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플러스 먹은' M&A 제왕 김병주 실체

‘7조7000억 베팅’ 대기업 총수 안 부럽다

[일요시사 경제팀] 박호민 기자 = 아시아·태평양 기업인수합병(M&A) 역사상 최고 인수가 기록이 깨졌다. 테스코가 홈플러스를 7조7000억원대에 팔면서다. 업계는 엄청난 규모의 홈플러스를 단숨에 삼킨 인수업체에 눈길이 쏠렸다. 인수업체는 국내 토종 사모펀드(PE) MBK파트너스. 자연스레 MBK파트너스 수장에게도 관심이 집중됐다. 주인공은 김병주 회장이다.

국내 사모펀드 업체 MBK파트너스(이하 MBK)는 테스코로부터 홈플러스를 7조6800억원에 지분 100% 인수계약을 체결했다고 지난 7일 밝혔다. 이로써 종전 아시아 M&A 역사사상 최고 인수가 기록을 경신하게 됐다. 종전 인수 최고가는 지난 2007년 신한금융지주의 LG카드 인수 금액 6조 6765억원.
 
인문학도 소년
M&A 거물 성장
 
홈플러스 매각 과정은 그 규모만큼이나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매각 과정에서 김병주 회장의 역할도 부각됐다. 테스코가 지난 6월 5일 HSBC증권을 홈플러스의 매각주관사로 선정하면서 본격적인 입찰경쟁이 시작됐다. 인수에 참여한 후보자는 MBK를 포함해 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 KKR 등 글로벌 사모투자전문회사(PE)였다. 6월 24일 예비제안서가 마감되면서 경쟁자들의 윤곽이 드러났다.
 
인수 희망자는 MBK, KKR, 어피니티, 칼라일, 텍사스퍼시픽그룹(TPG) 등 세계적인 PE들이 대거 참여했다. MBK의 인수에 험로가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7월1일 적격후보(숏리스트)가 발표됐다. 숏리스트로 선정된 업체는 MBK파트너스, KKR, 어피니티, 칼라일 등이었다. 다행히도 글로벌 PE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MBK의 인수 가능성은 높아졌다. 7월23일에 회사 현황 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차례 홍콩에서 모인 후 8월 매각을 위한 치열한 물밑 작업을 벌였다.
 

이 기간 MBK 김병주 대표와 실무진들은 휴가 기간에도 불구하고 경쟁사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분석하며 인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역량을 집중했다. 마지막까지 MBK의 인수를 어렵게 만드는 회사는 글로벌 PE인 KKR이었다. KKR은 어피니티와 컨소시엄을 구성하면서 MBK를 압박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KKR컨소시엄은 투자 자금 증빙에 실패하면서 우선협상대상자에서 제외됐다. 결국 MBK는 홈플러스 인수에 성공했다. 국내 M&A사를 새로 쓴 순간이었다. 10년차에 접어든 국내 토종 PE가 오랜 전통을 가진 글로벌 PE를 이긴 것도 업계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김 회장에게는 6년전 OB맥주 인수전에서 KKR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한 셈이다. 김 회장은 사석에서 종종 OB맥주와의 인수전 당시를 회상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이번 승리에 대한 의미는 남다를 것으로 판단된다.
 
인문학을 전공한 김 대표의 삶은 치열한 승부사의 인생과 닮아있다. 이 같은 모습은 <한국경제신문사>에서 발간한 <1조원의 승부사들>(저자:박동휘, 좌동욱)에서 잘 나타나 있다. 총 304페이지로 구성된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1963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10세에 혼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때였다.
 
“정말 막막했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졌다. 그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무조건 영어책을 소리내어 읽으라고”. 그때부터 김 회장은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소설류를 많이 읽었는데, 그러면서 문학도의 꿈을 꾸게 됐다. 평소에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주저하지 않고 “책읽기”라고 말할 정도로 독서광이 됐다.
 
ING생명, 네파, 씨앤엠, 코웨이 등 인수
 한국·일본·중국서 총 22개 기업 성공
 
키 작은 동양의 아이라고 놀림 받고 소외되는 것이 싫어 운동도 열심히 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엔 야구부에서 활약했고, 대학 농구팀에선 포인트가드를 맡았다. 한때는 영화감독과 야구 구단주를 꿈꾸기도 했다. 미국 동부의 명문 사립대인 하버포드칼리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작가의 꿈을 꾸었지만 결국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때의 경험이 이후 김 회장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한다.

 

국내 사모펀드 업계에서는 그를 두고 ‘고급스러운 영어를 가장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달변가’, ‘영어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으로 평가할 정도다. 실제로 2009년 유럽 대형 투자자의 자금을 끌어내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최고 투자책임자가 그의 유창한 영어 구사 능력에 압도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저 아시아인이 도대체 누굽니까?”라고 물을 정도였다고 한다. 깊은 인문학 지식을 활용해 고객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와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으면 누구라도 후덕한 인상과 겸손한 말솜씨에 반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한 첫 직장은 월가의 골드만삭스였다. 김병주 회장은 골드만삭스 시절을 “밤새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코피 흘린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다”고 할 정도로 죽도록 고생해 다시는 월 가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결심까지 할 정도였다고 했다. 비록 힘들긴 했지만 20대의 그가 골드만삭스에서 얻은 경험들은 훗날 엄청난 자산이 됐다. 
 
OB맥주 패배 
이번에 설욕
 
당시 골드만삭스는 적대적 M&A의 방어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는 M&A 광풍의 현장에서 2년 정도 경험을 쌓은 후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더 큰 도전을 위해 하버드 MBA 과정을 밟았다. 하버드 MBA를 마친 김병주 회장은 발걸음도 하지 않겠다고 그토록 다짐했던 월 가로 돌아왔다.
 
그것도 골드만삭스라는 친정으로의 복귀였다. 그 이후 뉴욕 본사와 홍콩 지사를 거치며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4년 반을 더 일한 뒤, 33세이던 1996년 살로만 브라더스로 직장을 옮겼다. 하지만 살로먼에서의 생활도 3년을 넘지 못했다. 1999년 당시 최고의 사모펀드 운용사로 명성을 날리던 칼라일그룹에 입사했다.
 
칼라일에 들어간 이후 1998년 외환위기가 불러온 한국 M&A 시장의 급팽창, 그리고 외국계 사모펀드들의 M&A 맹활약 등을 생생히 목격했다. 그리고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이것을 기반으로 김병주 회장은 37세이던 2000년 한미은행 인수를 주도하면서 글로벌 사모펀드 시장의 주목을 한몸에 받기 시작했다. 이는 칼라일 그룹 역사상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큰 거래였고, 칼라일그룹 최초의 금융회사 투자이기도 했다. 심지어 입사 1년 만에 성사시킨 거래였다.

 
3억 달러(약 3000억원)를 투자해 원금 대비 2.3배의 수익을 칼라일 그룹에 안겨줬다. 칼라일그룹이 설립 이래 거둔 가장 큰 규모의 수익이었다. 이게 2004년 초의 일이었다. 2004년 12월, 국내에 사모펀드법이 태동할 무렵 김병주는 이미 세계적인 사모펀드 운용사인 칼라일그룹에서 ‘거물’로 성장했다. 그는 칼라일그룹 전체 매니지먼트 커미피 7인 멤버 중 하나였다.
 
칼라일그룹 경영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는 이 자리의 참석자는 창업자 3명과 유럽 헤드, 아시아 헤드, 벤처 헤드 등이었다. 그 아시아 헤드가 바로 김병주 회장이었다. 그는 한국 시장에 엄청난 변화, 기회가 오고 있는 것을 직감했다. 드디어 정부가 주도하는 사상 초유의 사모펀드 시장이 한국에 열리고 있는 것을 목격한 그는 독립을 결심했다.
 
10세 때 홀로 미국 땅으로 ‘성공 신화’
설립 10년만에 아시아 최대 PE로 키워
 

2005년 3월 1일, 하버드 동문인 윤종하 현 MBK파트너스 부회장을 비롯해 김병주 회장과 인척간인 부재훈 대표와 홍콩 헤드였던 케이시 쿵, 일본 헤드였던 켄스케 시즈나카 등 6명의 칼라일그룹 멤버들과 함께 아시아 지역 펀드로는 사상 최대 규모인 15억 달러짜리 ‘MBK 1호 펀드’를 만들면서 사모펀드 시장에 데뷔했다. 저자는 당시 분위기에 대해 그가 독립을 선언하자 칼라일그룹은 발칵 뒤집어졌다고 설명했다. 어쨋든 자신의 이름 석자 MBK (마이클 병주 킴)를 내건 사모펀드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그 이름 앞에 붙길 원한 수식어는 딱 두 가지였다.
 
‘로컬’과 ‘독립’. 김병주 회장은 “사모펀드 역사상 최초로 한, 중, 일을 포괄하는 동북아 사모펀드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투자 지역으로도 기존과 다른 형태의 펀드였기에 운용도 아시아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당시만 해도 아시아 투자를 하는 데 뉴욕에 있는 미국 보스들의 결제를 받아야 했어요. 그 고리를 끊고 싶었던 겁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고 전했다.
 
현재 MBK는 김 회장의 계획대로 상반기 현재 자산규모 82억 달러에 육박하는 국내 최대규모의 PE로 성장했다. 서울과 도쿄, 상하이, 홍콩 등에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MBK의 투자 기업들의 매출액은 미화 287억 달러, 직원 수는 4만1065명에 달한다.
 
지난해에는 ING생명을 1조8400억원에 사들였고, 앞서 아웃도어업체 네파, 케이블방송사업자 씨앤엠(C&M), 정수기업체 코웨이, HK저축은행, 유니버설스튜디오재팬, 에이팩로지스틱스(중국), 루예제약(중국), 뉴차이나생명(중국), 인보이스(일본), 고메다(일본) 등 한국 일본 중국 등에서 총 22개 기업을 인수한 바 있다. 한국기업의 보유 비중은 50% 수준이다.
 
박태준 사위
결혼도 눈길
 

김 회장이 언론의 관심을 받으면서 그의 장인인 고 박태준 전 총리(1927∼2011)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고 박 전 총리는 1962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1968년 포항종합제철소를 설립했다. 정가에는 1997년 국회의원으로 입문해 자민련 총재까지 지냈으며, 2000년 1월 32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바 있다. 그러나 취임 4개월만에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을 받고 물러났다. 퇴임 후 그는 포스코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김 회장의 부인 이력도 눈길을 끈다. 고 박 전 총리의 넷째 딸이자 김 회장의 부인인 박경아 씨는 과거 전두환 아들 전재용씨와 결혼했으나 이혼한 이력이 있다. 김 회장과의 결혼은 재혼인 셈이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