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일, 서울고법 형사8부(부장판사 김성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현장에 있다가 내란 미수 등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고(故) 김계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재심을 개시하기로 지난달 29일 결정했다”고 밝혔다.
김 전 실장은 육군참모총장, 중앙정보부장을 지내고 1979년 2월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같은 해 10월26일, 박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궁정동 현장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주요 인사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시신을 등에 업고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달려갔던 김 전 실장은 이후 전두환정권에서 살인 및 내란 미수죄로 1979년 1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그후 1988년 사면·복권됐고 2016년 12월 노환으로 93세에 별세했다.
김 전 실장은 1998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0·26 사건 직후 자신이 최규하 당시 총리에게 사건 내용을 보고했으나, 그가 보고받지 못했다는 취지로 위증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 전 실장에 대한 수사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권력을 확보하려는 과정에서 무리하게 진행했다는 평가가 계속 나왔다.
김 전 실장 유족은 2017년 당시 “김 전 실장은 민간인 신분임에도 위법적인 군 수사기관의 수사와 군사법원의 재판을 받고, 수사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다”며 재심을 청구했다.
또 합동수사본부가 김 전 중앙정보부장의 살인 사건으로 수사를 진행하다가 우연히 사건 현장에 있던 김 전 실장과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까지 연루시켜 내란죄로 무리하게 수사 방향을 틀었다고 주장했다.
정 전 총장은 1979년 12월12일 신군부의 쿠데타로 체포돼 내란 방조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재심에서 무죄로 뒤집혔다.
공교롭게도 서울고법은 김 전 실장의 재심을 결정한 29일에 12·3 비상계엄 관련 내란·외환 혐의를 수사하는 내란 특검이 한덕수 전 국무총리를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겼다. 김 전 실장의 재심 결정을 발표하기 하루 전인 1일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방조 혐의를 받는 한 전 총리의 재판을 형사합의33부에 배당했다.
필자는 45년 전, 박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궁정동에 있었던 김 전 실장과 지난해 12·3 비상계엄 선포 당시 대통령실에 있었던 한 전 총리의 내란 방조 사건을 보면서 이 둘의 운명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내란 특검은 한 전 총리가 대통령의 위헌·위법한 비상계엄을 막을 최고의 헌법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윤 전 대통령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헌법 질서를 유린할 것을 알고도 책무를 다하지 않고, 오히려 절차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적극적 행위를 하고 동조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 전 총리가 비상계엄이 해제된 이후 전방위적 수사가 이뤄지자 자신의 행위를 덮고자 허위로 작성한 문서를 파기하고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짓을 말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특검은 내란 우두머리 방조 등 혐의로 한 전 총리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지난달 27일 “중요한 사실관계 및 일련의 피의자 행적에 대한 법적 평가와 관련해 다툴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한 전 총리 사건을 배당받은 형사합의33부는 선거·부패 사건을 전담하는 재판부로, 이재명 대통령의 위증교사 혐의 1심을 심리한 뒤 무죄를 선고했던 바 있다. 이 대통령의 '대장동·백현동 개발 특혜 의혹 사건'에 대한 재판은 이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중단됐다.
필자는 나라를 흔드는 굵직한 사건 속에서 대통령을 모시는 고위 공직자는 오직 국가와 국민 편에만 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신군부가 권력을 확보하려는 과정에서 무리하게 김 전 실장을 재판대에 올려 사형→무기징역→사면·복권 조치하고 45년이란 세월이 흘러서도 법원이 재심을 받아들였 듯이, 한 전 총리 재판도 이재명정부의 내란 세력 척결이라는 명분 아래 피해 보는 일이 없도록 법과 원칙에 입각해 재판이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은 “45년 전 사형선고가 내려진 법원의 판단이 이번 재심에서 뒤집힐 수 있는 것처럼 현재 진행 중인 한 전 총리의 재판도 45년 후에 뒤집힐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김 전 실장의 손자는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번 재심에서 할아버지의 무죄 판결이 확실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은 검찰개혁, 언론개혁, 사법개혁을 단행하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개혁 법안이 야당의 동의 없이 여당 단독으로 처리된다면 검찰, 언론, 사법부는 다시 정부의 꼭두각시 노릇만 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정부여당은 김 전 실장의 재심과 한 전 총리의 재판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의 의중을 잘 읽고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