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정부’ 미국 개입설 막후

전쟁 나면 트럼프 도와줄까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생명이 끝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국내 안보 지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상황을 가장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국가는 미국이다. 다음 정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대응 방식도 달라진다. 현재까지 일궈낸 한미일 간 동맹에까지 금이 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미국까지 한국 정세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다.” 국립외교원 출신 한 교수의 말이다. 국내 외교·안보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분석으로 해석된다. 국가정보원도 비상이 걸렸다. 직원들에게 대외 접촉 금지와 업무 중단을 지시하는 등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외교부가 해외 각국의 대사들과 소통에 나섰으나 역부족인 상태다. 하루 빨리 ‘윤석열 리스크’가 해결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두환
트라우마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지난 8일 필립 골드버그 주한미국대사를 접견해 한국이 법치주의로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외교부는 “조 장관은 한국 자유 민주주의의 회복력과 견고하게 지속해 온 법치주의를 토대로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갈 것이라는 우리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강조했다”고 전했다. 이어 “양측은 한미동맹이 흔들림 없이 유지, 강화되도록 함께 노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두고 미국 고위 당국자들은 ‘오판’ ‘불법’ 같은 강한 언사로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계엄령 선포가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위기에 빠뜨렸다고 보고 있고, 국회와 선관위 등에 군을 동원하는 과정서 미국에 전혀 사전 통보를 하지 않은 것을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은 방문을 조율 중이던 한국 방문을 취소하고 일본만 방문하기로 하는 등 미국 내 ‘한국 패싱’도 현실화되고 있다.

조 장관이 나서 사태를 수습하려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역부족이라는 게 외교부 내부의 관측이다. 외교부 한 관계자는 “‘한국 패싱’은 이미 시작됐고 이제 어떻게 다시 신뢰를 회복하느냐의 문제”라며 “지금 정권에서는 수습하기 힘들 거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동맹국 알리지 않고 나홀로 계엄
“잘못된 판단” 숨기지 않고 비판

국내 전문가들도 한국의 외교 역량이 크게 악화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이정민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은 지난 5일(현지시각) 재단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내년 1월 취임, 북한의 핵 위협 고조, 미중 무역 전쟁 악화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한국의 이번 사태가 최악의 시기에 벌어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이 북러 군사협력과 트럼프발 관세 폭탄 등 매우 심각한 지정학적·경제적 도전에 직면한 상황서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지금의 정치 위기는 더 회복력 있는 외교정책을 수립하고 현존하는 국가안보 위협을 완화할 수 있는 한국의 능력을 약화할 뿐”이라 지적했다.

그는 “윤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 해제 요구 의결 이후 계엄을 철회함으로써 한국의 성장하는 긍정적인 글로벌 브랜드를 약화하고 정치 주도권을 야당에 넘겼다”고 말했다.

윌슨센터의 트로이 스탠거론 한국센터 국장은 <글로벌뉴스> 인터뷰서 “한국은 1980년대 이후 계엄령을 선포한 적이 없다”면서 “이번 계엄은 한국의 민주주의 전례를 깼다는 점에서 중대하며, 권위주의 시대로 한발짝 후퇴하는 것 같다”고 했다.


앤드루 여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는 엑스(X)서 “계엄령 선포 결정은 끔찍했다”며 “윤 대통령이 이 위기를 촉발했고 스스로 정치적 무덤을 팠다”고 평가했다.

국정원도 비상이 걸린 건 마찬가지다. 2급 이하 인사 조치를 중단하고 직원들에게 대외 접촉 금지까지 지시했다. 통상 1급과 2급, 3급 인사 등 국정원 고위 간부는 윤 대통령과 국정원장이 상의해 임명한다.

앞서 계엄 선포 1주일 전 1급 인사를 단행한 국정원은 2급 인사를 진행했고, 대통령실에선 검증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계엄 선포로 인해 해당 검증 또한 중단되면서 국정원 내 모든 인사 절차도 멈춰 섰다.

이번 인사로 과거 인사 파동의 후유증을 떨어내려던 국정원은 2급 이하 인사가 중단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분위기다. 지난해까지 국정원 내에선 매파와 비둘기파 간 갈등이 고위직 인사 파동으로 변질됐었고, 조태용 국정원장 취임 이후 이를 정리하는 과정이었지만 1급 인사 이후 브레이크가 걸렸다.

외교부
초비상

국정원은 내부 직원들에게 업무 중단 지시도 내렸다. 산업스파이를 잡아내는 경제 방첩은 물론 대테러, 사이버테러 방지 등 국정원 내 주요 업무 차원서 대외 접촉 금지 지시를 내린 것이다. 업무 중단은 대선과 총선 등 정치적 민감성이 큰 시기에 이뤄지는 통상적 지시일 수 있으나 비상계엄 사태를 의식한 조치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국정원 출신 한 교수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있었던 일이다. 계엄 사태로 인해 갑자기 발동됐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이럴 때일수록 조심하자’는 성격의 조치”라며 “국정원이 현 상황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 역시 조심스럽게 반응하고 있다. 계엄령에 따라 한국이 은밀한 공격을 감행하거나 북방한계선(NLL) 인근서 제한적 교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졌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KCNA)>은 지난 11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시도 이후 한국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혼란에 대해 처음으로 보도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KCNA>는 계엄령 사태로 남측의 사회적 불안이 커지고 있다면서 윤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100만명 이상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미 심각한 국정 위기와 탄핵 위기에 직면했던 괴뢰 윤석열이 느닷없이 계엄령을 선포해 파쇼 독재의 총칼을 민중에게 겨눴다”면서 “수십년 전 군사 독재 시절의 쿠데타를 연상케 하는 그의 미친 행위는 야당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강한 규탄을 받았으며, 대중의 탄핵 열기를 더욱 폭발시켰다”고 전했다.

안보도
빨간불


<로이터>는 이는 북한이 남측의 정세를 바라보는 입장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남북 간 긴장감을 다시 한번 고조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 싱크탱크 스팀슨센터의 북한 전문가 마이클 매든은 지난 10일(한국시각) 미국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는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정권의 붕괴와 결합해 북한에 이중의 지정학적 도전을 제기했다”며 “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정권의 메시지를 재조정하고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을 우선시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전망했다.

매든은 비상계엄 사태와 시리아 내전 종식이 북한에는 ‘이중의 전략적 충격’이었을 것이라며 “북한은 시리아 정권의 붕괴를 예상하고 컨틴전시(비상대응) 플랜을 세워뒀을 수 있지만 그 속도까지는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고,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완전히 예상 밖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지난 4일(현지시각)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심한 오판이었다(Badly Misjudged)”고 혹평했다. 캠펠 부장관은 “나는 윤 대통령이 심한 오판을 했다고 생각한다”며 “계엄법의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이 한국서 깊고 부정적인 울림이 있다”고 말했다.

북러 협력 강화, 트럼프 행정부 출범 등 대외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서 비상계엄 파장이 대외신인도 악화를 야기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예정됐던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의 방한은 전격 취소됐다.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내년 1월 방한 일정도 불투명해진 상태다.

이대로 보고만? 미 역할 어디까지?
국정원 전 직원에 “대외접촉 금지”


빅터 차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ISI) 한국 석좌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서 “윤석열 대통령의 행동은 중국과 북한, 러시아의 위협이 고조되는 가장 부적절한 시점서 한국에 장기적인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 시점서 식별 가능한 유일한 결과는 현직 대통령이 물러나는 것이지만, 시점과 과정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한국과 미국, 전 세계가 큰 경제·정치적 비용을 치르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이 상황이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지만 악몽 같은 시나리오는 군이 다시 거리로 나오는 것”이라면서 “윤 대통령의 분노와 좌절이 정치적 혼란 속에 2차 계엄 선언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차 교수는 “미국은 지금까지 신중한 입장을 유지해 왔으며 어느 쪽에도 동조하지 않고 한국인이 위기를 해결하려는 동안 법치주의와 헌법적 절차를 존중해야 할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두 번째 계엄령 선포는 워싱턴이 아시아, 경제 안보, 유럽 전쟁에 대한 바이든과 동맹국의 전반적인 외교 정책을 확고히 지지해 온 한국 대통령에 맞서도록 강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이 선택하는 극단적 시나리오에는 2차 비상계엄 선언도 존재한다. 전문가들은 2차 비상계엄이 현실화될 경우 미국이 직접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현재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병력 동원이 결부되는 계엄 선포에 있어 동맹국인 미국에 발표 직전 사전 통보도 없었다는 점에 불만이 쌓인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한미 NCG회의 무기 연기나 오스틴 국방부 장관의 방한 보류 등에서 보듯 한미 공조에 단기적 악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시각도 없지 않다. 자칫 내년 1월 공식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에도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거세지고 있다.

순식간에
불편한 관계

윤석열정부가 북한을 향해 군사 도발을 감행하기라도 하면,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퇴임을 앞두고 미군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맞는다. 바이든 행정부가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다. 일례로 미국은 전두환 신군부의 12·12를 사주했다는 의혹에 시달린 바 있다. 하지만 관련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 미국이 12·12를 사주했다기보다 전두환 신군부가 미국에도 알리지 않고 정권찬탈을 기정사실로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hounder@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트럼프 2기 행정부 대응은?

도널드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 후폭풍이 커질 전망이다.

대외 정책 우려도 커진 상황서 트럼프 당선인이 주한미군 분담금 비용 대폭 인상을 요구하거나 관세 폭탄을 부과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 8일(현지시각) 공개된 미 NBC 방송과의 인터뷰서 유럽의 방위비와 무역 불균형 문제를 지적하면서 러시아 위협에 대응한 안보동맹체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서 미국의 탈퇴를 시사하는 등 초강경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는 인터뷰서 “나토는 우리를 이용하고 있다. 무역서 유럽 국가들은 우리를 끔찍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자동차와 식료품 등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면서 “그것에 더해 우리가 그들을 방어하고 있다. 그것은 이중고(Double Whammy)”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서 한국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선거 기간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에 대해서도 유럽 동맹국들을 바라보는 것과 유사한 인식을 여러 차례 내비친 바 있다.

심지어 한국을 ‘머니 머신(Money Machine)’이라고 부르면서 연 100억달러(약 14조원)의 방위비를 요구하기도 했다.

미국 신행정부 출범 직전, 권력 이양기에 중요한 대미 외교 공백은 불가피하게 됐다.

윤 대통령이 취임 후 최대 치적으로 한·미 동맹 강화를 내세운 만큼 더욱 그렇다.

실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이던 지난 2016년 12월은 오바마 행정부서 트럼프 1기 행정부로 이행하는 시기였다.

당시 최고위급의 실질적인 외교는 사실상 마비였다.

트럼프 당선인은 분담금, 관세 문제뿐만 아니라 한·미 동맹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분담금과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연계시킬 가능성도 제기된다.

북한과 직접 대화에 대한 의지도 수차례 언급했다. 이 과정서 한국 패싱도 우려도 있다.

한·미 동맹과 북핵·대북 정책 등과 관련해 트럼프 2기 행정부와의 사전 조율이 필수적이지만 윤 대통령이 사실상 국정운영서 멀어진 탓에 효과적인 물밑 조율도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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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