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당신만을 위한 말’은 세상의 말들이 사라지는 소실점이고, 우리의 비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고, 진실과 거짓 너머의 영원한 침묵으로 이어지는 통로다. 아무도 알 필요 없는 오직 당신의 한 마디 말을 위해 비어있는 독백의 공간이다.”
국제갤러리가 작가 안규철의 개인전 ‘당신만을 위한 말(Words Just for You)’을 개최한다. 안규철은 일상의 사물과 언어를 주요 매체로 사용해 관객들이 사물의 본성, 세계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해 생각하도록 이끄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의 작업은 평범한 사물을 관찰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내는 데서 출발한다. 안규철은 사물의 기능이나 성격을 전복시키고 유희적인 상상으로 그것을 다른 맥락 속에 옮겨놓는다. 관객들은 그의 작품을 통해 흔히 지나치는 일상의 이면을 발견한다.
일상의 이면 발견
그의 작업은 개념미술의 범주에 속하지만 좀 독특한 데가 있다. 안규철은 단순한 미술형식의 실험을 넘어 동시대의 삶과 세계를 조명하려는 근본적인 목표를 추구한다.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초기 오브제 작업부터 사물과 이야기를 연결하는 서사적 내러티브 작업, 건축적인 규모의 설치작업을 거쳐 퍼포먼스와 영상 작업에 이르기까지, 안규철의 미술작업은 다양하다.
그 과정서 시각적이고 조형적인 영역에 한정돼온 미술의 한계를 넘어 언어·공간·촉각·청각적 경험으로 미술을 확장했다. 또 관객을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로 끌어들이면서 미술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일관적 목표를 그려왔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신작들은 초기 오브제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원·구·직선·나선구조와 같은 보다 조형적이고 근원적인 형태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구경꾼에서 참여자로
부조리와 모순에 천착
최근에 국립현대미술관서 열렸던 전시회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가 문학적인 서사를 기반으로 구성했다면 이번 전시는 구체적인 사물의 상태와 물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작품별로 살펴보면, 이번 전시 제목인 ‘당신만을 위한 말’은 진회색의 펠트로 만든 부조 형식의 작업으로 얼핏 추상조각이나 모노크롬 회화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온갖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모든 소리를 흡수하는 펠트로 덮여 있는 부드러운 벽 앞에서 관객이 침묵의 소리를 듣고 ‘자신만을 위한 말’을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펠트로 만든 종인 ‘과묵한 종’은 소리를 만들어내고 신호를 전달하는 종의 원래 기능을 제거한 사물의 역설적인 상태를 보여준다. 전시장 벽면에 지그재그 형태로 미세한 경사를 이루며 설치된 목재 레일 구조물을 따라 나무공이 천천히 굴러 내려가게 한 작품, ‘머무는 시간Ⅰ·Ⅱ’도 눈여겨볼 만하다.
가지도 못하고 머물지도 못한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중력에 의해 높은 곳에서 아래로 구르면서 여러 가지 우연으로 방향을 바꾸거나 멈추는 공의 움직임에 착안해 나무공의 낙하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궤도를 만들었다. 시작과 끝이 있는 이 과정 속에서 공의 추락이 지연되는 ‘머무는 시간’은 삶의 은유로 볼 수 있다.
캔버스 작업인 ‘달을 그리는 법Ⅱ’는 실제 사물과 이미지 사이에 발생하는 의미의 간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벽에 빛을 비춰서 생기는 보름달처럼 둥글고 밝은 원을 각기 다른 모노톤 색상이 칠해진 13개의 10호 크기 캔버스 위에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완성된 그림은 빛도 달도 아닌 구체적인 대상을 지시하지 못하는 추상적인 도상에 불과하다.
추상적인 도상
‘두 대의 자전거’는 두 대의 자전거를 반으로 갈라 자전거 손잡이는 또 다른 손잡이와 맞닿게 하고, 안장은 또 다른 방향으로 맞닿도록 재구성한 작업이다. 서로 얽힌 자전거는 어디로 갈 수도 없고 제자리에 머물 수도 없다. ‘상자2’는 이야기와 사물을 결합한 오브제 작업으로 나무상자가 그 안에 들어 있는 바퀴와 함께 언젠가 먼 곳으로 떠날 거라고 스스로에게 되뇐다. 안규철의 개인전은 이달 말까지 열린다.
<jsjang@ilyosisa.co.kr>
[안규철은?]
1955년 서울서 태어난 안규철은 197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다. 이후 1980년부터 1987년까지 <계간미술> 기자로 활동하면서 1985년 동인지 <현실과 발언>에 참여했다. 1987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했고 1988년엔 독일로 이주해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해 1995년 학부와 연구과정을 졸업했다. 1997년부터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로 재직했다.
안규철은 1980년대 초 한국의 성장만능주의, 개발중심주의 사회 속에서 대규모 조각 작품들이 사회적 고찰 없이 반복 생산되는 현실에 회의를 느꼈다. 그에 반발하듯 안규철은 작은 규모의 종이점토와 석고를 이용한 ‘이야기 조각’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단순하고 다루기 쉬운 재료로 연극의 한 장면처럼 특정 상황을 묘사한 작업이었다.
독일 유학 이후에는 일상의 사물들에 새로운 맥락과 의미를 부여하는 ‘오브제 조각’과 언어를 이용한 작업을 발전시켰다. 오브제와 언어, 이야기는 안규철이 7년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얻은 글쓰기와 개념적 사고 훈련이 결합돼 작품세계의 주요한 기반을 형성했다.
2015년에는 ‘현대차 시리즈 2015’에 선정,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개최했고, 이 외에도 ‘모든 것이면서 아무 것도 아닌 것’(2014)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2013) ‘49개의 방’(2004) 등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