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인터뷰 -어떻게 지내십니까> ‘마지막 황손’ 이석

“어떤 사람이 될까? 지금도 고민해요”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승광재(承光齋)는 고종의 연호인 ‘광무를 이어간다’는 뜻의 이름으로 조선 26대 임금 고종의 손자이자 마지막 황손 이석 황실문화재단 총재가 사는 곳이다. 한때 국민가요로 불린 ‘비둘기 집’을 부른 가수이기도 하다. 지금은 승광재에 자리를 잡고 황실문화재단의 초대 총재로 대학의 역사 문화 교수로 해설사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나본다.

스러진 대한제국 황실 종친 이석 총재. 이 총재는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 의친왕의 아들이다. 왕자로 태어난 그의 일생은 누구보다 파란만장하다. 궁에서 쫓겨나 식당을 열었고, 절집을 떠돌다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현재 기거 중인 전주 한옥마을에서 그를 만나 근황과 남은 포부를 들었다.

비운의 왕자

그는 자신의 유년시절과 부모의 관한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의친왕께서는 당시 62세, 어머니께서는 창덕궁 전화 교환원이었습니다.”

딸 부잣집의 장녀였던 그의 어머니는 피부가 하얗고 선한 외모의 단아한 여성이었다.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간 궁에서 의친왕의 눈에 들어 1941년 왕자 이 총재가 태어나게 된다. 그는 어린시절을 만평정도의 규모와 십여 채의 한옥 공간이 있는 사동궁에서 보냈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던 그에게 첫 시련은 6·25 전쟁이었다.


“제가 9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버님은 저희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의 포교원으로 피난을 했습니다.” 전쟁 후 어려운 생활이 이어지다 1955년 8월15일 의친왕이 임종한다. 무더운 여름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동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뤘다. 의친왕의 임종 후 가족의 생활은 어렵고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고달픈 인생의 서막이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후 저는 가장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안해본 일이 없는 그는 타고난 목소리가 좋았다. 사회도 보고 음악다방에서 DJ활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중 한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우연하게 노래자랑 대회에 참가해 1등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룬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작은 돈을 벌어서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곤 하면 어머니께서는 슬픈 표정을 지으시며 저를 안타까워하셨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삶의 유일한 낙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큰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던 것이다. “‘나라가 망하더니 왕손이 광대가 되었구나’하시며 땅을 치며 통곡을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는 차라리 젊은 몸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월남 파병에 자원입대 했다. 월남 파병중 부상을 입은 그는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와야만 했다. 어머니는 그 충격과 스트레스로 그가 고국에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활고 때문에 가수로 활동
처지 비관해 극단적 선택도


“동생들과 저는 힘든 날을 보내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매일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그에게 한 작곡가가 찾아오게 되는데 월남에서 있었던 부대 이름을 따 ‘비둘기 집’ 이라는 노래를 들고와 그에게 가수가 되기를 권했다. ‘비둘기처럼 다정한∼’으로 시작하는 노래는 한번쯤 들어본 곡일 것이다. 하지만 가수 이석으로서의 삶도 오래가진 못했다. ‘외로운 조약돌’, ‘두마음’ 등 노래가 나왔지만 외로움과 힘든 부분을 채워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1979년 10·26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칠궁에서 살았습니다.”

사적 제149호인 칠궁은 조선 왕의 친모이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신군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청와대 인근인 이곳에 살고 있던 이석 황손을 헌병대를 동원해 내쫓았다. 조선왕실 재산환수나 품위유지 같은 것은 바랄 수도 없었다.

그 해 12월9일 그는 “다시는 이 나라에 돌아오지 않겠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잔디깍기, 수영장청소, 술상자 나르기, 이삿짐 나르기 등 힘겨움에 잠시 고국도 잊고 살았다.

“1989년 이방자 숙모와 덕혜고모님께서 낙선재에서 돌아가시자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국을 방문하고보니 고국에 대한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신이 들었습니다.”
 

고국의 대한 사랑으로 다시 돌아온 그였지만, 미국이나 고국이나 힘든 삶은 여전했다. 빈곤한 생활이 이어지자 그는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약을 먹고 도봉산 절벽에 매달린 적도 있다고 했다.

“어느 찜질방에 머무르면서 유서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경복궁 대문에 부딪혀 생을 마감하려 했던 그는 찜질방에서 자신을 알아본 한 주간지 기자의 만류에 자살을 포기했다. 그 기자는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손이 찜질방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그렇게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후 일간지·잡지·외신 할 것 없이 인터뷰 요청이 쇄도해 화제가 되곤 했다. 이를 계기로 전주와의 인연이 생겼다. 한 지인이 주선해 2003년 8월 전주의 한 식당에서 강연을 했다.

이후 당시 김완주 전주시장이 한옥 600채가 들어서는 대규모 한옥마을을 조성하기로 하고 그에게 150평짜리 한옥을 지어줬다. 고종황제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승광재(承光齋)라 이름 짓고 2004년 10월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다.

“당시 62세였는데 따뜻한 전주시민의 환대에 고마운 마음으로 정을 붙이며 살게 되었습니다. 13년간의 생활 동안 어려운 상황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현재 전주시민의 과한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건강하게 지내는 동안 어떻게 보탬이 되는 황손으로 살까, 어떤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까? 늘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다.”

박정희, 노무현…
대통령 인연 눈길


이 총재는 ‘살아있는 역사’라는 별명에 맞게 역대 대통령들과의 일화도 많다. 

“모든 걸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기억에 남는 몇 분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강인에 보이지만 진실성이 있고 정이 많으신 분’이라고 첫인상을 설명했다. “‘황성옛터’를 불러드렸는데 늘 쓰고 다니시던 검정 선글라스 아래로 눈물이 흐르니까 슬그머니 훔치시며 노래를 들으셨습니다. 강인함 속에서 잔잔한 고향 같은 분으로 남아있습니다.”

다음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만남이다. 노 전 대통령은 당선 후 이 총재가 살고 있는 전주에 내려온 적이 있다. 행사 후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황손께서는 무엇이 소원입니까?”하고 물었다. 이 총재는 서울 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인 태조 이성계 할아버지의 어진을 전주의 경기전으로 보내 달라고 간청했고, 2008년 10월23일 어진 봉안행렬이 전주에 내려오게 됐다.

“약속을 지켜주신 것만으로도 노무현 대통령께 감사함을 느낍니다. 노 전 대통령은 오래전 만나왔던 친숙함이 배여 있어서 아주 편한 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내비췄다.

평범한 삶


“박근혜 대통령은 더 조심스럽습니다만 대통령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은 항상 측은지심입니다. 아마도 그 옛날 제가 부모님을 잃고 살았을 때의 기억이 작용한 거겠지요. 첫 여성 대통령으로서 당당하고 건강하게 정국(靖國)을 마무리 해 주실 거라 믿고 먼 발치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행사에서 여러번 뵈었기 때문에 직접 담소 나눌 기회는 없었지만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려운 경제문제, 국제적 관계에서의 대한민국의 위상을 잘 지켜주시리라 믿고 응원하겠습니다.”


<ktikt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이석 부친 의친왕은?

의친왕은 1877년생으로 순종황제보다 세 살 많다. 62세에 이석을 낳았다. 의친왕은 1900년대 초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에 있는 대학을 5년 간 다녔다고 한다.

당시 조선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항일투쟁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그는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기차로 평양을 거쳐 신의주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만주 안둥[安東: 현 랴오닝성 단둥]에 도착했다. 하지만 의친왕이 자택에서 사라지자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전개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다시 국내로 송환됐다.

그의 망명실패로 국내 항일 조직이었던 대동단 조직도 큰 타격을 입었다. 1927년 그 뒤 여러 번 일본 정부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고 끝까지 배일(排日)정신을 지켰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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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