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한가위를 맞이하여 정치에서 잠시 벗어나 일반 시사로 눈을 돌려본다. 그런 차원에서 서울 근교에 있으며 수도권 주민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남이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 남이섬에 대해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모 방송조차 크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남이섬의 행정구역에 관해서다. 다수의 사람들은 남이섬이 경기도 가평에 속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입구 즉 선착장만 가평이고 남이섬은 춘천으로 강원도에 속한다.
둘째, 모 방송국 역사프로그램에서도 혼돈을 빚은 남이섬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다. 섬 이름이 남이가 된 데에는 두 가지 사유를 든다. 하나는 남이 장군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남이 장군의 귀양지였기 때문이라 한다.
먼저 남이 장군의 무덤이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다. 남이 장군은 조선 8대 임금인 예종 치세 때 대역죄에 연루되어 거열형을 당했다. 거열형은 팔과 다리 그리고 목을 몸통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아울러 거열형은 군기시(현재 서울 시청역 부근)에서 집행하고 수급은 그곳에 일정 기간 효수된다. 효수 기간이 끝나면 이미 갈가리 찢어진 여러 신체와 함께 새남터(서울 용산구 이촌동 앞 한강변 모래사장)에 가져다 버린다. 물론 그 누구도 시체에 접근할 수 없었고 경비 역시 삼엄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저 남이 장군의 수급만, 이미 여타의 신체는 다른 사람들의 신체와 섞여버려 찾을 수 없음, 몰래 훔쳐내어 상기 장소에 안장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전혀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남이 장군이 거열형을 당한 다음날 그의 어머니도 죽임을 당할 정도였다. 하여 남이 장군의 진짜 무덤은 있을 수 없다.
다음은 남이 장군의 귀양지라는 부분에 대해서다. 역시 이 부분도 실기하고 있다. 남이 장군은 귀양 간 적이 없다. 대역죄에 연루되자마자 곧바로 거열형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섬의 명칭이 남이일까. 다산 정약용의 작품 <천우기행(穿牛紀行)>에 그 해답이 실려 있다.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지점에 이르러 지은 시 중 일부다.
꽃다운 물가 잔풀 뿌리에 물이 잠기는데
남이 장군 자라던 마을 아직도 있네
芳洲細草水沈根(방주세초수심근)
生長南怡尙有村(생장남이상유촌)
상기의 시를 살피면 그 지역의 명칭이 남이인 사유가 드러난다. 남이 장군이 성장한 마을이기에 그렇다고.
셋째, 언제부터 섬이 되었느냐의 문제다. 다수의 사람들은 남이섬이 원래는 섬이 아니었는데 청평댐 건설로 육지가 물에 잠겨 섬이 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런지 다시 정약용에게 해답을 구해보자.
정약용은 그의 저서 <산수심원기>에서 그 지역에 대해 남이서(南怡嶼)라 기록했다. 島(도)가 큰 섬을 가리키는데 반해 嶼(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작은 섬을 의미한다. 따라서 남이섬은 애초부터 섬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혹설에 의하면 평시에는 육지였다가 홍수가 나면 섬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연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남이 장군이 태종 이방원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의 아들이라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정선공주의 남편은 남이 장군의 할아버지 남휘로 남이 장군은 그녀의 손자가 된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밝혀지는 사실들에 대해 심지어 방송조차 실기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간략하게 기술한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