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쭉날쭉’ 살인형량 기준 논란

똑같은 이유로 똑같이 죽여도…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동거녀를 살해한 뒤 암매장한 30대 남성에게 징역 3년형이 선고돼 거센 논란이 일었다. 딸을 성추행했다는 말에 분노해 교사를 살해한 어머니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된 것과 비교돼 형이 너무 가볍다는 비판 일색이다. 피해자가 사망하는 같은 결과를 초래한 사건을 놓고 법원이 선고 형량을 달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동거녀를 때려 숨지게 하고 콘크리트로 암매장한 30대는 징역 3년, 고3 딸을 성추행한 상담교사를 살해한 40대 여성은 징역 10년형. 

최근 나온 두 개의 법원 판결을 놓고 누리꾼들의 반응이 뜨겁다. 누리꾼들은 동거녀 폭행치사범에게는 관대한 반면 딸이 성추행당했다는 말에 격분해 범행을 저지른 어머니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을 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네티즌 울린
가혹한 처벌

동거녀를 숨지게 한 뒤 암매장한 혐의로 기소된 30대는 항소심을 거치면서 형량이 크게 줄었다. 대전고법 청주제1형사부(이승한 부장판사)는 지난 1일 폭행치사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 된 이모(39)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이씨는 2012년 9월 중순께 충북 음성군 대소면의 동거녀 A(사망 당시 36세)씨 원룸서 ‘헤어지자’는 말에 격분해 A씨를 폭행해 숨지게 한 뒤 인근 밭에 암매장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이씨는 자신의 친동생과 함께 A씨의 시신을 암매장하고 범행을 은폐하고자 콘크리트로 덧씌우기도 했다.


범행을 벌인 지 4년 만에 꼬리가 밟힌 이씨에게 검찰은 살인죄가 아닌 폭행치사 혐의를 적용했다. 순간적으로 분노를 참지 못해 벌인 우발적 범행으로 본 것이다.

형법상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는 살인죄와 달리 폭행치사죄는 3년 이상의 징역형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원심 재판부는 폭행치사와 사체은닉죄를 합쳐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항소심 재판부는 유족과 합의한 점을 들어 2년을 감형해줬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사망하고 사체 은닉까지 했지만 유족이 합의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이씨가 징역 3년으로 감형이 선고된 배경에는 20년 넘게 연락이 끊긴 피해자 A씨의 아버지가 합의한 뒤 선처를 요구한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됐다. 사실상 남과 다름없는 유족의 합의가 감형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계획적이다” 중형 “합의했다” 감형
범죄 질에 상관없이 합의하면 그만?

검찰 관계자는 “법원에 합의서가 제출됐다고는 하지만 이는 가족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통상적인 합의와는 다르게 봐야 한다”며 “20년 넘게 왕래가 없었던 유족과의 합의를 양형의 요소로 봐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지난 2일 청주지법 형사합의11부(이현우 부장판사)는 “노래방서 성추행당했다”는 고3 딸의 말에 격분해 커피숍서 만난 고교 취업지원관(산학겸임 교사)을 흉기로 살해한 김모(46·여)씨에게 징역 1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살인 혐의로 구속기소 된 김씨는 “딸이 성추행당했다는 말을 듣고 분노를 참지 못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행 전 피해자와 자신의 동생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내용, 흉기를 미리 준비한 점 등을 비춰보면 계획적인 살인”이라며 우발적이었다는 김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범행 동기가 피해자에 있다 하더라도 사적인 복수는 중형을 선고하는 게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두 사건은 피해자가 사망했다는 결과만 같을 뿐 범행하게 된 정황이 다르고 특히 범행이 우발적인지 계획된 것이었는지가 양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그러나 누리꾼들은 딸의 성추행이 범행의 발단이라는 점에서 정상 참작의 여지가 큰 김씨에 비해 동거녀를 숨지게 하고 콘크리트 암매장한 ‘엽기’ 범죄자인 이씨의 처벌이 너무 가벼운 것 아니냐는 주장이 많다.

한 누리꾼은 “살인죄를 저질렀으면 처벌받는 게 당연하지만 동거녀를 때려 숨지게 하고 암매장까지 한 사람보다 딸 성추행범을 처단한 엄마가 3배 이상 높은 형량을 받은 것은 국민 정서상 납득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사적인 복수는 
중형선고 마땅

또 다른 누리꾼은 “살인의 고의성이 인정되더라도 자식이 못된 짓을 당했다면 어느 부모가 가만히 있겠느냐”며 “공감할 수 없는 판결”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법조계에선 사건마다 정황이 다르고, 범행 동기·과정·결과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법리적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국민정서법’과 법원 판결이 같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상담교사를 살해한 김씨 사건은 우리 법질서에서 절대 용납하지 않는 사적 복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원이 판단한 것 같다”며 “정상을 참작할 경우 자칫 사적 복수를 용인하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어 재판부가 더욱 엄중히 판결한 것”이라고 말했다.

형이 확정된 또 다른 실사례들을 살펴보자. 아들에게 지원한 주택구입 자금 1억원 때문에 평소 이 문제로 다툼이 많았던 B씨와 아내. 아내는 결국 이혼을 언급했다. 화난 B씨는 아내를 넘어뜨리고 목졸라 숨지게 했다. 이후 B씨의 자녀들이 법원에 “아버지에게 만이라도 효도하게 해달라”고 탄원했다.

C씨는 무일푼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불이 켜진 옆집에 흉기를 들고 침입했다. 여행 경비를 마련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그 집에서 자던 여성을 위협해 재갈을 물리고 양손 양발을 묶은 뒤 승용차·휴대전화·신용카드를 빼앗았다. 


C씨는 이후 여성이 강하게 저항하자 둔기로 머리를 마구 내려쳐 숨지게 했다. 범행 당시 술을 마셨지만 만취 상태는 아니었다.

D씨는 한 유부녀와 내연관계에 있었다. 이 내연녀의 남편이 D씨에게 “내 아내를 더 이상 만나지 말라.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전화하자 D씨는 욕설과 함께 찾아오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D씨는 미리 준비한 흉기로 그를 두 차례 찔렀다. 이 남성은 다음 날 숨졌다.

E씨는 술을 마시며 여러 사람과 함께 도박을 하던 중 돈을 잃은 한 남성이 화를 내며 도박판을 뒤엎었고, 둔기로 E씨의 이마를 때린 뒤 E씨의 돈 40만원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격분한 E씨는 흉기로 그 남성을 찔러 숨지게 했다. 

E씨는 이후 둔기로 맞고 돈을 빼앗긴 데 대한 정당방위임을 주장했다. B씨는 징역 4년, C씨는 7년, D씨는 12년, E씨는 30년을 선고받았다.

징역 4년형이 선고된 B씨의 범행은 참작동기 살인(동기에 있어 특히 참작할 사유가 있는 살인범행)으로 분류됐다. 여기에 유족인 B씨의 자녀들이 탄원한 점은 특별양형인자로서 감경요소가 됐다. 이 경우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징역 3∼5년을 권고한다. 

재판부는 B씨가 범행 직후 죄책감에 시달려 극단적 선택을 꾀한 점, 고령인 B씨가 잘못을 뉘우치는 점 등도 참작했다.


사유가 있으면
참작동기 분류

흉기를 호주머니에 넣어둔 채 내연녀의 남편이 찾아오길 기다렸던 D씨의 경우는 보통동기 살인(원한관계, 가정불화, 채권채무관계 등으로 인한 살인범행) 유형에 해당한다. 양형기준에 따라 권고되는 형의 범위는 징역 10∼13년이었는데 계획적 범행이라는 점은 특별가중요소로 작용했다.

재판부는 D씨가 피해자 아내와 불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불순한 동기서 저지른 살인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다만 D씨가 먼저 얼굴을 한 대 맞는 폭행을 당하자 이에 대응해 몸싸움을 벌이다 다소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점, 진지한 반성이 있다는 점 등이 감경요소가 됐고 결국 징역 12년형이 선고됐다.

법조인들이 4가지 사례 가운데 가장 비난 가능성이 크다고 본 C씨의 범행은 판결문서 중대범죄 결합 살인으로 드러나 있다. 잔혹한 범행 수법 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정상이었고 이때 권고형은 징역 25년 이상이었다.

다만 재판부는 C씨가 범행을 인정하며 반성하고 있고 소년보호처분 이외에 별다른 범죄전력이 없는 점 등을 참작할 만한 사정으로 꼽았다. 판결문마다 나름의 양형 이유가 있고 상급법원서 재차 판단을 거쳐도 형량은 결국 같았다.

10명 중 8명 “양형기준이 낮다” 
반성하면 봐준다? 감경요소 애매

하지만 대검찰청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반인들은 이렇게 살인범죄에 대해 제시돼 온 법원의 결론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에 응한 국민 10명 중 8명 이상은 살인범죄에 대한 법정형과 양형기준이 모두 낮은 수준이라고 응답했다.

국민적 법 감정만큼 돌출된 인식으로 보기에는 어렵지만 법조인들도 현재의 살인범죄 처벌 수준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검사 중 51.8%는 법정형 처벌 수준이 낮다고, 68.2%는 양형기준 처벌 수준이 낮다고 응답했다. 

변호사와 교수 집단에선 법정형 처벌 수준이 적정하다는 응답 비중이 과반이었다. 다만 이들 집단에서도 위의 사례서 적당한 처벌 수준을 물었을 때는 법원의 실제 판단보다 높은 형량을 제시했다.

살인범죄는 여타의 범죄에 비해 피해 회복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중대성을 띤다. 이 살인범죄에 대한 우리나라의 법정형은 1953년 9월 형법 제정 이후 계속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이라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인명 훼손이라는 중대성에 비춰보면 ‘5년 이상 징역’으로 제시되는 법정형 자체가 너무 낮다는 의견이 많다.

구체적인 사례서 살인범죄 처벌에 고려돼야 할 가중요소와 감경요소는 의외로 많다. 하지만 고려할 인자가 많다고 해서 최종 처벌 수준의 판단을 현행법과 법관의 재량에만 맡겨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크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지나친 작량감경(법관 재량의 형 감경)이 이뤄지는 게 아닌지 법원 스스로도 반성해 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낮은 살인형량
재범률 높다

과연 사회적 안전망이 일반적인 인식만큼이나 잘 작동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은 나날이 커진다. 경제 상황의 악화와 스트레스의 가중 속에서 연쇄살인과 ‘묻지마 살인’이 계속되는 문제도 크다. 살인범죄로 무기징역 이상의 형을 선고받는 비중은 2011년 이후 1%대를 기록 중이다. 동시에 해마다 50명 안팎은 살인을 저질렀던 이들의 재범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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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