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기획> ‘야동왕’ 본좌들의 세계

“100억 금방 벌어요∼”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최근 ‘제2의 소라넷’이라 불리는 ‘꿀밤’의 운영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그의 검거 소식에 뭇 남성들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리고 한 남자를 추억했다. 범죄자였지만 남성들로부터 추앙받았던 남자. 인터넷에 수만건의 음란물을 유포해 야동신화를 작성했던 ‘김본좌’다.

그는 이미 법의 철퇴를 맞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후예들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 치밀하고 교묘하게 진화를 거듭하며. 아무리 법적인 제재를 가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그들의 활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2006년 10월, 혜성처럼 등장한 한 남자가 있었다. 이 남성의 검거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네티즌들로부터 ‘김본좌’로 불린 이 남성은 음란물을 웹하드와 P2P 사이트에 업로드해오다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네티즌들은 김본좌의 검거를 알리는 언론보도에 신약성서를 인용해 ‘김본좌께서 연행되시매 경찰차에 오르시며 너희들 중에 하드에 야동 한 편 없는 자 나에게 돌을 던지라 하시니 경찰도 형사도 구경하던 동네 주민들도 고개만 숙일 뿐 말이 없더라 (본좌복음 연행편 32절 9장)’는 댓글을 달았다.

“화려한 삶을
살고 싶었다”

이 외에도 “조사실에 계시던 김본좌께 담당 형사가 물을 건네매 ‘목이 탈 것이니 드시오’ 하니 본좌께서는 ‘아니오. 빨리 수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업로드를 마쳐야 하오. 나를 기다리는 수십만명의 사람이 있소’ 하시니 담당 형사와 조사관들이 이내 숙연해지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더라 (본좌복음 수사편 25절 3장)” 등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해냈다.


뭇 네티즌들이 ‘음지의 슈바이처’로 불린 이 남성이 업로드한 음란물은 1만4000건으로 단일 사건 역대 최대 규모였다. 이후로도 몇몇 음란물 업로더들이 김본좌의 아성에 도전하다 경찰에 붙잡혔지만 그 파급력은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2014년 5월 전북 경찰이 구속한 ‘박본좌’는 김본좌의 그것을 충분히 뛰어넘고도 남았다. 박본좌가 제작해 유포한 음란물은 무려 23만건. 김본좌의 16배에 달하는 규모다.

박모(35)씨는 2011년 10월부터 부산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인터넷에 ‘촬영모델을 모집한다’는 광고글을 올렸다. 한 시간에 3만원에서 5만원까지 지급하겠다는 광고를 보고 용돈이 필요했던 가출 청소년들은 스튜디오를 찾아 모델을 자처했다.

처음에는 평상복을 입은 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촬영이 이뤄졌지만 ‘다른 옷을 입고 찍어보자’는 박씨의 요구에 모델들은 수영복과 속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이 중에는 나체로 사진을 찍거나 성행위 동영상을 촬영한 여성들도 있었다.
 

박씨는 모델들이 노출을 꺼리자 “얼굴은 찍지 않겠다”며 가면을 착용하도록 한 뒤 촬영을 계속했다. 또 탈의실에는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여성들의 동의 없이 탈의장면까지 촬영했다.

최대 음란사이트 운영자 적발
잡고보니 평범한 30대 법무사

박씨는 이 같은 수법으로 사진 23만장과 동영상 819편, 몰카 250편 등 음란물을 제작해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뒤 가입한 회원들에게 월 15만원을 받고 음란물을 제공했다. 처음 촬영이 시작된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박씨가 회원들에게 음란물을 제공한 대가로 받은 금액은 2700만원에 달했다.


3년 가까이 지속된 박씨의 범행은 음란물 모니터링을 하던 경찰에게 사이트가 발각되면서 꼬리가 잡혔다. 경찰은 음란물을 게재한 스튜디오 사이트를 확인하고 사이트 이용대금 결제 계좌와 이메일 등을 추적한 끝에 박씨를 붙잡았다. 박씨는 “스튜디오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기 위해 모델들을 모집해 사진을 찍었다”며 범행을 시인했다.

박본좌 이후에도 ‘김본좌의 후예들’은 계속해서 활동했다. 지난해 8월에는 웹하드에 대량의 음란물을 유포해 수천만원을 챙긴 4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새롭게 등장한 본좌 김모(40)씨는 2015년 7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웹하드 사이트 3곳에 130GB에 해당하는 음란물 150여편을 올렸다.

김씨는 자신이 올린 자료를 다른 사람이 내려받을 때마다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포인트가 생긴다는 사실을 이용, 약 200회에 걸쳐 포인트 현금 전환을 요청해 본인 명의 계좌로 2000여만원을 입금받았다.

“AV 저리가라”
직접 찍어 올려

같은 범죄로 69번이나 경찰 수사를 받은 전력이 있는 김씨는 2015년 2월 법원서 음란물 유포 및 저작권법 위반 등으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집행유예 기간에도 범행을 이어갔고 심지어 조사를 받으러 경찰에 출석한 당일에도 웹하드에 음란물을 올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처벌되지 않는 수위의 성인물 수천편을 올리면서 음란물을 끼워 넣는 방법으로 교묘히 단속을 피했다.

얼마 전에는 음란 사이트 ‘소라넷’ 폐쇄 이후 국내 최대 규모 음란사이트 ‘꿀밤’ 운영자가 경찰에 적발됐다. 지난 17일 부산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법무사 정모(33)씨와 IT회사 프로그래머 강모(22)씨를 구속하고 김모(32)씨 등 5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정씨 등은 2013년부터 지난해 12월까지 ‘꿀밤’이라는 음란 사이트를 운영하며 4만여건의 음란물을 게시하고 성매매 업소 등의 광고 수수료를 챙겼다.

이들은 방문자 수를 늘리기 위해 자신들이 직접 촬영한 성관계 사진이나 몰래 촬영한 동영상을 사이트에 게시했다. 또한 회원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내부 이벤트도 벌여 회원들이 올린 성관계 사진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회원에게 200∼500만원의 시상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경찰 조사결과 이들은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려고 서버를 미국에 두고 온라인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으로 거래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이어 대포폰을 쓰는가 하면 성매매 업소 업주들과 텔레그램이나 사이트 내부 쪽지로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

정씨 일당이 2016년 한 해에 비트코인을 현금화한 규모만 15억원에 달했다. 현직 법무사인 정씨는 음란 사이트 외에 불법 대마 재배에도 손을 댄 것으로 전해졌다. 정씨는 “100억원 정도의 많은 돈을 벌어 화려한 삶을 살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본좌들이 활동하는 웹하드는 일정 공간을 이용자에게 제공해 자유롭게 파일 업로드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서비스다. 다른 이용자들이 올린 파일 역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데 이때는 다운로드 용량에 따라서 유료 포인트로 결제해야 한다.


소라넷 폐쇄 후
대세였던 꿀밤

지급된 포인트는 웹하드 업체와 파일 업로더가 나눠 가지는 시스템이다. 현재 방송통신위원회에 등록된 웹하드 사이트는 총 107개. 거의 모든 웹하드는 성인 카테고리를 따로 분류하고 있다.

한 업체의 경우 시간당 70∼80개 이상의 게시글이 낯뜨거운 제목을 달고 올라오는 상황이다. 그뿐만 아니라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로 간단히 성인인증만 하면 많은 양의 ‘야동’을 접할 수 있다. 주민등록번호로 인증한다고 하지만 미성년자가 부모의 주민등록번호를 몰래 사용할 경우에는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다.

성인 카테고리에 올라오는 콘텐츠들은 90% 이상은 일본 AV다. 상당수가 근친상간이나 강간 등 비윤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국내선 유통이 금지된 불법 영상물임에도 이미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한 편에 200∼300원 정도로 결제할 수 있다.
 

국내에 저작권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 음란물이기 때문에 오히려 저렴하게 다운로드 할 수 있어 아이러니하다. 실제 우리나라는 일본산 AV의 가장 큰 수요층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어디서도 정식으로 수급할 수 없음에도 AV는 웹하드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음성적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 유명 AV배우인 아오이 소라가 방한했을 당시의 뜨거운 관심, 미국과 일본의 포르노 제작사들이 국내 소송을 준비했던 사건 등은 국내의 포르노 유통 규모에 대한 방증이다.


이들은 공통으로 ‘성적 욕구를 제한하는 나라’에 분노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관계 영상이 유출되어 고통을 겪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해 불법 음란물 규제를 계급 문제로 치환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처럼 자유롭게 유통돼 범람하는 음란물이 왜곡된 성적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불법도박·성매매 광고로 수익
방문자 늘리기 위해 이벤트도

수원 20대여성 살인 사건이나 경남 통영 살인 사건의 피의자들 경우 음란물에 탐닉했던 것으로 드러났는데 전문가들은 이들의 음란물 탐닉이 그들이 저지른 범죄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 웹하드 업체 관계자는 “성인물은 회사의 가장 큰 수익이다. 또한 경쟁이 심한 웹하드 시장서 회원들을 유인하는 미끼이므로 규제에 있어서 아무래도 눈감아주는 부분이 많다”면서 “대부분의 업체가 불법 성인물에 대해 방조한다. 일부는 ‘헤비 업로더’들과 일종의 공생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관계자는 “업로더들은 다운로드 수익의 20∼30%를 가져가며 때에 따라서는 월 수익이 200만∼300만원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월 소라넷에 대한 경찰 수사가 시작되고 소라넷 접속이 불가능해지자 유사 사이트들이 생겨났다. 이번에 붙잡힌 법무사 정씨의 사이트도 기존 소라넷 회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해 몸집을 키웠다. 이들의 검거 소식이 알려지자 온라인의 남초 사이트에서는 과거 ‘김본좌’나 ‘소라넷 폐쇄’ 등을 언급하며 슬퍼하는 댓글과 반응을 보였다.

김본좌는 야동의 유통과 생산이 불법인 한국에서 마치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한 몸을 희생한 선구자 같은 사람으로 추앙받았고 소라넷은 김본좌 이후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책임져 온 이들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통했다.

이들은 공통으로 ‘성적 욕구를 제한하는 나라’에 분노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관계 영상이 유출돼 고통을 겪고 심지어는 자살에 이르기까지 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해 불법 음란물 규제를 계급 문제로 치환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글들 대부분이 ‘가난한’ 내가 모니터를 보고 성적 욕구를 푸는 것을 왜 나라가 제한하느냐는 댓글이었다. 있는 놈들은 안 잡고 ‘건전하게’ 모니터를 보며 욕구를 해소하는 자신이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는 반응도 나올 법하다.

그러나 국내서 유통되는 야동은 디지털 성범죄의 산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꿀밤’에 업로드된 성관계 동영상 속 여성들이 가난한 남성들의 성욕 배출을 위해 이용되는 것을 바랐을까? 동영상 삭제 전문 업체 산타크루즈는 디지털 성범죄 동영상을 매달 평균 50건, 1년에 600건 이상씩 처리하고 있다고 했다.
 

피해 여성들은 매달 200만원씩 최소 3개월에서 1년까지 부담한다. 업체 관계자는 가끔 중간에 의뢰인에게 연락하면 가족이 전화를 대신 받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피해자가 사라졌거나 숨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도 ‘김본좌의 후예들’은 반성은커녕 죄책감조차 크게 느끼지 않는 것으로 조사돼 충격을 주고 있다. “용돈벌이로 한 일이다. 어차피 내가 안 올려도 인터넷에 넘쳐난다.” 동영상 유포범이 경찰에게 한 말이다.

김본좌의 등장
그리고 후예들

조사를 담당한 수사관은 “피의자들이 인터넷에 음란물을 퍼뜨리는 것을 ‘백사장에 모래 한 삽 더 퍼 넣는 일’ 정도로 생각한다”며 반성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수사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절반이 넘는 수사관들이 “용의자들은 죄의식이 없었다”고 답했다.

수년간 음란물 수사를 해온 한 경찰은 “인터넷서 음란물 유포자를 장난처럼 띄워 주는 분위기가 있어서 그런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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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