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힘들겠습니까?”
“지금 상황으로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윤대중 납치사건 여파 때문에 그러합니까?”
“그도 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수상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주실지 그 부분이 걱정입니다.”
김 총리가 잠시 다나까 수상을 생각한다는 듯 침묵을 지켰다.
“지금 윤대중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진행해야 할 일들이 발목을 잡혀 곤경에 처해 있음을 장관께서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물론입니다. 수상께서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장관님!”
간곡하게 부르는 소리에 오히라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김 총리가 심호흡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윤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물론 박 대통령 본인이 이 사건과 관련 없다는 부분도 있지만 그분 마음은 오로지 경제발전에 쏠려 있습니다.”
오히라가 가만히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박 대통령께서 계속 이 일이 일본과 한국 관계에 발목을 잡는다면 일본 측이 원하는 대로 즉 윤대중 씨를 원상복구 하라 하십니다. 물론 그런 차원에서 윤대중의 가택연금도 해제하였습니다.”
“원상복구라면?”
“원래 있던 자리로 데려다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다시 일본에!”
순간 오히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화되었다.
“그런 경우 일본은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라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장관께서도 그러시겠지만 수상께서도 결코 그런 일을 원치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야 물론입니다.”
“아울러.”
김 총리가 말하다 말고 주위를 살폈다.
“박 대통령께서 두 분의 노고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라 외상의 밝은 표정을 확인한 김 총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 다나까 수상이 직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상견의 예를 갖추고 집무실에 들어서자 김효 대사의 말대로 오히라 외상과 다카하시 외무성 아주국장만이 배석했다.
숨 막히는 외교전, 일본의 양보
결정 미루는 한국, 긴장감 고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허허, 고생은요. 마치 내 집 오는 듯했습니다.”
김 총리가 내 집이라는 말에 은근히 힘을 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 이번 일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니 지금도 차마 믿기지 않습니다.”
다나까 대신 김 총리와 밀접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오히라 외상이 아쉽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두 분의 인연은 참으로 오래 이어집니다.”
다나까가 부럽다는 듯 김 총리와 오히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히라 외상은 겉으로는 일본 외상이지만 실은 우리 대한민국의 주일 대사시지요.”
김 총리의 농에 참석자 모두가 파안대소했다.
“그런데 이것 참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웃음이 멈추자 김 총리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말입니까?”
“외상께서는 지금도 외상이신데 저는 총리직에 있으니 참으로 민망할 일입니다.”
재차에 걸친 김 총리의 농에 다시 한 번 파안대소가 이어졌다.
“오래지 않아 이 자리에 올라서시지 않겠소이까?”
마치 다나까가 오히라를 위로한다는 차원에서 말을 꺼내자 오히라가 슬그머니 고개 숙였다. 순간 김 총리가 상의 안 주머니에서 소중하게 편지봉투를 꺼내 다나까에게 전했다.
“이번 윤대중 사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께서 각별하게 수상께 전하라 당부하신 서신입니다.”
다나까가 김 총리가 전한 편지를 즉석에서 개봉하여 내용물을 펼쳐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순간순간 다나까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마침내 읽기를 마쳤는지 소중하게 접어 봉투에 집어넣었다.
“이런 서신을 받고 보니 오히려 송구하기 그지없소이다.”
“수상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다나까의 치사에 김 총리가 은근한 투로 화답했다.
“그리고 오히라 상.”
“말씀하십시오, 각하.”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김운정 총리께서 직접 가지고 방문하여 주셨는데 이쯤에서 이 사건에서 손을 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저희야 당연히 그를 원하고 있습니다만.”
“결국 본인의 적극성에 따라 일의 성과가 이루어진다 이 말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잠시 침묵에 빠진 다나까를 향해 김 총리의 간곡한 말투가 이어졌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하도록 합시다.”
운을 뗀 다나까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먼저 윤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수사를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야당과 경시청이 쉽게 물러설까요?”
“야당은 지금 김운정 총리께서 가져오신 박 대통령의 서신으로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경시청에 대해서는 본인이 직접 나서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나까가 말하다 말고 김 총리의 얼굴을 주시했다.
“김 총리, 이 부분은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일본 정부도 윤대중 씨가 일본에서 활약하는 일이 달갑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또 하나의 조총련 세력이 일본에서 활동하는 바와 진배없는 일입니다.”
김 총리가 오히라에게 말한 협박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아울러 더 이상 윤대중 건으로 일본과 한국 간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생각합니다.”
“박 대통령께서도 바로 그 점을 중시 여기고 계십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사건과 한국의 경제협력 부분은 철저하게 별개로 진행하면서 잠시 멈추었던 한일각료회담은 바로 다음 달 실시하도록 합시다.”
“역시 수상 각하께서는 비범한 인물이십니다.”
김운정 총리가 가만히 고개 숙였다. 아마도 그 순간 김운정 총리는 다나까의 입지전적인 과거를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이 전부인 다나까의 인생역전의 한 편의 드라마를 회상하는 듯했다.
“저희도 수상의 선처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이 사건과 연루되었다고 하는 주일 대사관에 근무했던 이성원 서기관에 대해 적절한 조처를 취했습니다.”
“그 사람으로서는 억울해하지 않을까요?”
“비록 사건에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의심살 만한 행동을 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취해야지요.”
“고맙소.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 건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그저 고맙다는 말씀 드립니다.”
다나까의 손을 잡은 김 총리의 손에 은근히 힘이 들어갔다.
“한국 영사관 폭파보다 이 새끼 먼저 죽여버리고 말테야!”
이코노구의 한 선술집에서 문석원이 잔을 비우고 소리 나도록 탁자에 내려놓았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그래, 사무실은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하냐. 내가 제명된 마당에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사무실을 굳이 유지할 필요 있겠냐?”
“그런데 형은?”
“형이라고 하고 싶겠니. 동생인 내가 제명되었는데.”
“하긴.”
힘없이 말을 받은 박상철이 천천히 잔을 들어 비워냈다.
<다음호에 계속>
[저자는?]
▲ 서울시립대 영문학과 졸업
▲ 정당사무처 공채(13년 근무)
▲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 중퇴
▲ 소설가
▲ 주요작품
단편소설 <해빙> <파괴의 역설>
장편소설 <삼국비사> <여제 정희왕후> <수락잔조> 등 다수
희 곡 <정희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