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서울 인사동 지오 아트스페이스를 찾았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인체들이었다. 형태는 흐릿했고, 선은 닫히지 않았으며, 몸은 완성되지 않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정돈된 아름다움 대신 불안과 긴장이 먼저 느껴졌다. 불편했지만,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김영춘 작가의 첫 개인전 ‘예의를 벗은 실낙원’. 이 전시는 한순간의 감각으로 만들어진 결과가 아니다. 한 달에 120컷에서 360컷, 15년 넘게 이어진 인체 크로키의 축적이다. 먹물과 크레용, 파스텔과 콘테, 흑연과 유화. 재료는 바뀌었지만 질문은 변하지 않았다. 인체를 통해 끝까지 파고드는 탐구. 그 반복은 기술이 아니라 수행이다.
크로키는 프랑스어 croquis에서 온 말로, 짧은 시간 안에 대상의 형태와 동세 등 중요한 특징을 선으로 포착해 표현하는 기법으로 주로 움직이는 동물이나 사람의 형태를 빠르게 그린 그림을 뜻한다.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성’이 아니다. ‘남겨진 흔적’이다. 검은 바탕 위에서 번지는 선, 붉은 면 위에서 흔들리는 윤곽, 초록의 배경 속에서 뒤엉키는 육체. 그것들은 완성을 향해 닫히지 않는다. 덜 닫혀 있기 때문에, 더 많이 드러낸다. 몸은 흐릿하지만 감정은 선명하다. 인체는 재현이 아니라, 내면이 흘러나오는 통로다.
김 작가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파편화되고 뒤틀린 인간 군상을 통해, 세상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지옥문이 아닌 ‘지욱문(智旭門, 지혜의 문)’을 향해 나아가는 몸부림을 담고 있다. 지욱문은 스스로의 추악함과 고통을 끝까지 직시할 때 비로소 열리는 깨달음의 통로다. 작가는 우리 시대를 ‘예의를 벗은 실낙원’으로 규정하면서도, 그 속에서조차 미약하지만 분명한 통과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은, 어쩌면 ‘21세기의 게르니카’라 불러도 과하지 않다. 게르니카(Guernica)는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의 고통을 왜곡된 형상과 절규하는 인물들로 압축해낸, 폭력과 비극의 집단적 기억을 그린 작품이다.
김 작가의 크로키는 아름다움을 꾸미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본질을 밀어 올린다. 서 있지만 불안정한 몸, 낮추고 있지만 무너지지 않는 자세, 몇 겹의 선만으로도 고통과 응시, 침묵과 긴장을 동시에 품는 형상. 여기서 육체는 단순한 몸이 아니다. 상처와 욕망, 결핍과 버팀이 겹쳐진 인간 그 자체다.
이 지점에서 그의 작업은 기술을 넘어 사유가 된다. 15년 넘게 인체를 붙잡고 선을 반복해왔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의 선은 설명하기 위해 그어진 선이 아니다. 끝까지 들여다보기 위해 남겨진 선이다. 그래서 화면 속 인체들은 외형보다 내면이 먼저 보인다. 문명과 질서가 벗겨진 뒤에도 남는 것이 무엇인지, 정면으로 묻는다.
김 작가는 문명과 윤리, 질서와 품위로 유지되어 온 세계의 표면이 벗겨진 이후를 보여준다. 우리가 정상이라 믿어온 것은 두꺼운 구조가 아니라 얇은 막에 불과했음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 전시는 꾸미지 않는다. 대신 드러낸다. 숨기지 않고, 덮지 않고, 인간 내면의 진실을 전면으로 끌어올린다. 그 정직함이 이 전시를 불편하게 만들고, 동시에 깊게 만든다.
특히 ‘지욱문’이라는 개념은 이 전시를 관통하는 축이다. 고통과 뒤틀림, 결핍을 끝까지 응시할 때 비로소 열리는 지혜의 문. 이 전시는 지옥을 보여준다. 그러나 목적은 절망이 아니다. 통과다. 파괴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깨달음의 방향을 남긴다.
전시장을 나서며 떠오른 것은, 그날 아침 시사펀치(칼럼)에서 언급했던 ‘극다중사회(Hyper-Plural Society)’였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현실을 공유하지 않는다. 사회는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병렬된 현실들의 집합이 되었다. 같은 사건도 각자의 세계 속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로 소비된다. 이제 사회는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현실이 겹쳐진 구조가 되었다.
극다중사회에서 사람들은 더 많이 연결되어 있지만, 더 깊이 고립된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같은 감각을 공유하지 못하고,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해석 속에 머문다. 관계는 유지되지만 이해는 사라지고, 연결은 늘어나지만 공감은 줄어든다. 우리는 함께 있지만, 동시에 각자의 세계 안에 갇혀 살아간다.
이 구조는 일상 곳곳에서 드러난다. 같은 뉴스를 두고 전혀 다른 진실이 만들어지고, 같은 경험을 두고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갈등은 의견 충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가 부딪히는 충돌이 된다. 그래서 설득은 점점 어려워지고, 대화는 쉽게 단절된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향해 말하지만, 실제로는 서로에게 닿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전시장 속 인체들과 닮아간다. 서로 엉켜 있지만 연결되지 않은 상태, 가까이 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 몸은 맞닿아 있어도 감각은 공유되지 않는다. 김 작가의 화면 속 인체들이 각자의 긴장과 고통을 품은 채 하나의 공간에 놓여 있듯, 오늘의 사회 역시 하나의 현실 안에서 각자의 세계를 고집한 채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위기는 갈등이 아니다. 단절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 더 본질적이다.
이 지점에서 ‘지욱문’은 다시 의미를 갖는다. 이 단절을 넘어서는 길은 외부에 있지 않다. 상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직시하는 데서 시작된다.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통과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세계를 이해할 최소한의 문 앞에 서게 된다.
극다중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주장이나 더 빠른 판단이 아니다. 오히려 멈추는 힘이다. 단정하기 전에 의심하고, 판단하기 전에 들여다보는 태도. 그것이 무너진 공통 기반을 다시 만들어가는 출발점이 된다.
전시장 속 인체들은 무너지는 듯 보이지만 끝내 선을 잃지 않는다. 뒤틀려 있지만 완전히 붕괴되지 않는다. 그것은 절망의 형상이 아니라, 버티고 있는 존재의 형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회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지금의 혼란은 단순한 붕괴가 아니라,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관계 방식을 요구하는 전환일지 모른다.
결국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 갇힌 채 더 멀어질 것인가, 아니면 불편함을 통과하며 다시 연결될 것인가. 지옥문 앞에서 서로를 밀어낼 것인가, 아니면 지욱문을 통과할 것인가. 극다중사회에서 우리의 미래는, 결국 우리가 어디를 통과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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