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고것밖에 아는 게 없단 말이여?”
“예.”
노인은 알 만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도로 머리를 뉘었다.
용운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쳐다보았다. 이제 사람이 옆에 있는 걸 안 이상 마음놓고 흐느낄 형편도 못 되었다.
뱃속에서 연방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온몸에 맥이 빠져 그냥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다리 밑을 스치는 찬바람 때문에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다리 밑 소굴
“너 언제까장 그러고 있을겨, 이놈아.”
굼벵이처럼 가만히 움츠리고 있으려니까 노인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용운은 말없이 그냥 있었다.
“어여 이리로 와.”
노인이 지나가는 바람소리처럼 말했다. 용운이 쭈뼛거리며 그 교각 뒤로 가 보니 뜻밖에 그곳엔 바람막이 거적까지 쳐져 있었다.
“얘, 이걸로 깔구 덮거라.”
노인은 둘둘 말아 베고 있던 푸대자루를 빼내 용운에게 주고는 대신 옆에 있던 군용 반합을 끌어다 목침으로 괴었다. 푸대자루는 껄끄러웠지만 두 겹이었던 탓에 추위를 견딜 만했다.
용운이 자리를 잡고 눕자 노인은 지혜로운 예언자나 도인처럼 굴면서 여러 가지를 에둘러 물었다. 용운은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의 모습과 헤어진 경위 등을 가능한 한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하지만 그 설명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것저것 주절거리다가 누가 자기를 목 졸라 죽이려고 했었다는 둥 쓸데없는 얘기만 내뱉었을 뿐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영감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크게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러나 용운에겐 전후 내막을 제대로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그때 중심부 교각의 오두막에서 한 사내가 거적문을 들치고 나왔다. 수염이 텁수룩한 그 중년 사내는 밤인데도 다 해져 너덜거리는 벙거지를 덮어쓰고 있었다.
“영감, 그 꼬맹이는 뭐요?”
용운을 발견한 그가 물었다.
“으응, 애미를 잃었다는구먼. 하기사 뭐 뻔한 짓이지만.”
“뭐요?”
“아, 애미가 빵 사온다고 해놓구 그대로 함흥차사라니 알쪼가 아니겄남?”
“흐음…… 오늘 그랬대요?”
“며칠 안 됐나 보네. 그런디 들어 보니 뭔가 사연이 있는가 보구먼 그려.”
“왜요?”
기억 못하는 사연은?
동냥 대신 엄마찾기
“사실인지 모르겄지만, 누가 끄나풀로 저를 목 졸라 죽일라구 했었다나.”
“뭐요?”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인디 그것 말곤 아무 기억을 못하는구먼 그려.”
그러자 사내가 직접 용운에게 물었다.
“꼬마야, 그게 진짜냐?”
용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그랬는데?”
“음…… 잘 몰라요.”
“아니, 널 죽이려 했는데도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예…….”
“그럼 집 주소는?”
“몰라요.”
“그럼 니가 아는 건 없냐?”
용운은 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다시 노인이 나섰다.
“글쎄 이렇다니께.”
“보아하니 머리가 좀 돈 모양이네요. 누가 죽이려고 했다는 것도 어느 밤에 꿈꾼 걸 가지고 사실로 착각하는 모양이로군.”
“응?”
“뻔하잖수. 그렇지 않구야 떠돈 지 얼마 안 됐다는 놈이 그거 하나만 달랑 기억한다는 게 우습지.”
“흠, 듣고 보니 그렇구먼 그랴. 그나저나 워짠댜? 내일 경찰서에라도 데려다줘야 되는 거 아닐까?”
“그래 봐야 고아원 신세니 놔둬요. 팔자대로 돌아다니다가 경찰서에 끌려가도 제풀에 끌려가게.”
사내는 시큰둥하게 말하곤 일어섰다.
아침이 되어 용운은 시끌벅적한 소란에 눈을 떴다. 오두막에서 한 떼의 거지들이 몰려 나오고 있었다. 구걸을 나가는 모양이었다.
“항시 얘기하지만 거지는 몰려다니면 우습다. 따로따로 다녀야 실속이 있다는 걸 명심해라.”
거지 왕초가 점잖게 한마디 던지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어젯밤의 그 사나이였다.
노인이 용운에게 말했다.
엄마 찾아 남산행
“너 깡통 없냐? 안 굶어 죽을라문 동냥을 나가야 할 텐디.”
“나는 엄마 찾으러 갈 거예요.”
“뭐? 어디루?”
“멀리 남산으로요.”
막연한 대답이었다. 영감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뭐 너 좋을 대루 하거라. 안됐긴 하다만 니가 그라겄다는디 뭘 어쩌겄냐? 돌아댕기다가 잘 데 없걸랑 또 오거라.”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