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그런 경우는 많이 있어. 사내아인 엄마의 슬픈 모습에 빠져들고 계집앤 아빠의 멋진 모습을 흠모하듯이……’
‘하지만 엄마는 절름발이가 아니었어.’
‘흠, 그렇지. 그런데 너가 문제일 뿐…… 어린 시절 엄마를 잃은 깊은 상실감으로 인해 너의 마음속에 모종의 불구자 의식이 싹텄을 수도 있거든. 더구나 아버지까지 병석에 누워 올바른 생활을 못했기 때문에 실패 의식이 네게 큰 영향을 미쳤을 거야. 마음이나 정신에 씨앗이 심어지면 서서히 자라 육신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얘기지.’
제3의 목소리
‘하지만…… 난 북파됐다가 총알을 맞았기 때문에…….’
‘물론 그래. 그렇지만 너무 축 처지지 말고 좀 활기차게 걸어 보란 말야.’
‘음…….’
‘과거에 정상인보다는 부랑아나 불구자들은 사귄 것도 영향을 미쳤을지 몰라. 사실상 건달이나 깡패들도 겉으론 개폼을 잡고 거들먹거리지만 속으로 뭔가 부족하고 아쉬워서 그렇게 평범하지 않게 걷는 것이거든.’
‘쳇, 깡패들이 웃다가 뒤집어지겠다.’
그때 불현듯 청운의 마음속에서 제3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마음과 몸이 정말로 내 마음과 몸일까? 아무래도 아닌 것만 같아. 오히려…… 남한과 북한이 반쪽으로 갈라져서 아웅다웅하는 이 한반도 자체야말로 비정상적인 불구자이고…… 그게 우리를, 나를 이렇게 절뚝절뚝 꼴사납게 걷게 만들었다고 하는 게 오히려 더 실감난다구. 흐흣…….’
혼자 중얼중얼하며 걷는 사이에 청운은 문득 풍전 나이트 홀 앞에 서 있었다.
현란한 네온사인을 잠시 쳐다보던 청운은 반들거리는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일반 나이트클럽처럼 길거리에서 바로 입장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흠, 로비가 꽤 넓군. 하지만 돈을 빼고 나면 과연 뭐가 남을까?’
중얼거리며 지하 나이트클럽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으려고 할 때였다.
“잠깐! 이리로 좀 와 보시우.”
한쪽에서 검은 정장 차림의 사내가 불렀다.
“왜 그러죠?”
“음, 여긴 미성년자 출입 금지라서 말이죠.”
꽤 거만스런 표정이었다.
“난 미성년자가 아녜요. 그리고 저기 춤추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음악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럼 뭐죠?”
“사람을 좀 찾으려고요.”
“누굴?”
“형이에요.”
“거 참! 이름 말이지.”
“피에로라고…… 본명은 김순식이고…… 코메디를 하는데…….”
“비슷한 꺼벙이가 하나 있긴 했는데…… 히힛, 또 뻥을 깠는가 보군…… 무대에 서는 연예인이 아니라 하빠리 잡일꾼이었어. 지금은 여기 없어.”
사내는 차츰차츰 더 시건방져지고 있었다.
“그럼 어디로 갔어요?”
“그건 나도 모르지.”
“좀 알아봐 줘요. 꼭 만나야만 해요.”
사내는 눈살을 잔뜩 찡그렸다.
“모른다고 했잖아. 혹시 내가 여기 서 있다고 해서 수위나 캬바레 기도 같은 것으로 오해 하는가 본데…… 난 이 건물 전체의 수문장이야. 그리고 현재 상태도 나쁘진 않지만, 멋진나만의 꿈을 꾸고 있다구.”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럼 내려가 보슈.”
전혀 보지 못했던 신세계
미친 듯이 흔드는 사람들
“예?”
“가능하면 조용히 저 계단 밑의 홀로 내려가서 매니저한테 한번 물어 보란 말이지.”
“아, 예…… 고맙습니다.”
청운은 꾸벅 절을 하고 무지갯빛 조명이 언뜻언뜻 비쳐 오르는 클럽의 입구로 다가갔다. 한 발짝씩 계단을 내려갈수록 빛이 현란해지고 음악소리도 점점 커졌다.
이윽고 홀 안으로 들어선 청운의 눈앞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색색가지로 조합되어 비치는 사생아 같은 조명 아래 수많은 사내와 계집들이 얼려 미친 듯이 육체를 비틀어대며 춤추고 있었다.
청운은 현실을 잊어버린 듯싶은, 혹은 잃어버리려고 애쓰는 그 군상의 틈을 어렵사리 지나갔다.
‘좋군 좋아. 정말로…… 인간의 신체를 극대화하여 그 속의 욕망을 발산하는 건 우리가 악마산에서 받은 훈련과 비슷한 데가 없진 않아. 흐, 하지만 우린 국가를 위해 고통당하다가 죽고…… 여기서는 자신의 쾌락은 추구하다가 욕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추어탕집 앞에 놓인 바께스 속의 미꾸라지들 같군.’
청운은 광란의 인파를 헤치고 카운터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상대적으로 땡볕 속의 나무그늘처럼 좀 서늘한 기색을 풍겼다. 인형 같은 얼굴에 눈빛이 냉정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사람을 좀 찾으려는데요…….”
청운이 말하자 여자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묵묵히 턱짓을 했다. 청운은 둘러보았지만 누굴 지칭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물어 보려도 덧정없어서 그는 연주 중인 밴드 쪽으로 걸어가 마냥 기다렸다.
이윽고 짧은 막간의 틈에 청운은 드럼 치던 사내 쪽으로 다가갔다.
“혹시…… 피에로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피에로가 한두 명이어야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고 아마 미래에도 있을 거야.”
드러머는 허연 이빨을 내보이며 말했다.
“얼마 전까지 여기 있었던 사람인데요.”
“흠, 박 피에로도 있고 이 피에로도 있었고 최 피에로도 있겠지.”
사내는 빙글빙글 웃었다.
“앞니 빠진 피에로예요. 본명은 김순식이고…….”
“진작 그리 말할 것이지. 그앤 이미 떠났어.”
“아니, 어디로요?’”
청운은 놀라서 물었다.
“동두천 쪽으로 빠졌을 거야. 계집앨 뒤따라갔거든. 미군부대 클럽에서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 될 꿈에 젖어 있는지도 모르지. 허허…….”
“동두천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을까요?”
결의형제
“그 허풍선이 피에로 놈하곤 어떤 사이길래 그리 찾아 헤매지? 혹시 빚쟁이슈?”
“결의형제입니다.”
“흠, 그럼 저기 주방 쪽으로 가서 주방 보조한테 한번 물어봐. 걔하구 가장 친했으니까.”
사내는 상체를 문어처럼 흔들거리며 다시금 드럼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