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책을 읽다 보면 특정 단어나 구절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기억이 머리를 채우고 나면 책 내용은 어느새 뒷전이 된다. 작가 지희킴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책 위에 그림을 그렸다. 떠오른 기억의 연쇄작용을 작품으로 승화한 것이다. 지희킴의 개인전 ‘오늘 밤, 태풍이 온다’는 지난해 대만을 강타한 큰 바람서 시작됐다.
송은 아트큐브는 신진 작가들의 자발적인 전시 개최를 지원하고 창작 의욕을 고무하기 위한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번 2016∼2017 전시지원 공모 프로그램 선정 작가는 지희킴. 송은 아트큐브는 지희킴의 개인전 ‘오늘 밤, 태풍이 온다’를 개최한다.
‘태풍’서 영감
지희킴은 캔버스가 아닌 책에 그림을 그린다. 보통 버려졌거나 기부받은 책을 이용한다. 책의 특정 페이지에서 발췌한 단어나 문장이 영감의 원천이다. 책에서 뽑아낸 영감에서 그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떠올린 기억서 연상된 이미지를 책 위에 그린다.
지난해 서울 디스위켄드룸서 진행한 개인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선 텍스트서 떠오른 작가의 기억과 경험을 북 드로잉과 구슬 등의 오브제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2011년 겨울 영국 유학 생활 무렵부터 버려진 책을 작업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미래가 불투명한 작가 생활이 언제 폐기될지 모르는 책과 닮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작가는 2015년 한 언론과 인터뷰서 “내 작업을 통해 버려지는 것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책에서 떠올린 기억
그림으로 책에 새기다
그가 텍스트를 이미지로 읽기 시작한 것은 외국어로 쓰인 책을 읽어야만 했던 어느 날이었다. 책이 책으로 보이지 않고 글자 덩어리로, 하나의 이미지로 보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 지희킴에게 눈앞의 텍스트는 이미 텍스트가 아니었고, 글자는 이미 글자가 아니었다.
그저 미미한 요소일 뿐인 마침표가 거대한 원의 형태로 다가왔다. 마침표가 하나의 완성된 존재로 부각되자 그는 그것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가 됐다.
이번 전시는 자연이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지난해 여름 대만을 강타한 태풍이다. 지희킴은 지난해 7월 여름 타오위엔 국제공항서 태풍을 경험했다. 태풍 속에서 그는 공포감과 차분함 등 양립된 감정을 느꼈다. 지희킴은 당시 느꼈던 감정을 작가노트에 상세히 적었다.
대만 강타한 태풍서
공포와 차분함 동시에
그는 “맹렬한 속도의 바람과 구름, 강의 기묘한 색과 요동침, 무겁고 끈끈한 공기, 땅을 뚫을 것 같은 빗줄기를 눈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난생처음 겪는 기이한 공포였다” “어둠의 심연 속 바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빠르게 집어삼키고 창밖의 낯선 풍경은 나의 공포를 극대화시켰다” “얇은 유리창을 두들겨대는 바람과 빗방울의 소리는 두려움을 몰고 오다가도 돌연 이상할 정도로 차분한 기분이 들게 했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태풍이 몰아치던 밤은 지희킴에게 하나의 기폭제가 됐다. 기억의 연쇄과정은 그물에 물고기들이 딸려 올라오듯 연속해서 이어졌다.
그는 “시작점은 태풍이지만 연쇄의 단계가 거듭될수록 어느덧 맨 처음 단계인 태풍의 존재를 망각하게 되고 나의 기억 속의 인물, 사건, 경험, 냄새, 소리, 대화, 주고받았던 문자 메시지, 소설과 영화의 한 장면 따위에 오롯이 집중하게 됐다”며 “이렇듯 우리는 우연을 실제로 착각하고 결과를 원인으로, 수단을 목적으로, 우리의 몸과 지성을 우리 자신으로, 우리 자신을 무언가 영원한 것으로 착각한다”고 설명했다.
관객과 소통
송은 아트큐브 관계자는 “작가가 책에서 찾은 특정 단어나 문장 또는 특별한 경험들을 본인의 기억과 연관 짓고 드로잉으로 확장시키는 작업은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알아가는 일련의 과정”이라며 “이를 통해 작가는 관객과 사적인 이야기를 공유하고 소통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내달 1일까지.
<jsjang@ilyosisa.co.kr>
[지희킴은?]
1983 서울 출생
▲학력
골드스미스대학교 순수미술 석사 졸업(2013)
동국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석사 졸업(2008)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서양화과 졸업(2006)
▲개인전
‘오늘 밤, 태풍이 온다’ 송은 아트큐브, 서울(2017)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디스위켄드룸, 서울(2016)
‘The Map of the Soul’ Art Corner, 타이중 국가가극원, 타이중, 타이완(2016)
‘Between the lines’ cueB Gallery, 런던, 영국(2014)
‘Daytime Sleepwalking’ The Crypt Gallery, 런던, 영국(2013)
‘Sleepless Night’ 유아트스페이스, 서울(2009)
‘Finding my other self’ 진흥아트홀, 서울(2007)
▲작품소장
Live Forever Foundation, 타이중, 타이완(2016)
서울시립미술관, 서울(2015)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과천(2014)
골드스미스대학교, 런던, 영국(2013)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과천(2011)
서울시립미술관, 서울(2010)
제주도립미술관, 제주(2009)
하나은행 본점, 서울(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