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8월13일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이 실시된다는 보도를 접했다. 이를 접하자 주로 역사소설을 집필하는 입장에서 상당히 우려스러운 생각이 든다.
일전에도 <일요시사>를 통해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역사 기록의 오류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필자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실시한다면 과연 정답 처리를 어떻게 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이뿐만이 아니다. 역사 기록에 대한 국가기관의 해석의 오류 역시 심각하다. 이와 관련 내 고향 노원을 실례로 들어보자. 조선조까지 존재했었던 노원역에 대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록이다.
‘노원역은 조선시대에 한성부에 소속되어 청파역과 더불어 병조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은 역으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일대에 위치해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업무는 역마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이 기록으로 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노원에 거주하는 사람들 역시 지난 시절의 노원역이 노원에 존재했었다고 믿고 있다. 또한 이로 인해 노원의 들판을 말들이 뛰어놀았다고 해서 ‘마들 평야’라 지칭하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노원이란 지명과 노원역은 별개임을 알지 못하고 그저 이름이 동일하다고 해서 함부로 유추해낸 결과다. 관련 근거자료를 제시하면서 노원역의 실제 위치를 찾아가보자.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이다. ‘노원역은 흥인문 밖 4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 기록에 의하면 흥인문, 즉 동대문에서 4리(약 2km) 떨어진 거리에 노원역이 있다고 했다. 지금의 노원과 상당한 거리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기록들을 살펴보자. 태조 3년 기록이다.
‘임금이 남경(지금의 서울)의 옛 궁궐터에 집터를 살피었는데, 종묘 지을 터를 보고서 노원역 들판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종묘는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 사당으로 현재 종로 3가에 위치해있다. 그런데 이성계가 종묘 터를 살피고 굳이 노원까지 가서 밤을 보냈다니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다.
다음은 성종 1년 기록이다. ‘노원역 모퉁이에서 벌아현(伐兒峴)에 이르기까지 경작을 금지하고 잡목을 심어 산맥을 보호하게 하다. 또한 노원역 모퉁이에서 보제원(普濟院) 서쪽의 큰 길에 이르기까지는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게 하다.’
상기에 등장하는 벌아현은 현재 남산 동남쪽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보제원은 제기동을 지칭한다. 두 지역 공히 노원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다음은 연산군 2년 기록이다. ‘선릉에 행행(行幸)하실 때, 노원역 서쪽 길이 굽고 협착하여 밤에 다니기 어려우니, 청하옵건대 닦으소서.’
선릉은 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으로 강남구 선릉로에 소재한다. 당시 연산군이 선릉을 가기 위해 한강의 삼밭나루(송파구 삼전동)를 이용했음을 살핀다면 이에서 언급하는 노원역이 지금의 노원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중종 조 실록을 살피면 노원역은 수구문 밖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수구문은 현재의 광희문으로 동대문과 인접해있다. 이 역시 지금의 노원과는 결코 연결 지을 수 없다.
몇 가지 사례를 들었지만 이러한 기록을 감안한다면 노원역은 예전에 동대문 밖에서 교통의 거점 역할을 했던 성동역이 있었던 제기동 일대라고 추론할 수 있다. 물론 현재의 마장동 역시 포함시킬 수 있다.
결국 노원역은 노원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도 아닌 국가기관이 허술한 해석을 내놓고 있으니…. 그래서 우려스럽다는 말이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