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유망 프랜차이즈> ‘가격 파괴’ 소자본 창업 비즈니스

가격 파괴 치킨전문점 프랜차이즈 덤브치킨은 2023년 6월 대구광역시에 직영점을 열고 론칭한 브랜드다. 테이크아웃 위주의 영업을 하는 프랜차이즈로 지난해 가맹점이 대구시를 중심으로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19호점을 열고, 새해 1월에 20호점을 넘길 예정이다.

극심한 불황 속에서 경쟁이 치열한 치킨 업종으로 신생 브랜드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배경은 뭘까? 덤브치킨이 새해 유망 프랜차이즈로 주목받고 있는 이유를 분석해 봤다.

첫째, 덤브치킨은 가격 파괴로 불황기 소비 심리에 매우 잘 부합한다. 덤브치킨은 품질을 고수하면서 가격을 파괴해 불황기 고객의 소비 심리를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9900원

‘거품 없는 가격, 타협하지 않는 품질’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고 있다. 프라이드(국내산 9호닭 냉장육) 한 마리에 9900원 하는 등 품질 좋은 메뉴를 국내 최저가로 판매하는 가격 파괴 전략이 고객으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오고 있다.

양념치킨, 갈릭소이치킨, 스위트크림치킨, 치즈스노우치킨, 반반치킨 등은 1만1900원이고, 고추퐁닭치킨, 파무침치킨, 콘소메치킨, 고추마요치킨 등은 1만2900원에 판매한다.  


최근 외식 시장 트렌드 중 하나는 합리적 소비를 하려는 소비자가 증가하면서 배달 주문의 귀차니즘 대신 발품을 팔아서라도 테이크아웃 저가 제품을 찾는 틈새시장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고물가 불황 시대에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서 ‘요노(YONO·You Only Need One)’로 허리띠를 졸라 매는 소비자가 증가하면서 불가피 나타나는 소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가격 파괴 정책은 기존 유명 브랜드가 펼치는 할인 행사에도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 

둘째, 덤브치킨은 가맹점의 수익성도 높다. 덤브치킨 관계자는 “결코 박리다매가 아니다. 주문당 마진은 타 브랜드와 동일하거나 오히려 더 크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타 브랜드의 수익 구조에서 배달앱 수수료와 배달비의 거품을 줄여 9900원이라는 가격으로도 타 브랜드보다 더 나은 수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테이크아웃 전문 브랜드로서 배달 플랫폼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매출 비중의 10%를 차지하는 배달 매출의 배달 비용은 고객이 전액 부담한다. 콜라, 소스 등 서비스 품목을 유료화해 고객 선택에 맡김으로써 매출 마진율을 높일 수 있다.

또, 초보자도 쉽게 운영할 수 있도록 메뉴는 튀기는 종류만으로 단순화돼있고, 조리 난도도 낮은 편이라 많은 인력이 필요 없다.

이때, 덤브치킨 가맹본부는 가맹점과의 상생을 위해 원육 등 식재료 납품가 마진율을 국내 최저가로 대폭 낮춰서 공급해 준다.

셋째, 덤브치킨은 브랜드 설계 단계부터 매년 오르는 음식값에도 점주들에게는 수익이 적을 수밖에 없는 외식업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획됐다.


윤성원 덤브치킨 대표는 반올림피자 창업주로 350호 가맹점을 운영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그동안 십수 년의 프랜차이즈 노하우는 물론, 프랜차이즈 운영 중 느꼈던 이런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바탕으로 고객과 점주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브랜드로서 탄생된 것이다.

치열한 경쟁 속 괄목할 성장
불황기 고객 소비심리 최우선

또, 본사의 자금력이 탄탄해 초기에는 적자가 나더라도 가맹점과 상생 성장하는 비즈니스 성공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지속적인 투자를 할 수 있다.

윤 대표는 “초기 개설비 본사 노마진 정책으로 가맹점 창업 비용은 33㎡(약 10평) 기준 3000만~4000만원이면 되고 점포 구입비를 포함해도 7000만~8000만원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운영되고 있는 19개 점포는 모두 중소형 점포로 월평균 매출은 4000만원 내외고, 영업이익은 부부 창업의 경우 1000만원 선”이라고 말했다.

넷째, 덤브치킨은 디자인 콘셉트가 고급스럽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대 미국의 힙합 문화 콘셉트를 구현해 ‘작지만, 예쁘고 강한 가게’를 소유하고자 하는 창업자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고 있다. 특히, 여성과 MZ세대 창업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들은 창업 자금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데다, 덤브치킨의 힙한 디자인 콘셉트가 개성 있는 나만의 예쁜 가게를 가지고 싶은 욕망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저가 치킨 전문점이지만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1990년대 미국서 유행했던 힙합 문화에 대한 레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를 살려 중장년층도 좋아하고, 점포 내 음악도 힙합 음악을 틀면서 경쾌하고 빠른 음악으로 MZ세대들도 좋아하는 뉴트로 콘셉트를 연출했다는 것이 본사 측의 설명이다.

힙합 문화는 개성과 자유를 상징하며, 반사회적 저항의 메시지도 전한다. 이에 덤브치킨은 국내산 9호닭 냉장육 프라이드 가격이 단 9900원, 그 밖의 모든 치킨 메뉴를 1만1900원서 1만2900원에 판매함으로써 치킨값이 3만원대를 바라보는 기성 브랜드에 저항하고 있다. 

윤성원 덤브치킨 대표는 “거대한 치킨시장서 초저가 언더독인 덤브치킨이 치킨 시장의 기준이 되어보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슬세권 고객이 청바지, 반바지 입고, 슬리퍼 끌고 자유롭게 들르는 가게, 퇴근 후 한두 마리 부담 없이 사갈 수 있는 치킨, 누구나 동네에 꼭 하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착한 브랜드 ‘국민치킨’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착한 브랜드

한편, 덤브치킨은 체인점 창업비용도 낮다. 본사가 초기 가맹점 개설 노마진 정책으로 1000만원 상당의 창업 혜택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덤브치킨 관계자는 “저가로 판매하지만 가맹점의 순이익률은 매출의 20~25% 선을 유지하고 있어서 가맹점주 만족도가 높아 가격 인상 요구가 없다”며 “가맹점주가 대부분 생계형 소자본 창업자이기 때문에 당분간 1000만원의 창업 혜택을 지속하면서 새해 창업시장의 선도 브랜드가 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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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버려진 북파공작원, HID 요원들 비스토리

[단독] 버려진 북파공작원, HID 요원들 비스토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오혁진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12·3 계엄 사태와 관련해 HID(북파공작원, 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가 언급되고 있다. 국군정보사령부 소속인 HID가 비상계엄 선포 전부터 관여했다는 의혹 때문이다. 일각에선 그림자처럼 살아온 HID 요원들이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고 토로했다. 앞서 노상원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 ‘정보사령부 수사2단’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시키면 다 하고, 힘 좀 쓰는 애들”이라는 기준 아래에 HID 요원도 합류시켰다. ‘살인 병기’로 훈련된 HID의 전술적 판단력은 세계적 수준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반면, 정부는 그들의 존재를 무시했고, 보상조차 까다롭게 했다. 오죽하면 스스로 “(정부가) 키워서 잡아먹는 돼지 같다”고 평가했을까? 체포된 윤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령부 고위 간부 출신 제보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상호 정보사령관이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이 원스타다. 또, 비밀 조직 특성상 역할이 도드라진 적이 없다. 1980년 12·12 사태 때도 정보사는 주요 가담 세력이 아니었다. 그런 정보사가 계엄에 관여한 것은 이례적이다. HID는 북한에 침투해 고위층을 암살하고 파괴 공작을 수행하는 특수부대다. 국내 민간인을 상대로 HID를 투입했다는 것은 반대 세력에 대한 윤 대통령의 적대감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특히,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지금까지 예우와 보상 문제 해소되지 않아 “다쳐도 병원 못 가”···상이 등급 ‘별 따기’ 일각에선 투입 목적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직원 체포나 거짓 민란 기획 등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매체를 통해 “(작전에)깊숙이 관여돼있던 인원의 양심 고백을 들었다”며 “선관위 과장 등 핵심 실무자 30명을 무력 제압해 케이블타이로 손·발목을 묶고 복면을 씌워 B-1 벙커로 데려오라는 임무였다”고 말했다.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용현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를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 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용현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상원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상원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권력의 그림자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정부는 HID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부터 휴전 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때까지 북한 지역에 파견돼 활동한 무장첩보원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후방을 교란할 목적으로 양성됐으며 적 생포 및 사살, 적군 진지 주요시설물 파괴, 적지서 각종 테러를 통한 사회 혼란 야기, 첩보수집, 첩보망 구축 등이 주요 임무였다. HID는 북파공작원의 대명사로 통한다. 과거 북파 작전을 수행했던 부대는 여럿 존재했다. HID의 전신은 1948년 1월 미 군정청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다. 이후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정보국 안에 첩보 수집을 담당하는 공작과가 신설됐는데, 이 부서가 영문자 HID로 표기됐다. 육군첩보부대가 이 같은 명칭을 사용한 기간은 1950년 7월부터 1961년 7월까지다. 이후 HID라는 명칭이 육군정보부대(AIU: Army Intelligence Unit)로 변경됐다. HID는 현재 정보사령부 산하서 특수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육상특임대인 ‘설악개발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과거 정부는 1968년 1·21 사태 이후 응징보복부대로 설악개발단을 비롯한 해군의 UDU 등 특수부대를 여럿 창설했다. 1972년 AIU는 육군정보사령부(AIC: Army Intelligence Command)로 확대됐고, 1990년 11월 육군과 해군 등의 정보부대가 합쳐져 오늘날의 국군정보사령부(DIC: Defence Intelligence Command)가 만들어졌다. 그러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등 화해 분위기를 타고 폐쇄와 통폐합을 거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독한 후유증 HID 요원들은 조선인민군 복장을 위장 착용하고 보급 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서 생식, 칡뿌리 등을 먹어가며 버티기도 했다. 어떤 요원은 “훈련 당시 헬기서 속옷만 입은 채 숲에 던져진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추억이지만, 그때는 살기 위해 죽어라 (훈련)했다”며 “HID 출신들은 대부분 강제 징집된 사람들이다. 나도 1970년대 후반에 특전사에 지원했지만, ‘제대하면 집도 주고 억대 연봉을 주고 특별 대우해주는 부대가 있다’는 말에 따라간 곳이 설악개발단이었다”며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HID 훈련 기간은 60개월 이상이었고, 속초에 갇혀 생활했다. 보안상 휴가도, 병원도 보내주지 않았다”며 “임무에는 3인 1조로 투입됐지만, 각각 임무 내용이 다른 적도 있어 사실상 개인적으로 움직였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임무 수행 중 다치면 자결이나 자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작전에 투입돼 살아온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북파공작원 보상을 위해 정부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1951년 HID가 창설된 뒤 1994년까지 양성한 HID는 1만3000명이며, 임무 수행 중 7987명이 사망·실종됐다. HID에 30년 이상 몸담았던 고위 관계자는 “2000년대 들어서야 요원을 관리하는 공작팀장을 잘 만나면 훈련 중 다쳐도 조용히 병원에 보내줬지만, 예전엔 신분 노출 우려로 병원에 갈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제보자 본인도 훈련 중 발목과 허리를 다쳤지만, 국군병원에 갈 수 없어 2010년까지 약으로 버텼다고 주장했다. 수술을 받고 제대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생계를 이어가야 했기에 참아야 했다. 처참히 짓밟히고 무시당한 흑역사 사령관 진급 때문에···불명예 투입 이후 그는 목과 허리디스크에 철심 10여개를 박아 넣는 수술을 받고 2015년경 제대했으나, 상이 등급을 인정받지 못했다. 부상 당시 병원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후 보훈처에 “북파공작원 특성상 병원에 가지 못했다”고 주장했음에도 상이 등급 외 판정을 받은 국가유공자로 전역했다. 통상 척추부상과 관련해 추상적인 용어인 경미한 기능장애 기준을 구체화해 ‘엑스레이 검사 등에서 명백한 기형’이 있거나, ‘추체 높이 10% 이상 30% 미만의 압박골절’로 통증을 동반하는 경우 7급을 인정하게 된다. HID 부대원들의 역사와 훈련 과정은 듣기만 해도 일반인이 견디기 힘든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내가 죽더라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가치와 명예를 믿기 때문이다. 실제 군인들이 출연하는 예능프로그램 <강철부대3>서 압도적인 기량과 팀워크를 선보이며 우승한 HID 출신 강민호 팀장도 ‘진짜 영광은 현역분들께’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한 HID 요원은 인터뷰서 계엄 동원 및 임무 지시에 대한 수행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자기 군번도 모르고 그냥 훈련만 받다가 나중에 기간이 끝나면 (급여)통장 받고서 집에 가는 시스템”이라며 “계엄 동원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을 것 같다. 거기(HID) 인원들은 사회와 아예 단절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기에 뉴스나 신문을 볼 수도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이들은 어떤 정치 이념도 갖지 않고, 하달받은 임무 수행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계급도 명예도 만약 국내 정치인 사살 명령이 있었다면 실행할 수 있었을지 묻는 질문에는 “그냥 저 사람 죽이라면 안 죽이겠죠. 그런데 ‘저 사람이 지금 우리나라서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있고, 어떤 간첩 활동을 하고 있어’라고 잘 포장했으면 죽였을 수도 있겠지만, 북파공작원들은 그런 거에 조금의 머뭇거림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잘못된 선택(명령)을 내린 분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HID는 존재 그 자체로도 북한 도발에 대한 억지 전력으로서 의미가 있는 부대다. 취재진이 만난 HID 출신들은 하나같이 “12·3 내란 사태로 반란과 테러에 동원되는 부대라는 오해는 불명예스럽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진짜 간첩과 싸운 ‘김신조 사건’ 재조명 1968년 1월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군부대)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다. 청와대로부터 300m 떨어져 있는 종로구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던 사건이다. 침투한 31명 중 사살 29명, 미확인 1명, 투항 1명(김신조 소위)의 전과를 올렸으며, 이때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비군과 5분대기조, 그리고 육군 3사관학교가 창설됐다. 을지 연습과 유격훈련이 이 사건을 계기로 생겨났고, 육군 방첩대가 국군보안사령부로 개칭하고 조직을 개편했다. 이 사건의 보복을 위해 창설된 4개 부대가 바로 선갑도부대(육군), 장봉도부대(해군), 684부대(공군, 실미도) 마니산 까치부대(해병대)였다. 첩보조직들도 김신조 일당의 침투 이후 이에 대응하고자 보강했으며 이때부터 특수공작부대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전략 목표·전술 목표·훈련 계획 등을 정하고 조직도 개편했는데 설악개발단 창설기획자인 이춘국 예비역 대령에 따르면, 선갑도부대가 803대로 변경됐고, HID 기능을 이어받은 설악개발단이 909대로 확대 편성됐다. 북한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기 위해 많은 공작원의 희생이 있었다. 이들은 비밀스러운 공작의 세계만큼이나 그들이 하는 일들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00년 하반기부터 북파공작원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서 말로만 듣던 북파공작원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