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형이 방금 이야기하지 않았어. 이미 끝난 일이라고.”
“그랬지.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거냐?”
“나도 몰라. 좌우지간 이번 사건에 대해 한번 폭넓게 대화를 나누고 방법을 모색해 보았으면 해.”
문석원의 차분한 답에 동원이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잠시 호흡을 고르고는 모임 장소로 이동했다.
단합대회가 끝나고 고영진과 김성남이 그날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김성남의 숙소에서 둘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그 자리에 술에 취한 문석원이 예고도 없이 찾아들었다.
“자네가 오사카 영사관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겠다고 협박한 문석원이라고?”
석원이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밝히자 고영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맞습니다, 위원장님.”
석원에 앞서 김성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용기는 가상하다만, 무모한 행동이었다 생각하지 않는가?”
“무모했다니요?”
“정말 모른다는 말이냐!”
고영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화되었다. 김성남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아직 나이도 있고. 혈기가 앞서니 그럴 수밖에요.”
석원이 순간 성남에게 고개를 돌렸다.
“혈기 때문이라고요!”
“그러면 그게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뭡니까!”
석원이 물러서지 않고 답을 이어가자 성남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영진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진정 하고픈 말이 뭔가?”
기어코 고영진이 나섰다.
“윤대중 선생을 구출해야지요. 아니 일본으로 모시고 와야지요.”
윤대중을 들먹이자 고영진의 입에서 절로 “끙” 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결국 자네는 내게 책임을 추궁하겠다 이 이야기로고.”
“책임 추궁이라니요?”
석원이 대답하지 않자 성남이 대신 나섰다.
“이 친구가 이리 나대는 걸 보면 그런 모양인데, 내 말이 맞지 않는가?”
“틀리다 할 수는 없습니다.”
석원이 단호하게 답했다. 순간 두 사람이 석원의 진의를 서로에게 묻는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주시했다.
“윤대중 선생을 보호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내 잘못이 있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겠네. 그러나 자네가 함부로 한청의 이름을 빙자하여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갈 협박하는 일은 절대로 묵과할 수 없네.”
“그게 왜 일본 정부입니까?”
“뭐라!”
석원의 반문에 고영진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으며 김성남을 주시했다.
“허어, 이 사람 정말 큰일 낼 사람이로고.”
고영진의 시선을 받은 김성남 역시 혀를 찼다. 두 사람의 동일한 반응에 석원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갔다.
“석원 군, 자네 정말 그 사유를 모른다는 말인가?”
“제가 공갈 협박한 곳은 일본 정부가 아니라 남조선 영사관입니다.”
“그러면‥‥‥.”
구출 방식 놓고 온건vs강경 대립
일 오사카 영사관 폭파 협박까지
고영진이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혀를 찼다.
“이 사람아, 그게 그거 아닌가?”
“어떻게 남조선 영사관이 일본 정부입니까?”
“뭐라, 자네 몇 살인가!”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고영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나이와 무슨 상관입니까!”
석원 역시 목소리를 높이자 김성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석원의 멱살을 잡았다.
“이놈 자식이,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주제에 찢어진 주둥아리라고 말을 막 해!”
말을 멈춤과 동시에 김성남의 주먹이 석원의 얼굴로 향했다. 이어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일어나고 석원이 뒤로 넘어지면서 집기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순간 문이 열리며 동원과 박 국장이 급하게 방으로 들어와 석원의 양 팔을 잡았다.
“나를 쳐!”
석원이 악을 쓰며 두 사람에게 잡힌 몸을 풀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두 사람이 힘을 주어 당기자 제자리에서 팔만 휘저었다.
“죄송합니다, 위원장님!”
“형, 뭐가 죄송하다고 그래! 윤 선생님 보호하지 못한 사람이 누군데!”
“자네 동생인가?”
고영진이 차분하게 입을 열자 동원이 고개 숙였다.
“저 혼자 무슨 일을 하던 좋은데 절대 한청 이름 팔지 못하도록 단단히 주의 주게!”
동원이 다시 고개 숙이고 급히 석원의 팔을 끌었다.
“내가 이대로 물러나나 봐라. 내 윤대중 선생 구출하지 못하면 남조선 박정희 대통령을 죽일 거야!”
“저 놈 잘라버려!”
석원이 악을 쓰며 물러나자 고영진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왜요, 대사께서도 함께하시지 않으시고.”
“어차피 저쪽에서도 오히라 외상과 실무국장만 배석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다녀오십시오.”
김운정 총리 일행이 막 주일 대사관을 떠나 다나까 수상 관저로 향하려던 중이었다. 김효 대사의 답변을 들은 김 총리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는 이상희 제1 무임소 장관과 송광수 외무부 아주국장만 동행하라 이르고 차에 올랐다.
“오히려 저보다 김 대사께서 수행하는 게 이롭지 않겠습니까?”
차가 대로에 들어서자 이 장관이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 회담은 정치적이 될 터인데 실무자의 입장에서 참석하게 되면 오히려 입장이 곤란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내 동의한 겁니다.”
김 총리의 답변에 이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런 일로 총리께서 사죄까지 하러 왔으니.”
“나야 그렇다고 해도. 박 대통령께서 유감표명까지 하게 하시다니. 그게 더욱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병선 그 사람 참으로 문제로군요, 문제.”
이상희가 가볍게 혀를 차자 김운정 총리가 시선을 창밖으로 주었다. 시선에 롯본기의 화려한 모습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빠져들자 어느 사이에 차가 수상 관저 주차장에 도착했다.
김운정 총리 일행이 차에서 내려서자 오히라 외상이 다가왔다.
“아까 말씀하신 내용은 수상께 전해드렸습니다.”
김운정 총리가 잠시 전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여 영접 나온 오히라 외상과 짧은 시간 따로 만남을 가졌었다.
“김 총리, 이런 일로 번거롭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저 역시 이런 일로 장관님을 뵙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오히라가 한일수교정상화 시 막후에서 활약했고 세간에 김운정과 오히라의 밀약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던 두 사람의 여정을 생각하는지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었다.
“은근히 지난 시절이 생각나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김 총리가 짧게 답하고 품에서 메모지 한 장을 건넸다.
“이게 무엇입니까?”
오히라가 반문과 함께 메모지를 살펴보았다.
‘포항제철 2차 차관 1억 3천만 달러, 묵호항 정비자금 3천만 달러, 새마을 사업 2차 차관 1억 달러, 전철계획 8백만 달러, 지하철 건설 8천만 달러’
오히라가 가볍게 신음을 내지르고 메모지를 슬그머니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호에 계속>
[저자는?]
▲ 서울시립대 영문학과 졸업
▲ 정당사무처 공채(13년 근무)
▲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 중퇴
▲ 소설가
▲ 주요작품
단편소설 <해빙> <파괴의 역설>
장편소설 <삼국비사> <여제 정희왕후> <수락잔조> 등 다수
희 곡 <정희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