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건 아주 엄숙한 의식이니, 마음가짐을 경건히 해야 될 것이야.”
반장이 팔을 괴고 방바닥에 편하게 누우며 말했다. 이어 스라소니가 명령했다.
“두 놈 일어서! 지금부터 엄살 까거나 방정떠는 새끼는 죽는 줄 알아라. 이쪽으로!”
신입 빠따
둘은 시키는 대로 관물대에 손을 짚고 엎드렸다. 이른바 신입 빠따였는데, 한 사람이 한 대씩 갈기고 삽자루를 인계하는 것이었다.
혹독한 매질을 다섯 대까지 견디던 용운은 그만 나뒹굴고 말았다. 피에로는 입술을 앙다문 채 견디고 있었으나 곧 푹 쓰러져 버렸다.
“이 새끼들, 안 일어나?”
좀 어리다고 특별히 봐주지 않았다. 울어도 빌어도 그들은 마구 차고 밟았다.
맞고 뒹굴고 애걸하면서 기어이 매를 다 맞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절차가 다 끝난 건 아니었다.
반장이 말했다.
“어때? 한바탕 먼지를 털고 나니 몸과 맴이 한결 홀가분하지 않은감?”
“흐흐…….”
“어허! 아직도 찜찜한 데가 남았는가, 어째?”
“아, 아니, 기분 짱입니다!”
“흠, 흐흐…….”
반장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나서 말했다.
“다행이구먼. 그럼 좋은 기분으로 노래나 한 곡조 들어 볼까. 흠, 너가 각설이 타령이나 한번 해봐.”
그는 턱짓으로 용운을 가리켰다.
용운은 주춤거리다간 또 매질이 닥칠까 봐 곧장 목청을 뽑았다.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아하 품바가 잘도 한다 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
일자나 한 자나 들고나 보니
일백 년도 못살 인생 사람답게 살고파라
이자나 한 자 들고나 보니
이놈의 세상 유전무죄 무전유죄 도는 세상
삼자나 한 자나 들고나 보니
삼천리에 붉은 단풍 들고 우리네 가슴에는 피멍 든다
사자나 한 자나 들고나 보니
사시사철 변함없이 행복하게 한번 살아보세…….
갑자기 백곰이 소리쳤다.
“스톱! 개새끼, 뭐가 사시사철 행복이야? 유치해서 더 못 듣겠군. 이번엔 너가 한번 재주를 부려 봐. 노래는 재수없으니까 더 이상 하지 마.”
그는 피에로에게 지시했다. 피에로는 한 손을 올려 마치 버스 손잡이를 잡은 듯이 하고 짐짓 상체를 흔들면서 입을 열었다.
“에~ 지금 하려는 것은 ‘앵벌이’라는 것으로서 차 안에서 물건을 파는 일이죠. 우선 신문이나 볼펜, 껌, 칫솔 따위를 사서 가방에 담아들고 버스에 오른답니다. 그러고는 앞에 서서 한바탕 청승을 떠는 것이죠, 헤헤…….”
한 대씩 갈기고 삽자루 인계
성스러운 구도에 동참할 자세
“잔소리 말고 본방송부터 해.”
“예, 예…… 에~ 복잡한 차중에 잠시 소란을 떨게 되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본인은 병든 할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책임지고 있는 한 가족의 가장입니다. 일찍이 열 살의 나이로 조실부모하고 험한 세파 속에 가랑잎처럼 떨어져야 했던 저는, 삶이 너무나도 힘겨워 그동안 수차례 죽어 볼까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골방에서 반신불수로 쿨럭이는 할머니와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고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는 동생들의 모습이 떠올라 차마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이리도 힘든 것일까요?
하지만 손님 여러분, 저는 믿습니다. 아직도 이 사회가 그리 냉정하지만은 않다는 것과 올바른 양심으로 꿋꿋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행복의 웃음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수많은 죄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가난하게는 살아도 추악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볼펜 몇 자루에 여러분의 동정을 구하고자 이렇게 버스에 뛰어오른 것입니다.
물론 시중에 나가시면 몇십 원에 구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부득이 이 자리에서는 일금 백원에 모실까 합니다. 부디 외면하지 마시고 지나는 길에 한 자루씩 구입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용기있게 살라는 채찍질로 알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청을 좀더 구성지게 뽑아 봐. 아니, 이제 그만둬. 미친 놈…….”
백곰은 콧방귀를 한번 뀌곤 중얼거렸다.
“그럼 아리랑 고개나 한번 넘어볼까나.”
두 명의 원생이 기다렸다는 듯 긴 고무줄을 준비해 양쪽에서 팽팽히 잡아당겼다. 고무줄은 용운의 허벅지 높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스라소니 눈이 말했다.
“니네덜 아리랑은 다 부를 줄 알겠지?”
“예!”
“속세의 먼지를 털었으니 이제부터 성스러운 구도에 동참할 자세가 갖춰졌는지 시험하겠다. 눈 감고 아리랑을 흥얼대면서 이 고무줄을 정중히 넘어댕긴다. 만약 쪼끔이라도 고무줄을 건드릴 시엔 큰 곡소리가 나게 된다는 걸 명심해라. 실눈을 떠도 마찬가지다.”
아리랑 고개
피에로가 바지를 한껏 추켜올리며 가랑이 사이에 공간을 재고 있었다.
용운은 눈을 부릅뜨고 고무줄의 높이와 위치 등을 살펴보았다.
저것에 닿지 않고 넘으려면 다리를 최대한 높이 들어올려야 하고, 될 수 있는 한 고무줄과 가까운 거리에 발을 내려놔야 다시 이쪽으로 넘어올 때 유리하리라.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