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다른 사람들 보면 어쩌려고.”
“우리 사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거 아닌가.”
“정작 고타로만 빼고 말이지.”
문석원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슬그머니 기미코의 머리카락에 코를 댔다가는 떼었다.
“난조 상, 우리 옛날 생각하며 바닷가로 가는 게 어때?”
문석원이 대답 대신 코를 벌름거리며 방향을 잡아갔다.
“고타로와는 아직도 잘 맞지 않나?”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내게는 오로지 당신뿐이야. 그런데 당신은 어때?”
“그거야 이를 말인가. 나 역시 오로지 당신뿐이지.”
“그런데 아직도 후회되지 않아?”
“뭐가?”
“나의 구애를 그리도 완강하게 거절한 일 말이야.”
문석원이 대답 대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시절 조선인이라는 사유로 주위에서 받은 냉대로 인해 일본인들에 대한 혐오감이 싹텄고 그로 인해 일본인인 고바야시 기미코의 집요한 청혼을 완강하게 거절했던 터였다.
“가끔 후회되기는 하지. 그런데 기미코.”
“말해.”
기미코가 팔에 힘을 주며 바짝 밀착했다.
“우리가 결혼해서 함께 살았어도 지금처럼 사랑이 식지 않고 이어지고 있을까?”
“무슨 의미야?”
“결혼은 사랑도 중요하겠지만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지금 나와 내 아내의 관계를 살펴봐. 부부 사이에 오로지 돈밖에 없는 거 아닌가 할 정도야. 그래서 돈도 제대로 벌지 못한다고 냉대 받고 말이지.”
“그런데 우리는?”
“우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사랑만 갈구하고 있잖아. 그러니 오랜 시간이 흘러도 항상 당신이 새롭고 아니 사랑이 더욱 깊어지고.”
문석원이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팔짱낀 팔을 슬그머니 뒤로 밀었다. 마치 그에 대한 반항인 듯 기미코가 더욱 밀착했다. 팔로 뭉클한 기운이 전해졌다.
“이 느낌, 어떤지 알아?”
“어떤 느낌?”
“내 몸이 당신 몸을 느낄 때 일어나는 느낌 말이야.”
“글쎄,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신과 함께하면 포만감이 가득해. 당신은?”
“당신으로 인해 나를 느낀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너무 좋아.”
마치 그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느끼려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며 걸었다. 저만치 앞에 있는 바다에서 비릿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문석원이 코를 연신 벌름거렸다.
“무슨 냄새 나?”
“기미코 냄새.”
“내 냄새라니?”
“비릿비릿하면서도 고향의 품 같은 냄새 있잖아.”
기미코가 슬그머니 석원의 팔을 꼬집었다.
“짓궂기는.”
“뭐가.”
“당신 그거 이야기하는 거잖아.”
“그게 뭔데?”
기미코-문석원 은밀한 관계
과격 대응으로 치닫는 사건
문석원이 슬그머니 시침을 떼며 기미코의 배꼽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갔던 기미코가 다시 석원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그렇게 살짝살짝 꼬집어 주는‥‥‥.”
석원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려 기미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도 가느다란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모처럼 바닷가 나왔는데‥‥‥ 뭐 먹을까?”
“나는 그저 당신만 곁에 있으면 좋아.”
“정말?”
“그렇다니까.”
석원이 잠시 기미코를 주시하다 이내 근처에 있는 상점으로 다가갔다. 그곳에서 술과 간단한 안주를 준비해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침묵을 지키며 걸어가기를 잠시 후 바닷가 한적한 장소에 도착했다.
“그러면 우리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가 볼까.”
석원이 자리 잡기 무섭게 뒤에서 기미코를 껴안았다. 기미코가 잠시 자세를 바로 잡더니 이내 바다 저 멀리에 시선을 주었다.
“기미코, 정말 사랑해. 그러나.”
“그러나 뭐야.”
“당신과 나는 건너지 못하는 선이 그어져 있어.”
“그게 국적 때문이라고!”
문석원이 답하지 않고 소주를 병째 들이키고는 길게 여운을 남기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파도가 잔잔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게 문제라면 내가 국적을 바꾸면 되잖아.”
“그런다고 그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어.”
문석원의 단호한 답에 기미코가 석원의 손에 들려있는 소주를 빼앗다시피 잡아채고는 역시 병째 들이켰다.
“나 좀 안아줘.”
병을 옆으로 내려놓은 기미코가 바위를 등 뒤에 한 석원의 앞에 자리 잡았다. 흡사 한 마리 새가 둥지를 틀 듯 석원의 품에 안겼다.
“난조, 지난 시절 그렇게 잊기 힘들어?”
“기미코는 몰라. 단지 조센징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린 시절 당한 거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 벌떡 깨거든.”
“그래서 절대로 나와는 결혼할 수 없다는 이야기야?”
문석원이 대답 대신 기미코를 돌려 자신을 바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난조. 그러면 나 놔줄 수 있어? 나 훨훨 날아가게 놔줄 수 있느냐고!”
서서히 기미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건 자신 없어. 그리고 안 돼.”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기미코가 절규하듯 포효했다. 마치 그게 신호라도 된 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덮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은근히 살피고 있었고 둘의 몸은 파도가 밀려오고 또 밀려나가듯 요동쳤다.
“그런데 조금 그러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석원이 기미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뭐가?”
“우리가 처음 사랑을 나누었을 때는 초여름이었잖아.”
“그런데?”
“지금은 초가을이라 그런지 조금 서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추웠어?”
“조금.”
순간 기미코가 석원의 손을 뿌리쳤다.
“왜 그래?”
“그만큼 사랑이 식었다는 이야기잖아.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 춥다는 생각이 들 수 있어.”
“그건 말도 안 돼. 당신이 잘 알잖아. 당신 없으면 살지 못한다는 거.”
석원이 목소리를 높이자 기미코가 진위를 파악하겠다는 듯 가만히 주시했다. 그 상태에서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부드럽게 석원의 팔을 잡았다.
“하나 물어볼 게 있어.”
“말해봐.”
석원이 걸음을 놓아가자 기미코가 은근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인데.”
“뭔데.”
“당신이 오사카 소재 한국 영사관에 전화 걸어 온갖 협박을 했다고 하데.”
“그게 왜 협박인가. 윤대중 선생 일본에 올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영사관을 폭파해버리겠다고 한 건데.”
“그 사람들에게는 협박으로 들릴 수 있지. 그런데 정말 그런 거야?”
“그랬지. 그런데 그게 뭐 잘못 되었나?”
<다음호에 계속>
[저자는?]
▲ 서울시립대 영문학과 졸업
▲ 정당사무처 공채(13년 근무)
▲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 중퇴
▲ 소설가
▲ 주요작품
단편소설 <해빙> <파괴의 역설>
장편소설 <삼국비사> <여제 정희왕후> <수락잔조> 등 다수
희 곡 <정희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