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 걸린 동물원 동물들 '실태보고서'

빙빙 도는 코끼리 “도대체 왜?”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동물원 동물들의 행동이 이상하다. 제자리를 맴도는 등 이상행동을 보인다는 목격담이 잇따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동물원 동물들이 생태와 맞지 않는 인위적인 공간에서 스트레스로 인해 일종의 자폐증인 ‘정형행동’을 보인다고 진단한다. 동물원 설립과 관리에 대한 부분이 미흡해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동물원법 제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우리나라 동물원의 실태와 동물원법의 주요 내용을 알아봤다.

 
유치원 교사 최모(28)씨는 얼마 전 원아들을 데리고 수도권의 한 동물원을 찾았다. 그림책에서만 봤던 동물들을 실제로 접한 아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방방 뛰었다. 최씨는 이런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울한 동물들
불편한 관람객
 
그러던 중 한 여아가 최씨에게 다가와 “코끼리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며 이상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코끼리의 행동은 최씨가 봐도 이상해보였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며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코끼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의 모습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발견됐다. 한 아이가 의문을 제기한 뒤로 수십여 명의 아이들이 교사들에게 달라붙어 동물들의 행동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최씨와 동료교사들은 무어라 대답해줄 수 없었다.
 
동물원은 연인들의 단골 데이트 코스로 손꼽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대학생 이모(23)씨는 얼마 전 남자친구와 함께 서울의 한 동물원을 찾았다. 기대를 품고 동물원 곳곳을 구경했지만 동물들의 표정과 행동에는 진한 어두움이 묻어 있었다. 몸 곳곳에 상처의 흔적이 역력했다. 동물들이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씨는 동물들을 촬영하기 위해 챙겼던 카메라의 셔터를 차마 누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동물원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달랬다.
 

동물자유연대가 지난 1월 1095명에게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과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은 결과 96.6%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동물이 겪는 고통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드물다. 
 
 
보통 돌고래 하면 돌고래가 물 밖으로 뛰쳐나와서 다시 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는 돌고래의 이상행동이다. 동물자유연대 김영환 간사에 따르면 돌고래는 야생에서 물 밖으로 뛰쳐나와 뭍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 같은 모습은 오로지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동물을 억압하는 동물원의 환경 때문에 많은 동물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
 
동물 전문보호단체인 ‘동물을 위한 행동’은 지난 17일 서울 정동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공영동물원의 위기와 한국 동물원의 발전 방향’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2년6개월간 대구, 전주, 대전, 광주, 청주, 진주 등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국내 공영동물원 6곳과 민영동물원 7곳을 조사해 작성했다.
 
종일 제자리 맴도는 이상행동
불안한 사육환경에 자폐증까지
 
동물을 위한 행동은 보고서에서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 공영동물원은 만성적인 재정·전문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시설물도 30년 이상 낙후돼 있다”며 “대부분 동물원에서 동물을 작은 시멘트 상자 안에 가둬둔 탓에 이들은 전시관 내 좌우를 끊임없이 오가는 등 이상행동을 했다”고 전했다.
 
단체 측은 “조사 과정에서 이상행동이 심각한 동물들은 고양이·곰·개과, 영장류 등 고등동물들이었다”며 “무료하고 정형화된 작은 공간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이상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단체 관계자는 현재 임시국회에 계류 중인 동물원법과 관련해 “그동안 법적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던 동물원을 법과 제도로 끌어오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도 “법이 동물쇼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원래 법 제정 취지가 무색해 질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동물원은 동물을 사육하면서 관람의 형태로 대중에게 공개함으로써 동물의 습성 등 생태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전달하고 야생동물의 보호 및 증식 등 종의 보존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시설이다. 그러나 일부 동물원의 경우 동물쇼에 이용하기 위하여 동물을 가혹한 방법으로 훈련하거나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최소한의 사육환경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환경에 사육동물들을 거의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동물원 내 동물의 복지와 환경을 개선하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털 뽑는 타조
정신적인 고통
 
현행법상 동물원 내 사육동물에 대한 적정한 사육환경 제공 등 동물의 복지에 관한 규정은 전무한 상황이다. 현재 국내의 동물원은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자연공원법’ 및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상 각각 교양시설, 공원시설, 박물관의 한 종류로 취급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동물과 관련된 현행법은 야생동물을 다루는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 가축 및 반려동물을 다루는 ‘동물보호법’, 해양동물을 다루는 ‘해양생태계의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 등이 있다. 이들 법은 각각 환경부, 농림축산식품부, 해양수산부 소관이다. 현재는 동물학대가 발생해도 당국이 개입할 법적 근거가 없다. 
 
이에 동물원의 설립·운영에 관한 사항과 동물원에서 사육되는 동물의 적정한 사육환경 조성 등 사육동물의 관리에 필요한 사항을 법률로 규정함으로써 동물원의 올바른 운영과 사육동물의 복지 구현을 위해 새정치민주연합 장하나 의원이 ‘동물원법’을 지난 2013년 9월에 대표발의 했지만 2년 가까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장하나 의원의 발의안에 따르면 동물원 등을 설립하고자 하는 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뒤 환경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외에도 동물쇼 금지, 동물원에 적응할 수 없는 동물은 사육·전시하지 않도록 하는 방안 등이 들어 있다. 동물원법은 지난 4월 회기에서 통과되지 못했지만 같은 달 28일 국회에서는 동물원법 제정안을 놓고 공청회가 열렸다.
 
공청회에는 사육사 및 관람객의 안전을 위한 동물원법의 방향성, 해외 동물원 동향과 국내동물원 운영현황, 동물복지 증진을 위한 동물원법 제정안의 과제 등 동물원법에 대한 토론이 진행됐다. 동물원과 관련된 법률로는 ‘동물원법’(장하나 의원 대표발의),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한정애 의원 대표발의), ‘동물원 관리·육성에 관한 법률안’(양창영 의원 대표발의) 등이 계류 중이다.
 
이날 진술인으로 참석한 서울대학교 이항 교수는 “동물의 생태적 특성을 고려해 적정 사육환경에 대한 기준을 제공하는 것은 필수”라며 “동물 허가제를 반드시 실시해서 자격미달인 동물원, 수족관이 양산되는 것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물자유연대 조희경 대표는 “많은 동물원의 동물들이 생태와 맞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의 스트레스로 ‘정형행동’ 즉, 정신적 질병(사람에게는 자폐증에 해당)을 앓고 있다”며 “많은 동물원이 ‘생태설명회’라는 이름으로 동물에게 인위적 행동(바다사자 윗몸일으키기, 원숭이 자전거 타기 등) ‘동물쇼’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장하나 의원은 “동물공연의 이면에는 학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며 “정부는 동물원 임의등록제를 추진할 것이 아니라 허가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은 “한국동물원·수족관협회는 동물원의 동물복지를 위한 규정이나 자정능력이 없다. 동물원에 관한 규정을 법으로 정해야 한다”며 “종·개체 숫자별 사육면적에 대한 기준을 법으로 규정한 해외사례를 참고해 최소한의 사육기준을 법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정은 없고
인력도 부족
 
성균관대학교 한은경 교수가 2014년 12월부터 2015년 1월까지 실시한 ‘동물보호 및 동물원법 제정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동물원 허가제에 대해 95.1%가 찬성했으며 관람 목적의 인위적 훈련을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58.9%로 나타나 동물복지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법을 앞서 있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이에 대해 한정애 의원은 “성균관대학교 한은경 교수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절반 이상이 동물쇼 및 훈련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며 “동물공연에는 학대가 수반될 수밖에 없으므로 동물 공연과 관련해서는 적절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취지에서 사단법인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녹색당, 동물권을 옹호하는 변호사들은 동물원법 제정을 위해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카라 등 3개 단체는 동물원법 제정 의견서를 환경부에 전달한 데 이어 캠페인을 전개할 예정이다. 3개 단체 의견서는 ▲모든 유형의 야생동물 수용시설 의무 등록 ▲종 보전 등 현대동물원의 기능을 수행하는 동물원에 대한 예산 지원 및 기부금품 모집 허가 ▲동물쇼의 원천 차단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생태적 특성 고려한 환경조성 요구
허가제로 자격 미달 공원 관리해야
 
이처럼 일부에서 동물원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주무부처인 환경부가 관련 법령 제정에 소극적이어서 아직 논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언제 통과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동물원법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만큼 찬성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 동물원법 제정에 관심이 필요한 현실이다.
 
장하나 의원이 국회입법조사처에 ‘동물원 동물 사육기준 및 제도’에 관련한 사례조사를 요청한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은 동물원 동물 관리에 대한 체계적인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국회입법조사처 자료에도 영국은 동물원과 관련한 별도의 법률을 제정·운용중으로 알려진다. 동물원의 허가 및 조사는 기본적으로 지방정부의 권한이다. 중앙정부가 이에 필요한 법적 기준 및 근거를 제시한다. 영국 동물원의 목적은 동물이 가장 정상적인 행태를 보일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제공해주는 데 있다. 동물원의 핵심역할은 동물 보전이다.
 
 
영국의 동물원은 온도, 환기, 조명(강도 및 분광분포) 및 소음수준은 동물의 특정 종이 항상 안락하고 편안할 수 있도록 동물원내 적정 환경에 관한 규정이 마련돼 있다. 임신한 동물의 경우 특별관리해 보호하고 수생동물의 경우 적절한 공기공급과 적정 개체수 및 수온 유지가 되도록 환경을 관리한다. 야외 우리의 동물들에게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위한 충분한 피난처를 제공한다. 관람자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도피 영역도 있다.
 
때문에 영국 동물원의 각 우리들은 동물의 일반적인 방어 반응과 적절한 질주 또는 도피 거리를 허용하도록 디자인하도록 돼 있다. 우리와 장벽은 동물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고안돼야 하며, 동물 탈출을 막는 구덩이는 동물이 돌아갈 수 있는 도피로를 확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장하나 의원이 국회입법조사처에 ‘동물원 사육 동물의 복지증진 방안’ 관련한 사례조사를 요청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에는 동물원과 관련한 별도의 법률이 없다. 심지어 국내 동물원은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공원시설중 교양시설로 분류돼 있다.
 
일부 지자체 동물원 관련 조례상에는 동물원에 관한 정의가 제시되고 있으나, 동물원과 관련한 명시적 정의 및 기준 등을 포함하고 있는 법률은 없다. 동물복지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는 ‘동물보호법’의 경우에도 동물원 내 동물에 관한 사항을 별도로 정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인위적 훈련금지
복지도 고민할때
 
국회에서 열린 동물원법 제정 공청회에서 장하나 의원은 “어른들이 돈벌이나 유희를 위해 동물을 학대하고 방치해왔다. (동물원법 제정은) 동물만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 인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그간 동물학대국가라는 오명을 받아왔다. 이번 기회에 동물학대국이 아닌 모범적인 동물복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길 바라는 목소리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애견 대여업 논란 “3일에 5만원”
 
애견 대여 서비스가 등장해 논란이다. 애견을 대여해주는 업체들은 말티즈, 토이푸들, 포메라니안 등 소형견을 2박3일 정도 대여해주는데 5만원에서 7만원을 받는다. 원한다면 1주일에서 한 달까지도 연장이 가능하다. 주문 시 업체를 직접 방문하거나 자동차 퀵서비스를 통해 강아지를 받는다. 서울경기 등 수도권 지역은 지하철택배도 가능하다.
 
대부분의 동물보호단체들은 반려동물이 상품이 아닌 생명으로 애초에 판매, 대여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난 21일 국회에 따르면 문정림 새누리당 의원은 이 같은 조항을 신설한 동물보호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반려동물 대여업을 할 경우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단, 시각 장애인 등을 위한 보조견의 대여는 예외로 했다. 개정안은 또 동물학대행위에 동물을 경품으로 주는 행위를 추가했다. 소싸움과 같은 민속경기 등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경우는 동물학대 행위에서 제외된다.
 
애견 대여 서비스는 2007년 미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후 인기를 얻으며 영국 런던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동물을 물건과 똑같이 취급, 학대한다는 논란이 일면서 2008년 미국, 영국 정부가 모두 대여업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해당 업체들은 1년 만에 모두 문을 닫았다. 일본 등에선 여전히 성업 중이다. 특히 1인가구가 늘어나면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대여하는 비율이 늘었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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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