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어둑한 구석자리에 놓인 테이블에서는 미군과 여자들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며 희희덕거렸다.
그들의 머리 위엔 희뿌연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히 피어올랐다.
어찌 보면 커다란 수족관 같은 그 공간, 청운은 문득 외로움을 느끼곤 안쪽으로 점점 걸어 들어갔다.
춤추는 플로어
사람들이 춤추는 플로어 앞쪽에 몇 계단 높게 무대가 가설돼있고 그 한옆에서 악단이 한창 연주를 하는 중이었다.
청운은 술과 안주가 얹힌 쟁반을 들고 테이블 사이로 매끄럽게 헤엄쳐 다니는 웨이트레스를 불러 물어볼까 하다가, 한순간 악마산에서 수련한 잠입술을 발휘해 재빨리 무대 뒤쪽의 대기실로 숨어들었다.
그곳엔 출연 차례를 기다리는 연예인과 무용수들로 시껄벅적했다. 개중엔 티브이에서 본 듯한 코메디언이나 가수도 눈에 띄었다.
한구석에서는 서너 명이 둘러앉아 군용 담요 위에 화투짝을 두드리기도 했다. 청운은 광을 팔고 나서 희희낙락 구경하고 있는 한 사내에게로 다가가서 슬쩍 물었다.
“혹시 앞니 빠진 피에로를 아십니까? 여기서 꽤 유명한 희극배우라던데…….”
사내는 청운을 흘끗 쳐다보곤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흥, 이 업계에는 앞니 빠진 개오지 외에도 코뼈 부러진 피에로, 꿈을 먹다 소화불량에 걸린 삐에로 등등 별명이 많아서 곤란한걸. 아마 전국적으로 따지면 수십 가지는 될 거야.”
“본명은 김순식입니다만.”
“흐흥, 찾으시는 순식이가 그 순식이라면 아마 별로 유명하진 않을 텐데…….”
바로 그때, 구석쪽에 쭈그려 앉아 한창 구두를 닦고 있던 허수룩한 사람이 슥 고개를 들었다. 그는 검은 빵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얼굴 여기저기 구두약이 묻어 있었다.
그건 분명 분장한 모습이 아니라 생존 현장의 실상이었다. 그 앞엔 고급 구두, 낡은 구두, 남자 두, 여자 구두 등 갖가지 스타일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그는 청운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구둣솔을 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구름아, 너 혹시 운이니?”
“정말 순식이 형이야?”
잠시 서로 바라보던 둘은 더 이상 다른 말 없이 다가들어 꽉 껴안았다.
“형, 정말 살아 있었구나! 그동안 어찌 지냈어?”
청운은 울먹였다.
“나야 세상천지가 다 내 아방궁인걸 뭐. 구름이 니가 어떻게 살고나 있는지 늘 걱정되었지. 아무튼 이렇게 살아서 만나니 좋구먼.”
피에로가 씩 웃자 앞니 빠진 자리가 드러나 희극적이면서도 구슬퍼 보였다.
“이산가족 상봉이 따로 없구나. 아주 감동적이야.”
화투판의 누군가 말했다. 그러자 다른 소리가 장단을 맞췄다.
“이참에 둘이 무대에 같이 나가 갈라진 한민족의 애절한 소원을 보여 주면 어떨까 싶네.”
“그러다 국가보안법에 걸리면 어쩌려구?”
“흐흐, 여긴 리틀 아메리카라 한국의 헌법도 대통령까지도 어쩔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잖아.”
“쓸데없는 소릴…… 형제가 만나 울고 짜는 꼴을 미군 놈들이 좋아할 리 없지. 실실 웃다간 지겹다고 야유할 텐데 뭘.”
남자들과 달리 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들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두 의형제의 재회를 축하해 주었다.
미군과 여자들 마주 앉아 희희덕
TV서 본 코미디언·가수도 공연
피에로는 청운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눈짓한 뒤 다시 재빨리 구두를 닦기 시작했다. 청운은 다가앉아 헝겊으로 광을 냈다.
피에로가 말없이 히죽 웃었다. 청운보다 두어 살 더 먹었을 뿐일 텐데 이마의 주름살이 깊게 지자 언뜻 노인네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어린 소년같이 천진난만한 표정이 그 얼굴에 떠돌기도 했다.
“어이, 슈샤인 보이…… 내가 닦아 놓을 테니 어디 가서 회포나 풀거라잉. 대신 나중에 쏘주나 한잔 사야 해.”
서른 살 초반쯤 돼 보이는 사내가 일어나서 오리궁둥이 포즈로 흔들며 능글맞으면서도 익살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벌써 대머리가 까진데다 코허리가 푹 꺼지고, 작은 눈에 거무스레한 입술은 두툼하게 내밀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추남이었지만 어딘지 애잔한 페이소스를 지닌 얼굴이었다.
“형, 고마워. 내가 형 덕분에 살아간다니까…… 야, 구름아 가자.”
피에로는 청운의 팔을 끌고 대기실을 벗어나 홀의 외진 구석으로 갔다.
“편안히 앉아 있어.”
얼마 후 그는 맥주 세 병과 안주 접시를 직접 들고 왔다.
“자, 한잔 받어. 이게 꿈인지 생신지 헷갈린다.”
“응, 그래.”
청운은 하얀 꽃처럼 피어오르는 맥주 거품을 바라보았다.
“자, 생존을 위해 건배!”
둘은 잔을 쨍 마주치곤 술을 들이켰다.
“이게 얼마만이냐, 응?”
피에로는 신기스럽다는 눈빛으로 청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마 2년이나 3년쯤 됐을까, 근데 형은 왜 이곳으로 왔어?”
“바람결에 떠도는 방랑 인생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냐. 어쩌다 보니 그냥 왔지. 하지만 무슨 환락을 찾아 술집에 온 건 아니란다. 진흙 속이라 해도 연꽃 씨 같은 꿈은 가슴에 품고 있지 않겠냐. 나도 너도…… 청량리 풍전 홀에 들어간 것도 어떡하든 무대에 서서 대배우로 성공하고픈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예술의 신께 기도하며 온갖 궂은 잡일을 맡아 했지만 내게 무대는 너무 높기만 하더라. 아무리 한물 간 연예인이나 추문에 휩싸인 배우라도 밤무대에서는 오히려 더 주가가 높고 기고만장하는 세상이더군. 여기로 온 건 일단 잠시나마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진다는 얘길 들었기 때문이야. 혹시 잘되면 미8군 쑈 무대에도 설 기회가 있다니까. 그럼 성공의 문이 서서히 열리는 거지, 흐흣.”
“아, 그렇구나. 난 또 괜히 이상스런 걱정을 했네, 헤헤…… 그럼 오늘 밤에도 형이 무대에 나가 연기를 하는 거야?”
“응, 그래. 좀 있다가 야밤에.”
“아까 분장실에서 보니까 유명한 연예인도 몇 사람 있던걸.”
“아, 그 사람들은 오리지날이 아니고 짝퉁이야.”
“응?”
“흉내를 내는 거지. 배삼융, 서영촌, 고붕서, 너혼아, 남징, 일미자, 문주린 등등등 참 많다. 다들 이 바닥에서 살아남아 보려고 발버둥치는 거지.”
“아까 그 못생긴 추남 아저씬 누구야?”
“아, 그 형…… 이주일이란 예명으로 뛰는 코메디언 형인데…… 생김새는 그래도 마음씨는 착한 사람이야. 무대에서는 늘 단역 신세지만, 짝퉁 흉내를 내지 않고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창출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중이지. 하긴 흉내내려야 흉내낼 만한 대상도 없으니까 뭐. 흐흣…….”
둘은 다시 잔을 쨍 부딪치곤 술을 들이켰다.
“잠깐 갔다올게.”
피에로는 헤벌쭉 하회탈 같은 미소를 짓고 나서 어디론가 바삐 사라졌다. 그때 어떤 짝퉁 가수의 노래가 끝나고 음악이 한결 리드미컬하게 변조되었다.
추남 아저씨
홀 앞쪽의 무대엔 붉은 춤옷 차림의 여자가 올라서고 있었다. 촘촘하게 장식된 수백 개의 진주 구슬이 색색가지로 반짝거렸다.
그 댄서가 리듬에 맞춰 상체를 살랑살랑 흔들기 시작하자 색색가지 구슬들이 현란히 빛나며 쭉 빠진 몸매를 한층 더 도드라지게 했다.
그녀가 입술 새로 요염한 미소를 흘리며 아랫도리를 율동적으로 열띠게 흔들어대자 요란스런 고함과 휘파람 소리가 잇달아 흘러나왔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