. 두 사람은 서울 경동중학교 동창으로 무려 54년간 우정을 이어왔다.

지난 13일 조용필 공식 채널을 통해 공개된 ‘50&50인’ 영상에서 안성기는 “집에 놀러다니고 했던 아주 친한 친구였다. 예전에 사진을 보면 모범생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키가 지금 키와 같다. 작은 거인이 되기 위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키는 더 이상 커지질 않았다”고 웃었다.

또 “신만이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로 누구도 그런 기미를 채지 못했고 자기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을 하게 될 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지금의 가왕 조용필을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친구 조용필은 자연인 그대로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수 조용필은 어마어마하다. 진짜 거인”이라며 “가창력은 물론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창작의지, 이런 것들은 정말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다”고 칭찬했다. 

안성기는 조용필의 많은 곡을 즐겨부른다면서 애창곡 중 하나인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한 소절을 직접 불러주기도 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렇게 많이 들었는데도 몸과 마음이 푸근하게 젖어든다고 그럴까? 너무 많이 알려졌지만 너무 좋아하는 노래”라고 꼽았다. 

또 조용필의 음악이 50년간 사랑받은 비결로는 “노래를 들었을 때 동화가 되고 공감이 되고 아직까지도 어떤 음악을 내놓을지 모른다는 어떤 기대감이 있는 가수이기도 하고. 그런 모든 여러 가지 요소가 조용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용필은 5월12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을 시작으로 5월19일 대구 월드컵경기장, 6월2일 광주 월드컵경기장 등지서 50주년 기념 투어 ‘Thanks to you’를 개최하며, 서울공연 티켓은 20일부터 인터파크를 통해 오픈될 예정이다. 

반세기 넘어 전세대가 주목하는 가수는 매우 드물다. 조용필은 예전에도 가왕이었고 지금도 가왕이다. 다가올 콘서트서 앞으로도 변치 않을 가왕으로서 위용을 드러낼 것이다.

현재 조용필은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도 방송 출연을 거부하고 있다. 이미지를 소비시대로 변모하고 있는 음악계에 오르지 음악으로만 평가받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대중가요 역사상 
또 한 번 이정표

한동윤 음악평론가는 “과거 명성만 갖고 안주해 온 가수들에게 큰 자극이 될 것”이라고 그를 평가하기도 했다. 이제 또 다시 그의 목소리에 온 국민이 빠져들 것으로 예상된다. 조용필의 데뷔 50주년은 대한민국 대중가요 역사상 또 한 번의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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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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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