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이명박 전 대통령의 금고지기가 구속됐다. 검찰은 국정원에게 특활비를 상납 받은 혐의로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 전 기획관은 이 전 대통령과 40년 지기로 최측근 중의 최측근으로 불린다. 그는 이 전 대통령의 자금을 관리한 핵심 키맨으로 지목되고 있다.
MB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를 사적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는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이 지난 17일 구속됐다. 오민석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지난 16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거쳐 영장을 발부하면서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만한 상당한(타당한) 이유가 있고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구속 사유를 밝혔다.
“죄 범했다는
의심 이유 상당”
검찰은 그동안 보안을 유지하며 청와대의 특활비 상납 수사에 만전을 기했다. 수사 사실이 알려질 경우 이 전 대통령 쪽에서 말 맞추기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을 상대로 하는 수사인 만큼 기초수사를 탄탄하게 해야할 필요도 있었다. 김 전 기획관이 혐의사실을 전면부인했는데도 법원이 이날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은 검찰의 이런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김 전 기획관은 2008년 5월쯤 청와대 근처 주차장에서 국정원 예산 담당관으로부터 현금 2억원이 든 쇼핑백을 받는 등 국정원 측에서 총 4억원 이상의 불법 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김성호·원세훈 두 전직 국정원장과 국정원 예산을 담당하는 김주성·목영만 전 기조실장 등으로부터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전용해 자금을 건넸다는 취지의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법조계에 따르면 원 전 원장은 최근 이뤄진 검찰 조사에서 지난 2010년 원장 재직 당시 청와대에 특수활동비를 상납한 사실 일부분을 인정하는 취지로 진술했다. 김 전 기획관이 “청와대 기념품 비용이 모자라다”라며 돈을 요구했다는 게 원 전 원장의 진술이다.
국정원 특활비 상납 혐의
이명박 운명 쥔 키맨 구속
특히 원 전 원장은 김 전 기획관이 직접 돈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고 검찰에 말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 전 기획관이 청와대 기념품 관련 비용이 모자라 이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원 전 원장은 지난 2010년 7∼8월 사이 당시 국정원 기획예산관이었던 최모씨에게 지시해 2억원을 김 전 기획관에게 전달토록 지시했다.
원 전 원장의 지시를 받은 최씨는 김 전 기획관 측 관계자에게 현금 2억원을 쇼핑백 2개에 담아 전달했다. 검찰은 원 전 원장의 구체적인 진술 등을 토대로 구속영장에 이 같은 점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기획관이 적극적으로 돈을 요구한 점이 진술 등을 통해 충분히 입증됐다는 것.
하지만 김 전 기획관은 검찰 수사 과정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돈을 건넸다’는 다수의 국정원 관계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수수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앞서 김진모 전 민정2비서관도 구속됐다. 권순호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16일 오후 11시 김진모 전 비서관에 대해 특가법상 뇌물과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김 전 비서관은 2009∼2011년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검사 출신이다.
당시 국정원 관계자로부터 5000만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전날 오후부터 서울 구치소에서 대기했던 두 사람은 나란히 입감됐다.
오랜 기간 이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해온 김 전 기획관이 구속됨에 따라 향후 검찰 수사는 곧장 이 전 대통령을 향해 뻗어 갈 전망이다. 검찰은 앞으로 최장 20일간 김 전 기획관의 신병을 확보한 상태서 국정원 자금 수수 경위와 사용처 등에 관해 보강 조사를 벌여나갈 계획이다.
총 4억원 이상
자금수수 의혹
특히 자금 수수 및 사용 과정서 이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가능성이나 거꾸로 이 전 대통령이 직접 국정원으로부터 자금을 받으라고 지시했을 가능성 등을 강도 높게 추궁할 것으로 보인다. 김 전 기획관의 태도에 따라 이 전 대통령을 향한 검찰의 수사는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그는 이 전 대통령과 얽힌 다른 의혹을 밝히는 수사에서도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이번 사건의 최대 쟁점은 김 전 기획관의 국정원 특활비 수수 과정에 이 전 대통령의 개입이 있었는지 여부다.
검찰이 이 전 대통령을 공동정범으로 사법처리하려면 직무와 관련해 금품이나 이익을 수수하기 위한 명시적 또는 암묵적 공모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즉 이 전 대통령이 국정원 자금의 수수를 지시했거나 최소한 공모했다는 등의 사실관계를 검찰이 입증해야 한다. 이 전 대통령의 40년 지기인 김 전 기획관은 이 전 대통령의 재산·가족·사생활까지 모두 챙기는 등 사실상의 집사 역할을 했다.
청와대에선 5년 내내 안살림을 책임지는 총무비서관과 총무기획관을 지낸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이에 비춰볼 때 김 전 기획관이 이 전 대통령과의 지시 또는 최소한 묵인·방조 없이 국정원으로부터 특활비를 건네받았을 가능성은 낮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검찰은 김 전 기획관으로부터 관련 진술을 확보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전 대통령이 만약 김 전 기획관의 특활비 수수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했을 경우 직무유기 혐의가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러나 검찰이 김 전 기획관의 진술 없이 이를 적용할 가능성은 낮다.
정치권은 김 전 기획관 구속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지만,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정치 보복’이라고 반발했다. 또한 통합 작업에 한창인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은 중립적인 수사를 촉구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지난 17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서 “국정원 특수활동비 상납과 다스의 정점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있다는 점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며 “이제 그 윗선에 대한 수사도 본격적으로 이뤄지리라 본다”고 말했다.
김현 민주당 대변인도 서면 브리핑서 “이 전 대통령도 이제는 국민 앞에 진실을 말해야 한다”며 “‘다스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국민의 물음에 검찰의 철저하고 엄중한 수사를 다시 한 번 촉구한다”고 했다.
정의당의 경우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조속한 소환 조사를 요구했다. 추혜선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서 “이 전 대통령을 조속히 소환 조사해 천인공노할 범죄들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자유한국당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한풀이하려고 한다”고 날을 세웠다.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는 원내대책회의서 “문재인정부는 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은 전부 법정에 세울 것”이라며 “전직 대통령을 꼭 법정에 세워야겠다는 보복의 일념으로 (국정원) 댓글에 이어 다스, 결국 국정원까지 엮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촛불정신이 정치보복, 정책보복, 인사보복을 위한 촛불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반문했다.
국민의당은 정치공방을 벌일 것이 아니라 사법부에 이 전 대통령 수사를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바른정당도 중립적인 조사를 당부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를 마친 후 기자들과 만나 “진실을 규명하고 문제가 있으면 거기에 따라 적법하게 처벌해야만 한다”며 “이것은 정치공세 하지 말고 사법부에 맡겨서 진상을 규명하고, 만약에 법을 어겼다면 처벌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말했다.
40년 지기 관계
사실상 집사 역할
김철근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검찰은 정치적인 입장의 고려 없이 철저한 수사를 통해 모든 혐의에 대한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며 “수사를 통해 이명박 전 대통령과 연관이 있다고 밝혀질 경우, 이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수사를 회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익환 바른정당 부대변인은 논평서 “전직 대통령과 관련한 중차대한 사안으로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만큼 검찰의 명운을 걸고 공정하고 중립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며 “표적수사나 정치보복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법과 원칙만을 보고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전 기획관은 이 전 대통령의 고려대 상대 2년 선배다.
이 전 대통령 당선 직후인 2008년 인수위 시절부터 임기가 끝나는 2012년까지 인수위 비서실 총무 담당 보좌역, 청와대 총무비서관, 총무기획관을 지냈으며 이 전 대통령의 재산 관리를 도맡아 온 MB의 ‘집사’로 불린다.
이 때문에 그는 특히 주목을 받는다. 그동안 김 전 기획관은 철저히 베일에 싸였던 인물이다. 그는 항상 소리 없이 이 전 대통령 곁을 지키고 관리해온 ‘2인자’였다.
그는 전북 익산 출신으로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환은행에 입사하면서 금융맨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기획관은 1976년 현대종합금융서 근무하면서 이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 회사서 부사장까지 지낸 뒤 1991년 삼양종합금융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무렵 이 전 대통령은 현대를 떠나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용처에 초점 윗선 개입 수사
영부인 등 여러 증언 쏟아져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분신과 같은 관계를 맺은 것은 이 전 대통령이 1998년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이후였다. 이 전 대통령은 김경준씨와 함께 본격적으로 LKe뱅크 등의 사업을 시작했을 때 김 전 기획관이 나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기획관은 당시 해외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을 정도로 국제금융 전문가였다.
김 전 기획관은 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 시절 BBK 대표였던 김경준 씨가 다스에 140억원을 돌려주는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실제 2003년 다스의 자회사 홍은프레닝의 감사로 일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다스 설립, 도곡동 땅 자금 흐름 등의 과정에 있어서도 그는 키맨으로 꼽힌다.
이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내곡동 사저 구입 사건에서도 특검의 수사 대상이었다. 당시 사저 매입 대금 등과 관련해 여러 의혹이 있었으나 김 전 기획관은 특검 조사 때 “대통령 퇴임 후 사저 부지 및 경호시설 부지 마련을 위한 계획과 준비업무는 대통령실 총무기획관인 내가 아니라 김인종(당시 경호처장)의 지휘하에 경호처서 추진했다”고 진술했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내곡동 사저 부지의 결정, 매매계약 체결 등에 개입하거나 관여한 바 없으며, 배임행위에 공모한 바 없다”고 하자 특검은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없음 결론을 내렸다.
이 전 대통령은 김 전 기획관이 지난 12일 국정원 특활비를 상납 받은 의혹으로 압수수색이 이뤄지자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무실서 측근들과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전 대통령은 이 자리서 검찰 수사에 대해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이며 화를 냈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청와대 살림에
사생활도 관리
이 전 대통령 쪽은 “현 정부가 이 전 대통령을 끝까지 보복하겠다고 작정하고 나섰다”며 “10년 전의 일을 들춰내 수사를 하려고 한다. 내가 아는 한 이명박정부 시절 청와대가 국가정보원의 특수활동비를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해명을 반박이라도 하듯이 김 전 기획관은 구속됐다. 혐의는 가볍게 볼 수준의 것이 아니다. 결국 특활비의 용처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