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기획> 역대 정권 '권력형 비리' 풀스토리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9.16 15:3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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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또…권력의 덫에 걸려 자멸

[일요시사=사회팀] 권력은 10년을 넘길 수 없다는 옛말이 있다. 요즘 정치권에선 이를 '권불오년'으로 바꿔 부른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절대 권력이라도 정권이 바뀌는 주기인 5년은 넘기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권력에 붙어 호가호위하던 이들은 정권이 바뀌면 가장 먼저 수사망에 오른다. 역대 정권마다 되풀이돼온 권력형 비리의 역사. 그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난 10일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가 16년 만에 미납추징금 문제를 매듭짓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씨는 이날 오후 3시께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 현관에서 "추징금 환수 문제와 관련해 그간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저희 가족 모두를 대표해서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고 밝혔다.

역대 정권실세들
모두 받아챙겼다

전 전 대통령은 지난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군 형법상 반란·내란과 뇌물수수 혐의로 무기징역형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추징금 중 533억원만 납부했고 전체 76%인 1672억원을 올해 초까지 미납했다.

지난 5월24일 검찰은 채동욱 검찰총장의 지시로 서울중앙지검에 '전두환 추징금 환수 전담팀'을 구성했다. 박근혜정부가 출범한지 석 달이 지난 시점에 시작된 권력형 비리 수사였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래 전·현직 대통령을 겨냥한 권력형 비리 수사는 늘 정권 초나 말에 이뤄졌다. 권력교체기를 전후한 수사기관의 권력형 비리 수사는 5년을 주기로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반복됐다.


한 검찰 관계자는 "VIP(대통령)가 살아있을 때는 모두가 해바라기처럼 VIP 주변을 바라보지만 권력 이동의 순간에는 줄을 댔던 사람들의 투서가 줄을 잇는다"며 "아무래도 권력형 비리는 뇌물을 건넨 당사자가 입을 열지 않으면 혐의 입증이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 검찰 출입기자는 "첩보도 첩보지만 정권 말이나 권력교체기가 되면 고과에 따른 인사이동이 예고되는데 검찰 입장에서도 눈도장은 찍어야하지 않겠냐"며 "정권과 연계된 권력형 비리 수사는 그 근본부터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권력형 비리의 꼭대기에는 늘 '떡값'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와 관련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심복이자 유신정권 실세로 불린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은 '떡값의 대부'로 통한다.

5년간 날고 기다 정권 바뀌면 '서초동행'
권력에 붙어 호가호위…맘껏 누리다 '골인'

이 전 부장은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80년 신군부가 들어서자 가장 먼저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됐다. 이때 당시 이 전 부장은 "떡(정치자금)을 만지다보면 떡고물(부스러기 돈)이 묻는 것 아니냐"고 말해 유신정권의 도덕성을 가늠케 했다.

또 다른 군부독재 세력인 전두환 정권은 권력형 비리의 스케일 면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1983년 터진 이른바 '장영자 사건'은 건국 이래 최대의 금융사기 사건으로 회자된다.

스캔들의 주인공 장영자씨는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와 사돈 관계였다. 일찍이 사채업으로 돈을 굴렸던 장씨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전 전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씨를 후견인으로 맞이했다.


이 같은 배경을 등에 업은 장씨는 1981년 2월부터 1982년 4월까지 모두 7111억원의 어음을 건설시장에 유통시켰다. 이중 확인된 사기 어음의 총액은 6404억원이었다.

이 천문학적인 사기사건과 관련해 모두 30여 명의 피고인이 법정에 섰다.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현직 은행장과 경제관료 등 100여 명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당시 이들이 얼마나 많은 비자금을 조성했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지하 자금 중 일부가 청와대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친인척 비리
군사독재 뺨쳐

6월 항쟁 이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전 전 대통령과 관련한 권력형 비리는 고구마줄기 캐내듯 파헤쳐졌다.

먼저 전 전 대통령의 형 기환씨는 노량진 수산시장 운영권 교체에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1988년 구속됐다. 동생 경환씨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에 재직하며 공금 76억여원을 횡령해 실형을 살았다. 사촌형 순환씨는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3700만원의 금품을 수뢰한 혐의, 사촌동생 우환씨는 양곡가공협회장 취임 후 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각각 구속됐다.

노태우 정권도 전임 정권의 전철을 밟았다. 노 전 대통령의 처조카이자 '6공 황태자'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박철언 전 정무장관은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던 1993년 구속됐다.

박 전 장관은 슬롯머신 사업자에게서 6억원의 뇌물을 챙긴 혐의로 수감됐으며 이후 "노 전 대통령이 YS에게 통치자금 명목으로 3000억원을 건넸다"고 폭로해 충격을 안겼다.

노 전 대통령의 딸 소영씨는 남편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함께 외화 밀반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들이 빼돌린 것으로 의심받았던 돈은 미화 20만달러였다.

노 전 대통령 본인도 권력형 비리에 연루됐는데 그는 대선 직후 받은 당선 축하금 1100억원과 재임 시절 기업체로부터 거둬드린 돈 3500억원을 모두 비자금으로 은닉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렇게 받은 떡값의 대부분을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건넸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의 퇴장으로 군사정권은 막을 내렸지만 문민정부에도 권력형 비리는 여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 '친인척 정치 금지' 원칙을 강조했고 가족들에게 "돈 싸들고 접근하는 똥파리를 조심하라. 단돈 100만원만 받아도 구속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청와대 밤의 막후 실력자로 군림했다. 청와대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는 현철씨를 거친다는 소문이 있었다. 현철씨에게는 '소통령'이란 별명이 붙었다.


IMF의 암운이 드리운 1997년 1월 재계 서열 14위였던 한보그룹이 부도를 맞았다. 이른바 '한보 사태'로 불린 이 대형 권력형 비리는 김영삼 정권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냈다.

한보 사태의 배후엔 '소통령'이 있었다. 한보그룹은 5조7000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부실 대출을 감행하면서 정·관계 핵심 인사들과 유착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가 공개돼 여야 중진의원 등 정·관계 고위 인사들이 줄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들과 함께 수사망에 오른 현철씨도 혐의를 피해가지 못했다. 현철씨는 정 회장 등 기업인들로부터 모두 66억원을 받고 12억원의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같은 해 6월 구속됐다.

현철씨는 비선 조직을 가동하면서 기업들에게 특혜를 주고 뒷돈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았다. 현철씨 구속 후 김영삼 정권은 사실상 '식물정권'이 됐다.

아울러 현철씨는 5년 뒤인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조동만 전 한솔 부회장에게서 불법 정치자금 2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권력을 잃은 '소통령'은 두 번째로 영어의 몸이 됐다.

민주정부
너마저도…


대한민국 역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정부도 권력형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 친인척 부당행위 금지법'을 공약으로 내걸면서 권력형 비리 근절에 의욕을 보였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대통령 친인척 관리·감시 업무'가 강화된 시점도 국민의정부 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국민의정부는 DJ 퇴임을 1년 앞둔 시점에 터진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최규선 게이트' 등으로 무너졌다.

진승현 게이트는 'DJ의 오른팔'인 권노갑 전 의원과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였다. 2300억원대의 불법 대출과 주가 조작의 배후는 바로 DJ의 핵심 측근들이었다.

다음 해에는 이용호 게이트와 최규선 게이트가 정국을 뒤흔들었다.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는 이권청탁 명목으로 25억원여원, 정치자금 명목으로 22억여원 등 모두 47억원의 대가성 로비자금을 챙겨 구속됐다. 지난 2001년 구성된 '이용호 게이트 특별검사팀'은 이용호 G&G그룹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을 파헤치던 중 이 같은 범죄 사실을 밝혀냈다.

삼남 홍걸씨도 '최규선 게이트'로 철창신세를 졌다. 홍걸씨는 2001년 3월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로비를 대가로 타이거풀스 대표 송모씨로부터 10억원을 받은 것을 비롯해 모두 36억여원을 챙겨 구속됐다. 홍걸씨는 2002년 1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추징금 2억원을 선고받았다.

참여정부 출범 후 마지막 남은 장남 홍일씨도 검찰 조사를 받았다. 홍일씨는 나라종금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1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불구속 기소됐다. 이로써 'DJ 3형제'는 모두 사법 처리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한국 역사상 가장 도덕적인 정권으로 자부했던 참여정부도 끊이지 않는 친인척·측근 비리 의혹으로 몸살을 앓았다.

군사정권 때 주고받던 떡값 시초
자녀·측근 연루 '게이트' 비화
정권마다 되풀이…지금도 진행 중

참여정부 실세가 개입된 것으로 의심받았던 권력형 비리는 '생수회사 장수천 사건' '나라종금사건' '썬앤문 불법 자금 의혹 사건' '오일게이트' 등으로 지난 정권과 비교해도 적은 수는 아니었다.

또 친인척 비리 수사과정에서 나온 '박연차 리스트' '정대근 리스트' 등은 참여정부가 강조해 온 덕목인 '청렴함'과 배치됐다. 이밖에도 '김상진 리스트' '제이유 리스트' 등은 모두가 측근 비리로 분류돼 참여정부가 대응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을 좁혔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의 비리·비위 혐의가 뼈아팠다. 참여정부는 대통령의 친가 8촌, 외가 6촌까지 관리 리스트에 올리고 사돈과 종친회를 포함해 약 900명을 감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봉하대군'으로 불린 노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가 세종증권 인수 과정에 개입해 29억여원을 받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밖에 건평씨는 대우건설 사장 연임로비에도 개입된 것으로 의심받았다.

딸 정연씨도 순탄치 않은 시간을 보냈다. 정연씨는 지난 2007년 9월 미국 뉴저지 포트 임페리얼 아파트를 매입하면서 미화 100만달러를 해외로 불법 송금한 혐의로 검찰에 소환됐다.

결과적으로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2008년 검찰발 '박연차 게이트'가 터지면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MB 비리는
빙산의 일각

이명박정부의 경우는 집권 초기부터 꾸준히 권력형 비리 의혹이 제기되면서 '도덕적으로 가장 부실한 정권'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형 '영일대군' 이상득 전 의원은 미래·솔로몬저축은행 로비 자금 수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 부인 김윤옥씨의 사촌오빠 김재홍씨는 제일저축은행에서 청탁 및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됐다.

아울러 부인 김씨의 사촌언니 김옥희씨는 국회의원으로 공천받게 해주겠다고 속여 30억원을 받아 구속기소됐다.

'왕차관'으로 불린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은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와 관련 금품을 수수해 구속 수감 중이고, 최근에는 '원전 납품 비리'의 몸통으로 지목받았다.

'MB의 멘토'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도 인허가 특혜와 관련 금품수수로 옥살이를 했으며 'MB의 친구'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은 수사 과정에서 세무조사 무마, 이권 개입 등을 명목으로 뒷돈을 챙겼다는 진술이 잇따랐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 이명박정부의 아킬레스건으로 불리는 '자원 외교' '4대강 사업'과 관련한 수사는 여전히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이 전 대통령의 목줄을 겨눈 권력형 비리가 언제 어디서 터질지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현정부 첫 친인척 비리'

대통령 5촌 조카 사기 내막

"고모가 박근혜" 수억 가로채

박근혜 대통령의 5촌 조카가 거액의 사기행각을 벌이다 경찰에 붙잡혔다. 정권마다 반복돼 온 친인척 비리는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8일 복수 언론에 따르면 수원지검 성남지청은 이날 박 대통령의 5촌 김모(53)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김씨는 2010년 초부터 최근까지 3년여 동안 피해자 5명으로부터 기업 인수 및 투자유치 등을 명목으로 4억6000만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투자유치"4억6000만원 뜯어내
기업 접근해 고급 외제차 빌려

김씨는 피해자들의 고소·고발이 잇따르자 도피생활을 벌이다 지난 7일 경기 하남경찰서에 체포됐다. 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인 상희씨의 손자로 박 대통령과는 5촌지간이다. 김씨는 과거에도 사기 혐의로 여러 차례 검찰과 경찰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번에 드러난 김씨의 사기행각은 박 대통령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김씨는 기업 인수합병을 빙자해 기업체로부터 각종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고 고급 외제차를 업체 명의로 빌려 몰고 다닌 것으로 파악됐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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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