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자금 투입된 기업들 현주소

눈치 안보고 방만기업 살리고자 혈세로 돈잔치

[일요시사 경제팀] 양동주 기자 = 밑 빠진 독에 열심히 물을 채운다 한들 그 끝은 요원할 뿐이다. 물을 가득 채울 요량이라면 구멍 난 곳을 찾아 고치거나 아예 새로운 독을 찾는 게 순리다. 누구나 알법한 상식이지만 정작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이 같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방만한 운영으로 위기에 봉착한 기업을 살리기 위해 무작정 국민의 혈세를 쏟아 붓는 모습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공적자금’은 정부가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정부재정자금을 의미한다. 통상 금융기관이 기업여신을 회수하지 못해 어려움에 처할 경우 투입된다. 이 경우 공적자금은 정부예산에서 직접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금보험공사와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채권을 발행해 조달한다.

다만 예금보험공사와 자산관리공사가 발행한 채권의 이자와 원금손실은 예산으로 부담하기 때문에 때에 따라 국민의 부담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공적자금 투입 여부를 두고 혈세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못받는 돈
떼인 돈도

지난달 7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병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 따르면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액은 지난 6월 말 기준 168조6553억원에 이른다. 은행, 증권, 투자신탁, 보험, 종합금융, 저축은행, 신협에 지원된 공적자금을 합한 규모다.

문제는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 가운데 지금껏 회수하지 못한 금액이 60조원에 육박한다는 사실이다. 현재까지 회수 금액은 110조8525억원, 회수율은 65.7%에 불과하다. 특히 은행에 지원된 공적자금 86조8768억원 가운데 회수금액 66조3243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20조5525억원은 완전 회수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보험에 들어간 공적자금 21조2012억원 가운데 미회수금액은 14조2148억원이다. 또한 22조7503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종금사의 경우 12조121억원의 미회수금액이 남아 있다.

증권·투신에는 21조8926억원의 공적자금이 지원돼 14조881억원이 회수됐다. 미회수 공적자금은 7조8045억원이다. 2011년 부실 사태를 겪은 저축은행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8조5114억원이고 미회수금액은 2조5063억원이다. 5조2억원의 공적자금이 들어간 신협의 경우 1조5810억원이 미회수금액으로 남았다.

기업별로 살펴보면 금융업 분야에 공적자금 투입이 집중됐고 우리은행, 한화생명, 수협, 서울보증보험 등은 아직까지 미회수금액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은행에 투입된 공적자금중 미회수금액은 약 4조7000억원이다. 현재 정부는 우리은행 보유 지분 중 15%를 중동지역 국부펀드에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가 보유한 우리은행 지분은 51.04%(3억4514만2000주)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부실화 된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에는 3조55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고 약 1조6000억원을 회수했다. 현재 정부가 가지고 있는 한화생명 지분은 22.75%(1억9759만1000주)다. 정부는 시장상황을 고려해 지분 매각을 추진할 방침이다. 지난 3월에도 지분 2%를 매각한 바 있다.

하지만 한화생명에 투입된 공적자금의 추가 회수는 난항이 예상된다. 한화생명 주가가 8300원대에 머물러 있는 만큼 주가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반등해야 원금회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금융권 170조…회수율 70%도 못미쳐
국민 세금 눈먼돈?…무작정 쏟아부어


외환위기 당시 파산위기에 몰렸던 서울보증보증에 들어간 공적자금 10조2000억원의 회수도 불투명하다. 정부의 서울보증보험 지분율은 93.85%(3276만4000주)다. 정부 관계자는 “외환위기 당시 기업들의 부실 때문에 보증회사들이 시스템 안정을 위해 공적자금으로 매꿔 준 부분이라 서울보증보험에 투입된 자금은 회수가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반면 우선출자증권(주식회사의 상환우선주 성격)을 가지고 있는 수협의 경우 1조1580억원의 공적자금 회수가 가능할 전망이다. 예금보험공사 관계자는 “현재는 수협중앙회의 신용사업 특별회계를 통해 회수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 수협은행의 당기순이익을 중앙회가 배당받아 특별회계를 통해 공적자금을 상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나마 앞의 사례는 양호한 편이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에 따른 구조조정 과정에서 투입된 공적자금 27조원 가운데 지금까지 회수된 금액은 6조원에도 못 미친다. 지난달 21일 민 의원이 예금보험공사로부터 제출 받은 ‘2011년 이후 부실저축은행 지원 및 회수현황’에 따르면 예금보험공사는 2011년 이후 31개 부실 저축은행에 27조1701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5조9031억원을 회수하는데 그쳤다. 회수율은 21.7%.

솔로몬저축은행에 3조5243억원으로 가장 많은 공적자금이 편성됐고 부산저축은행 3조1580억원, 토마토저축은행 3조150억원, 제일저축은행에 2조3941억원이 투입됐다.

이들 중에서 공적자금 회수율이 저조한 곳은 에이스저축은행(3.12%)과 보해저축은행(3.72%), 부산2저축은행(7.40%), 부산저축은행(8.05%) 등이다. 심지어 해솔저축은행과 골든브릿지저축은행의 회수실적은 전무했다.

밑 빠진 독
대우조선해양

반면 대영저축은행의 경우 투입된 1426억원 전액을 회수했다. 6677억원이 투입된 신라저축은행은 50.5%, 3672억원이 들어간 더블유저축은행은 45.5%로 회수율이 높은 축에 속했다.

이처럼 저조한 공적자금 회수율이 공론화되는 가운데 최근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자금 지원방안이 논의되자 공적자금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지난달 29일 산업은행은 이사회를 열고 대우조선해양 실사 결과 및 자금 지원 등 정상화 방안을 공식 발표했다. 지원 방안에는 대우조선해양에 4조2000억원의 자금을 지원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지원규모는 내년도 상반기 대우조선해양의 부족자금 4조2000억원을 고려한 조치다.

우선 자본확충은 유동성 지원과 연계한 유상증자, 출자전환 등의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지원으로 산은은 2016년 말까지 대우조선의 부채비율을 500% 이하로 끌어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는 대우조선해양의 정상적인 사업 수주를 지원하기 위해 선수금환급보증(RG)의 90%를 각각 1/3씩 나눠 공급할 예정이다. 당초 산업은행은 대우조선에 유상증자와 신규대출로 2조원을 지원하고 수출입은행 등이 나머지 2조원을 분담하는 방안이 거론된 바 있다.

산업은행의 자금지원과 함께 대우조선해양은 강력한 구조조정을 실시할 계획이다. 또한 인력과 조직을 최적 생산 규모, 선박 포트폴리오에 부합할 수 있도록 축소할 예정이다.

그러나 채권은행들의 지원 방안에 대한 비난 여론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세금을 투입하더라도 대우조선해양의 미래를 낙관하기 힘든데다 책임자 문책은 덮어둔 채 지원방안 마련에 나섰다는 지적이 빗발치고 있다. 즉, 금융당국의 안일한 관리감독이 이미 공적자금 투입으로 연결된 만큼 지원 방안에 앞서 잘못을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산업은행 노동조합은 관리감독 의무가 있는 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 부실 사태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인 뒤 실사에 따른 책임소재 파악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산업은행 노동조합 관계자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방식은 은행이 취해야 할 시장안전판의 구조조정 방식이 아닐뿐더러 큰 부실사태를 일으킬 것”이라며 “위기일수록 원칙에 따른 과감한 정책 결정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수혈만 해놓고 관리 허점투성
줏대 없는 당국 정책 조정 논란

대우조선해양 자금 지원이 결정되자 화살은 곧바로 국책은행에 쏠리고 있다. 국책은행들이 기업자금조달이나 수출금융지원 등 본연의 임무는 외면한 채 기업구조조정 등 전문성이 없는 분야에 손을 대면서 '부실기업 처리반'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국책은행의 손실은 결국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하는 만큼 부실 관리에 대한 책임과 함께 국책은행의 본분에 대한 비판마저 커지고 있다.

특히 산업은행은 최근 5년간은 대우조선해양 최고재무책임자(CFO)에 자사 출신 인사를 임명하는 등 회사 전반을 관리·감독했다는 점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게다가 산업은행은 STX의 허위장부를 근거로 9000억원을 지원해 적자를 기록한 전력이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 외에는 기업 구조조정을 담당할 수 있는 곳이 전무한 상황”이라며 “은행들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기업 구조조정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수출입은행 역시 마찬가지다. 2011년 이후 수출입은행이 유동성을 지원한 기업 중 법정관리에 돌입한 회사는 102곳이며 이들에 대한 여신 규모는 1조3000억원에 달한다. 특히 성동조선해양 구조조정 난항으로 대규모 손실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성동조선해양의 구조조정이 더디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SPP조선 역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수출입은행의 속을 썩이고 있다. 수출입은행은 정부 지분이 70.08%(한국은행 15.04%·산업은행 14.88%)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국책은행은 정부 소유인 만큼 여신공급이나 구조조정에 있어 정치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달리 해석하자면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고 위기의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모든 상황에 윗선의 개입과 압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수출입은행은 성동조선해양에 채권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3000억원을 단독으로 지원했지만 이 과정에서 특정 국회의원의 눈치를 본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대규모 손실 불가피

문제는 국책은행이 부실기업에 투입하는 공적자금은 궁극적으로 국민 세금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대우조선해양을 ‘혈세 먹는 하마’로 바라보는 시선과 지원에 앞서 분식회계 등 불거진 의혹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IB업계 관계자는 "국책은행의 관리 소홀로 결국 부실기업의 손실을 세금으로 메워주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며 "국책은행이 부실기업을 관리하고 구조조정을 이뤄낼만한 역량이 없다면 아예 기업구조조정 업무에서 손을 떼든지, 역할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되자 국책은행의 정책금융체계를 대폭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구정한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서울 은행회관에서 열린 ‘정책금융 역할 강화방안 세미나’에서 “국책은행은 대기업이나 각종 지원이 많은 중소기업보다 중견기업 지원에 집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djy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대재벌’ 산업은행 파워

정부가 100% 지분을 지닌 산업은행은 지난 6월 기준으로 지분 15% 이상을 보유한 자회사를 무려 288곳 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정부기관을 제외한 비금융 자회사가 116곳에 이른다.

지금껏 산업은행은 자금난에 직면한 기업을 출자전환 형태로 지원하면서 자회사로 편입해 왔다. 물론 국책은행인 만큼 경영정상화를 거쳐 시장에 지분을 매각한 후 공적자금을 회수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그러나 산업은행은 식구를 늘릴 때만 기민할 뿐 정작 품안의 구성원을 출가시키는 데 미적거리고 있다. 결국 자회사 매각에 소극적이었던 행보는 엉뚱하게도 산업은행을 수많은 대기업을 거느린 '재벌'로 둔갑시켰다.

그 사이 STX조선해양마저 산업은행 휘하에 편입될 수 있다는 소문마저 나돌고 있다. STX조선은 글로벌 불황 여파로 유동성 위기에 처한 2013년 5월 자율협약에 들어갔다. 자율협약 체결 이후 회계법인 실사를 거쳐 STX조선에는 2조7000억원의 자금이 투입됐다. 그러나 잇단 선박수주 취소와 원가 경쟁력 하락으로 손실이 계속 발생해 추가 지원이 불가피해졌고 이듬해 채권단은 1조8000억원을 추가 지원했다.

이렇게 4조5000억원에 달하는 자금이 투입됐지만 여전히 STX조선은 자본잠식 상태로 채권단 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STX조선해양을 산업은행이 떠안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산업은행마저 정상화에 실패하면 곧바로 국민의 혈세가 투입돼야 한다. 문제는 산업은행 휘하로 편입된 상당수 기업들이 가치 하락을 겪고 있으며 그만큼 매각작업이 더뎌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분 15% 이상 보유 회사 288곳
때마다 헐값·특혜 의혹 시달려

실제로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2008년 매각 추진 당시 6조원 수준으로 평가됐지만 현재 시가총액은 약 1조원에 불과하다. 산업은행 휘하에 들어가면 회생하지 못한 채 산업은행 계열사로 주저앉아 경쟁력을 잃는다는 지적이 계속 나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금호산업의 경우 매각까지 5개월을 끌다 7228억원에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에게 넘겼다. 경영정상화까지 1조원 이상의 금액이 투입됐다는 점에서 사실상 손실을 본 셈이다. 특히 금호산업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박 회장에게 다시 넘기는 과정에서 ‘특혜성 구조조정’이라는 사례마저 남겼다.

물론 산업은행은 한진그룹이나 현대그룹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은행이 그동안 축적해 온 기업 구조조정 경험에 비춰 보면 전문성이 기대이하라는 지적이 많다.

IB업계 관계자는 “산업은행은 정책금융기관으로서 대형 수출산업 지원을 주로 하다가 부실기업 인수 등을 겪으면서 허점을 노출하기 시작했다”며 “최후의 보루 역할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측면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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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