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난파선 선장’ 허창수 전경련 회장

허창수호 4번째 출항 이대로 침몰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배가 침몰 직전에 놓였다. 몇몇 선원들은 이미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했다. 전임 선장이 놓은 키를 잡을 선원이 없다. 결국 전임 선장이 다시 키를 쥐었다. 배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다. 기름도 없어 얼마나 더 항해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키를 쥔 선장은 덮쳐오는 파도와 선원들의 이탈을 막아야 한다. 다 망가진 전경련 회장직을 또다시 연임하게 된 허창수 GS 회장 이야기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는 1961년 경제재건촉진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이래 재계서 막강한 영향력을 휘둘러왔다. ‘정권의 수금 창구’ ‘재계의 대변인’ 등 부정적인 시선에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숱하게 불거졌지만 전경련의 생명력은 질겼다. 쇄신과 혁신을 부르짖으며 따가운 눈길을 이겨냈던 전경련이지만 이번은 좀 다르다. 역사의 뒤안길로 불명예 퇴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한 지경에 이르렀다.

해체? 재건?
기로 선 전경련

미르·K스포츠재단과 관련한 의혹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불씨였다. 전경련은 회원사들을 압박해 두 재단의 출연금을 모금했다. 검찰 수사 결과 두 재단에 출연금을 낸 기업은 53개, 이들이 낸 출연금은 774억에 달했다. 베일에 싸여 있던 두 재단의 설립 과정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대통령의 정치 생명이 끝났고, 국내 최고 기업의 부회장은 감방 신세가 됐다.

지난달 수사 기간이 종료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삼성이 두 재단에 낸 출연금 204억원에 대해 제3자 뇌물공여 혐의를 적용했다. 삼성이 대가를 바라고 두 재단에 돈을 냈다고 본 것이다. 검찰서 본격적으로 수사가 진행되면 출연금을 낸 다른 기업도 같은 혐의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재계의 입장을 대변한다며 야심차게 출범한 전경련은 정경유착의 본거지로 전락했다. 지난해 12월 재계 총수들이 한자리에 모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는 ‘별들의 전쟁’을 방불케 했다. 당시 청문회는 ‘전경련 성토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국조특위 위원들은 두 재단에 출연금을 낸 기업 총수들을 압박했다.


바른정당(당시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삼성이 전경련 해체에 앞장서겠느냐. 앞으로 전경련 기부금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하라”고 재촉했고 이 부회장은 “그러겠다”고 답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안민석 의원이 “전경련 해체를 반대하면 손들어달라”고 요구하자 그 자리에 모인 9명의 총수 중 구본무 LG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허창수 GS 회장이 손을 들었다.

허 회장은 당시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삼성 이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손경식 CJ 회장 등 3명은 거수하지 않았다. 삼성 이 부회장은 ‘전경련 탈퇴’를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해체와 함께 쇄신 방안으로 내세웠다. 조부인 고 이병철 회장이 주축이 돼서 세운 단체가 손자 대에 이르러 쇄신 대상이 된 셈이다.

해를 넘기기도 전에 LG가 스타트를 끊었다. LG 측은 지난해 12월27일 “올해 말로 전경련서 탈퇴키로 하고 최근 전경련에 공식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어 “내년부터 전경련 회원사로 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계획”이라며 “회비도 내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잠잠해지나 싶더니 지난달 6일 삼성은 삼성전자를 비롯, 15개 전 계열사가 전경련을 탈퇴했고, 같은 달 16일에는 SK, 21일에는 현대차가 탈퇴원을 제출하면서 우리나라 4대 그룹이 전경련과 관계를 끊었다.

사람 없어 도로 회장님
2011년부터 네 번째 연임

숫자상으로는 4개 기업이지만 이들이 부담하고 있던 회비는 전경련 연간 회비의 77%가량이나 된다. 2015년 기준으로 4대 그룹은 492억원의 전경련 연간 회비 가운데 378억원을 부담했다. 주요 그룹이 줄줄이 탈퇴를 선언하면서 전경련의 위상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1988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일해재단 모금 사건,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선 비자금 모금, 1997년 세풍사건, 2002년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의혹 등에 연루되면서도 회원사 탈퇴는 없었던 전경련이었다.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지만 전경련은 여전히 혁신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또다시 중책을 맡게 된 허창수 GS 회장이 있다.
 

청문회 당시 전경련 해체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던 허 회장은 난파선서 내리지 못하고 또다시 키를 움켜쥐게 됐다. 2011년부터 회장직을 맡고 있던 허 회장은 이번에는 그만두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지만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벌써 4번째 연임이다.

허 회장은 2011년 처음 전경련 회장을 맡을 때도 삼성, LG, SK 등 상위재벌 회원사 측에서 회장을 맡을 차례였지만 모두 고사하는 바람에 떠밀리듯 직을 맡은 바 있다. 올해로 3번째 임기가 완료됐지만 4대 그룹 탈퇴 이후 아무도 회장직을 맡으려 하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허 회장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물론 재계서 후임 회장을 인선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재계 원로들은 차기 전경련 회장 추대를 위해 수차례 머리를 맞댔다. 그중에서도 허 회장은 직접 재계 인사들을 만나 의사를 묻는 등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내부에선 현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인물로 허 회장을 지목했다. 허 회장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직을 수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경련 내부서도 허 회장의 연임을 긍정적으로 본 사람은 몇 없었다.

그가 지난해 12월28일 연임 의사가 없다는 점을 밝히는 등 이번에야말로 회장직을 내려놓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4대 그룹 탈퇴
예산 대폭 감소

일각에선 대내외 상황상 허 회장이 계속 회장을 맡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허 회장은 세 번째 연임 때도 재계서 새 인물을 찾지 못해 직에서 내려오지 못했었다. 당시보다 상황이 더 악화된 지금, 회장직을 맡을 회원사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

차기 후보로 거론됐던 손경식 CJ 회장,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은 끝내 고사했다. 여기에 차기 회장이 인선되기 전 자리서 물러나면 ‘책임감 없는 기업인’으로 비칠 수 있다는 여론도 허 회장의 결심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전경련은 지난달 24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 컨퍼런스센터서 정기총회를 열고 허 회장을 36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부회장에는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을 선임했다. 이로써 허 회장은 회원사 이탈로 추락한 전경련의 위상을 제고하고 줄어든 회비로 살림을 꾸려야 하는 중책을 짊어지게 됐다.

허 회장은 취임사에서 전경련의 현 상황에 대한 사과와 혁신을 약속했다. 그는 “전경련이 여러 가지로 회원 여러분과 국민들께 걱정과 심려를 끼쳐드렸다”며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훌륭한 분이 새 회장으로 추대돼 전경련을 거듭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과정이 여의치 않아 제가 이 상황을 수습하게 됐다”며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회장직을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유임된 이유는?
궁여지책 선택?

허 회장이 내세운 전경련 혁신 방안에 관심이 쏠렸다. ‘환골탈태’ ‘재탄생’ 수준의 혁신을 예고한 그는 3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전경련은 ‘정경유착 근절’ ‘투명한 운영’ ‘싱크탱크 역할’ 등의 혁신안을 통해 국민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고 국민의 신뢰와 회원사의 지지를 회복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시민단체뿐 아니라 정치권서 전경련 해체 요구가 높은 상황을 정공법으로 맞서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어디서든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지만 전경련은 일단 혁신을 밀어붙이겠다는 입장이다. 전경련은 지난 2일 외부 인사 3명을 영입해 혁신위원회를 꾸렸다고 밝혔다.

혁신위원회는 허 회장을 위원장으로,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장관,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장관, 김기영 전 광운대 총장 등 외부인사 3인과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이웅열 코오롱 회장, 권 신임 상근부회장(간사)으로 구성됐다.

혁신위원회는 전경련 현황과 혁신추진 경과, 혁신방향 및 추진계획 등을 논의하고 각계각층서 외부 의견을 수렴해 최종 혁신안을 확정한다는 계획이다. 전경련 임원진은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지난 5일 일괄 사의를 표명했다.
 


전경련에 따르면 임상혁 전무, 송원근 경제본부장, 이용우 사회본부장 등 임원 6명이 사의를 밝혔다. 혁신위원회는 임원진 사표 수리 여부를 신중히 검토한 뒤 혁신안과 함께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전경련은 쇄신의 일환으로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겠다고 나섰다. 지난 7일 전경련은 ‘전경련의 새 모습을 국민에게 듣겠다’며 온라인 창구를 개설했다. 온라인 창구를 통해 받은 의견을 혁신안과 향후 진행될 전경련 사업에 반영한다는 방침이다.

지난 10일에는 전경련 회관서 ‘전경련 역할 재정립과 혁신방향’을 주제로 토론회도 개최했다. 온라인 창구, 토론회 등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모으고 소통을 통해 혁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외부인사 영입해 혁신위 구성
정치권·시민단체 반응 싸늘

하지만 여전히 반응은 싸늘하다. 경제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은 “전경련 해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떤 대안을 내놓더라도 국민을 기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며 “전경련은 자발적 해체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전사회시민연대 등 시민단체 16곳으로 구성된 전경련해체시민연대도 “국정 농단과 정경유착의 공범으로 지목된 전경련이 해산을 거부하고 임원진을 선임한 것은 국민을 우롱한 행위”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허 회장이 내놓은 쇄신안은 재탕에 불과하다는 쓴소리도 이어졌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쇄신안을 내놓고 변화를 약속했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특히 정경유착 근절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전경련이 매번 들고 나오는 쇄신안이라 약발이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자조 섞인 시선도 있다. 전경련 회원사들이 두 재단에 출연금을 낼 당시 회장직을 맡고 있던 허 회장이 다시 수장으로 추대된 것에서 이미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강경한 입장도 있다.

민주당 이언주 의원은 언론과 인터뷰서 “전경련의 역할은 로비하는 것 말고는 없다”며 “반성을 한다면 해체를 통해서 개혁이 진행돼야 한다”며 해체론을 주장했다. 이어 “전경련 해체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해결의 시작이라고 본다. 사회에서 강자들이 모여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겠다고 이익단체를 만드는 것은 탐욕스럽고 뻔뻔스러운 짓”이라고 지적했다.

여야 대선주자들도 한목소리로 전경련 해체를 외쳤다. 경실련은 지난달 22일 대선주자 8명과 각 정당을 상대로 전경련 해체에 관한 공개질의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와 이재명 성남시장,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와 손학규 전 국민주권개혁회의 의장, 남경필 경기도지사, 정의당 심상정 대표 등 6명은 즉각 해체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해체 찬반 여부에는 즉답을 하지 않고 전경련에 사법적 책임을 묻는 게 우선이라고 답했다.

재탕 혁신안으로
쇄신? 의구심만

허 회장은 취임사 말미에서 “지금은 한국 경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봐야 할 때”라며 “전경련이 진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기업에 활력을 주는, 국민생활에 도움이 되는, 국가경제 발전을 위한 경제단체로 거듭나겠다”며 “지금의 혼란과 어려움을 조속히 극복하고 새로운 지도부가 안정된 가운데 업무를 추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빈사상태에 빠진 전경련 ‘허창수호’가 다시 한 번 재계 중심 단체로 살아날 수 있을지 아니면 ‘좀비’ 상태로 유지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여부는 허 회장의 손에 달렸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허창수는 누구?

또다시 ‘재계의 맏형’ 역할을 맡게 된 허창수 GS 회장은 GS그룹을 이끌고 있는 오너 일가 2세다.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의 5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7년 경남고, 1972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7년 미국 세인트루이스대학 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이수했다. 1977년 LG그룹 기획조정실 인사과 과장으로 입사해 1979년 LG상사 해외기획실 부장을 맡는 등 LG그룹의 핵심 계열사를 두루 거쳤다.

1995년 LG전선 회장으로 선임되면서 경영 일선에 뛰어들었다. 특히 2004년 GS그룹이 LG그룹에서 분할되면서 GS홀딩스 회장으로 그룹을 이끌었다. 2009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단에 합류한 허 회장은 2011년부터 회장직을 맡아 활동 중이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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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정재관-박종철 ‘낙하산 고리’ 추적

[단독] 김건희-정재관-박종철 ‘낙하산 고리’ 추적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10·29 이태원 참사 당시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정재관 현 군인공제회 이사장(당시 대통령경호처 소속)에게 대통령실 인근 전단지 제거 상황을 보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 이사장은 대한토지신탁의 박종철 대표이사를 ‘낙하산으로 임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 대표가 김건희 일가의 양평 공흥지구 개발사업의 담당자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다. 국회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관련 청문회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2022년 10월29일 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당시 대통령경호처 소속이던 정재관 이사장에게 대통령실 인근 담벼락에 붙은 전단지를 제거했음을 보고하는 취지의 문자메시지와 사진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공공기관 인사를 둘러싼 윤석열정부의 정치권 인맥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태원 참사 개입 정황들 이날 오후 10시51분 박 구청장이 보낸 문자에는 ‘전단지 제거 완료’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정 이사장은 ‘ㅋ 고생하셨습니다’라는 취지의 답장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메시지가 오간 시간대는 소방 경찰 시민이 뒤엉켜 사람들을 끄집어내고 심폐소생술을 하던 10시49분과 겹친다.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는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지방자치단체가 대통령실 인근 전단지 제거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면 행정 대응의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태원 참사 이후 인파 관리 실패와 초기 대응 부실이 핵심 책임 논쟁으로 이어졌던 만큼, 참사 당일 용산구청이 어떤 업무에 행정력을 투입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다시 제기되고 있다. 박 구청장은 청문회에서 해당 문자와 관련해 “전단지를 제거하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는 “우리 업무인 것 같아 전화해 보라고 한 것일 뿐 바로 나가서 제거하라고 지시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문위원들은 문자 내용과 상황을 근거로 사실상 조치 지시가 있었던 것 아니냐며 강하게 추궁했다. 또 참사 상황에서 대통령실 인근 문제를 별도로 챙기고 이를 대통령경호처 인사에게 보고한 정황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사고 우려 민원 전화가 쇄도하던 때 박 구청장은 대통령실 인근 담벼락에 붙은 진보 단체 전단지를 다 떼어냈다며 사진과 함께 보고 형식의 문자를 보냈다. 이를 받은 정 이사장은 웃으며 “고생했다. 이태원 압사사고 안타깝고”라고 답한 것이다. 이번 문자 공개로 이태원 참사 당시 지방자치단체의 대응 판단과 대통령실 주변 기관과의 관계, 그리고 재난 상황에서 행정 대응의 우선순위가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박 구청장이 문자를 보낸 정 이사장은 김용현 당시 대통령경호처장과 절친한 육사 38기 동기다. 윤석열 캠프에서 ‘국방정책자문단 육사 8인회’로 통했으며 용산 ‘대통령실 이전 TF’에서 활동했다. ‘21세기 하나회’나 다름없다. 이태원 참사 전단지 제거 의혹 제기 보고받은 정, 대토신 사장 임명 개입? 박 구청장은 수사와 재판에서 이날 오후 10시51분에야 이태원참사를 인지했다고 주장했다. 느낌표까지 쓰며 “전단지 제거 완료”를 보고한 바로 그 시각과 분 단위까지 일치한다. 박 구청장이 참사 현장에 도착한 건 8분 뒤인 10시59분. 그 사이 박 구청장이 어디에 몰두했는지 그리고 대통령실 측근들과 어떤 소통을 한 건지 처음 드러났다. 지난 12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10·29 이태원참사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가 연 청문회에서 양성우 이태원 특조위 위원은 “정재관이 전단지 제거를 요청했기 때문에 자랑하려고 보낸 것인가요?”라고 물었다. 이에 박 구청장은 “전혀 아니”라고 답했다. 양 위원이 “정재관을 통해서 경호처장 김용현, 나아가 대통령 내외에게 전달될 것을 의식하고 보고한 것 아닙니까”라고 재차 질문하자, 박 구청장은 아니라고 답했다. 앞서 정 이사장은 특조위 조사에서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대통령실에 협조한 걸 자랑하려고 일방적으로 보낸 것 같다”고 진술했고, 이날 청문회에 불출석했다. 현재 정 이사장이 이끌고 있는 군인공제회는 약 17만명 군인 회원의 노후 자금을 운용하는 대형 기관이다. 자산 규모는 20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하 기업 가운데 하나인 대한토지신탁은 군인공제회가 100% 지분을 보유한 부동산 신탁회사다. 사실상 공제회의 핵심 투자 및 사업 플랫폼 역할을 한다. 문제의 중심에는 정 이사장과 대한토지신탁 대표 박종철의 인사 흐름이 있다. 정 이사장은 2023년 1월 제16대 군인공제회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예비역 육군 준장 출신으로 통상 소장 또는 중장급이 맡아왔던 자리에 임명된 이례적 인물이다. 군 안팎에서는 그의 발탁 배경에 윤 정부 핵심 인맥으로 꼽히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영향력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20조 책임진 원스타 준장 실제로 군인공제회가 창립된 1984년 이래 준장급이 이사장을 맡은 건 정 이사장이 처음이다. 예비역 준장 출신인 정 이사장이 발탁된 데에는 ‘김용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군 인사에 정통한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군인공제회 이사장은 현역 군인 및 군무원 37명으로 구성된 제113차 대의원회의에서 선출, 국방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취임하기 때문이다. 또 정 이사장은 육군사관학교 38기 출신으로 한미연합사 민군작전처장, 합참 민군작전과장, 국방부 국회협력단장 등을 거친 군 경력 인사다. 특히 국방부 국회협력단장 시절 정치권과의 연결고리를 구축하며 윤정부 핵심 라인과 가까운 인물로 분류됐다. 논란은 그로부터 약 4개월 뒤 이어진 박 대표를 선임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대표이사 선임 과정 역시 공제회 이사회 추천과 국방부 승인 절차를 거치는 구조이기 때문에 사실상 모회사인 군인공제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내부에서는 이 같은 인사 흐름을 두고 “군인공제회 수장 교체 이후 산하 기업 인사까지 연쇄적으로 바뀌는 전형적인 권력 인사 패턴”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대한토지신탁 대표 선임 과정은 공개 채용 형식을 취하지만, 최종 후보자는 군인공제회 이사회의 추천을 받아야 하고 국방부 승인까지 거쳐야 한다. 결과적으로 공제회 수장의 의중이 크게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박 대표의 과거 이력까지 다시 조명되면서 정치적 논란이 확대됐다. 박 대표는 과거 양평 공흥지구 개발사업을 담당했던 대한토지신탁 실무 책임자로 알려져 있다. 이 사업은 윤석열 전 대통령 장모 최은순씨 일가가 연루된 특혜 의혹 사건과도 연결된 사업이다. 당시 윤석열 측은 대선 과정에서 공흥지구 개발사업이 대한토지신탁 주도로 진행된 만큼 특혜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자료에서 박 대표가 해당 사업 담당자로 확인됐다. 2018년 12월 사업1본부장으로 퇴사한 박 대표가 정권 출범 이후 다시 복귀한 배경을 둘러싸고 ‘낙하산 인사’ 의혹이 제기됐다. 대한토지신탁은 지난 11월 초 <일요시사>와 통화하며 “2014년 양평 공흥지구 사업은 오래된 만큼, 담당자를 알 수 없다”고 일축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한준호 의원이 요청한 ‘대한토지신탁 양평 공흥지구 개발 담당자 명단’에는 박 대표를 비롯한 양평 공흥지구 사업 실무자들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재돼있다. 김건희 일가 집사로 활동 민중기 특별검사팀은 김건희의 가족 회사인 이에스아이엔디(ESI&D)가 양평 공흥지구 개발 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다고 의심하고 있다. 민주당 한준호 의원이 대한토지신탁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박 대표는 2014년 5월27일 양평 공흥지구 사업 담당자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박 대표는 대한토지신탁 사업1본부장으로 근무하다가 2018년 12월 퇴사했다. 2019년과 2020년에는 에이치에스파트너스그룹 사장과 비전알이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그는 윤 전 대통령 당선 이후인 2023년 5월 대한토지신탁 대표이사로 복귀했다. 이 같은 의혹은 대한토지신탁의 최근 경영 상황과 맞물리며 더욱 확대되는 분위기다. 대한토지신탁은 부동산 경기침체와 PF 부실 여파로 유동성 압박을 겪고 있다. 군인공제회는 최근 수천억원 규모의 재무 지원을 단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대한토지신탁은 군인공제회로부터 지급보증과 채권 인수 등을 통해 수차례 자금 지원을 받았지만 경영지표 개선은 제한적이었다. 이 때문에 “군인들의 노후자금이 부실 자회사 방어에 사용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대한토지신탁은 군인공제회의 100% 전액 출자를 바탕으로 부동산 신탁 및 개발사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다. 군인공제회는 대한토지신탁의 주요 자금 조달이나 사업에 대한 지급보증을 지원하는 등 모회사를 지원함으로써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군인공제회는 대한토지신탁의 대표이사를 공모하는 모회사다. 대한토지신탁의 대표이사 선임 과정도 군인공제회의 자회사 인사 시스템과 상법 및 관련 법규에 따라 진행된다. 대표이사직이 공석이 되면, 군인공제회는 대한토지신탁 대표이사를 공개 채용한다. 지원자들은 정해진 기간 내에 지원서를 제출하며, 대한토지신탁 인사총무팀 등에서 서류 전형을 진행한다. 양평 공흥지구 사업1본부장이 대표이사로 김용현 입김?···군인공제회 연결고리 주목 논란의 핵심은 인사와 경영 책임의 연결성이다. 군인공제회는 군인 복지와 연금 재원을 운용하는 기관인 만큼 정치권 외풍으로부터 독립성이 중요하다. 정 이사장의 임명 배경부터 산하 기업 대표 인사까지 정치적 인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기관 운영의 투명성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른 상황이다. 군 관련 기관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공제회 관계자들은 “이사장이 특정 정치 라인으로 임명되면 관련 인사들이 주요 보직에 연쇄적으로 배치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며 “기관의 본래 목적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우선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군인공제회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자회사 공우이엔씨도 자금난 논란에 휩싸일 전망이다. 공우이엔씨는 대한토지신탁과 마찬가지로 군인공제회가 출자한 자회사다. 1993년 설립된 제일종합개발은 1999년 공우개발사업소 창설로 이어졌다. 군인공제회관과 계룡대 등의 시설 관리, 예식장, 사우나, 체력 단련장 등을 직영하는 업체였다. 2000년엔 육군 오수처리시설 용역관리와 환경공사로 사업 분야를 넓혀 나갔다. <일요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부 핵심 사업은 이미 공우이엔씨 손을 떠난 상황이다. 2012년 국우터널이, 2022년엔 문학터널이 무료화됐다. 2023년엔 경북 영천 소재 군 골프장 충성대 체력단련장 운영이 종료됐다. 전자공시시스템에 게재된 2023년 감사보고서는 공우이엔씨 민간사업 관련 보증이 리스크로 작용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공우이엔씨는 BTL이 아닌 기타 분야 사업에서도 2000억원대 보증을 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1년 기준 공우이엔씨 기타 사업 보증액 규모는 835억원 규모였다. 이 중 시설관리용역 관련 보증액을 제외한 기타 사업 분야 보증액 규모는 394억원이었다. 2년 사이 기타 사업 관련 보증액이 1222억원 불어났다. 2년 사이 보증액이 약 335% 폭증한 셈이다. 이로 인해 자금난 얘기가 고개를 든 것으로 파악됐다. 공우이엔씨 상황은 2024년 들어 악화일로에 접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2023년 기준 공우이엔씨 매출액은 1066억5280만원 규모였다. 그러나 23억2986만원 규모 영업손실을 봤다. 내부적으론 2024년 손실액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내부 불안감이 증폭되는 상황이다. 공우이엔씨 적자 허덕 정 이사장과 대한토지신탁 박 대표 인사 사이의 직접적인 개입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군인공제회와 산하 기업 인사 구조상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제기되는 상황이다. 군인들의 노후 자금을 운용하는 공공성 기관에서 정치권 인맥 중심 인사가 반복될 경우 제도적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