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의 <대통령의 뒷모습>은 실화 기반의 시사 에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을 다뤘다. 서울 해방촌 무지개 하숙집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작가는 무명작가·사이비 교주·모창가수·탈북민 등 우리 사회 낯선 일원의 입을 통해 과거 정권을 비판하고, 그 안에 현 정권의 모습까지 투영한다.
“흥, 차라리 드러내놓고 하지 그래. 곪은 상처와 치부를 알고 나면 신체를 살리기 위해 도려내버릴 수도 있을 텐데….”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있잖아. 차츰차츰 나아지겠지.”
“흙탕물이 가라앉아 봤자 미꾸라지 몇 마리만 작당해 장난치면 곧 뿌옇게 변질될 텐데 뭘. 미국 같은 가물치는 꼬리만 살짝 쳐도 우리네 젖줄인 강물이 검붉어지고….”
삐라를 날려라
“과장이 쫌 심하군.”
“고기 비유였지 별 과장은 아니지. 솔직히 미국이 우리나라를 위해 미군을 주둔시킬 필요가 어디 있겠어? 중국을 견제하고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술수인 걸. 만약 우리 국민이 진실을 깨달아 합심한다면 미국에 수천억 달러의 세금을 퍼줄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수천억원의 전세금을 받고 월세까지 받아야 해. 뻔뻔스러운 놈들이 남의 집 안방을 차지해 앉아선 주인인 양 기고만장하는 꼴이라니!”
“흐흐, 너무 흥분하지 말라구. 그래봤자 양파 껍질 벗기기 흑백 논쟁일 뿐이니 말야. 그럼 혼자 양파 잘 까보슈. 난 바빠서 이만….”
“혼자서라도 깔 건 까야지. 다이아몬드는 아니더라도 상큼한 액즙은 나오겠지 뭘.”
사내는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숙생들 사이에선 늘 그렇듯, 거창한 문제도 어느 결에 사소하게 축소돼 사라져 버리곤 했다.
하숙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계였다.
아니, 하숙이라는 축소된 사회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어느 날, 옥탑방의 약장수 같은 점쟁이 노인네가 피에로씨와 함께 신흥 종교를 창시하려 획책하고 있었다.
물론 비밀스런 미션이었는데, 피에로씨의 가벼운 입이 문제였다. 하긴 그도 극비사업의 출발인 만큼 무척 입주둥일 조심했으나, 나한테만은 털어놓고 말았다.
아마 어두운 삶의 터널을 지나 어쨌든 새로운 꿈(몽상이겠지만)을 꾸게 된 나름의 큰 포부와 기쁨으로 인해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들 또한 그러지 않는가?
특히 그는 어려운 시절 내게 때때로 도움을 받았는데, 그걸 자기 나름대로 오해한 나머지 나를 너무 순진무구한 인간으로 판단해 버리지 않았는가 싶다.
하기야 난 뭐 그들의 ‘사업’을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보이는 대로 사실을 마음속 카메라 렌즈에 담을 뿐….
야밤 중에 피에로씨가 캔맥주 3개를 검은 비닐 봉지에 담아 들어왔다. 의외로 전작은 없는 성싶었다.
하지만 한 캔을 따서 목마른 짐승처럼 꿀꺽꿀꺽 들이켜고 나선 갑자기 열기 어린 불그스레한 눈으로 말했다.
“인생은 참으로 다양하더구먼. 전혀 상상치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세계….”
“어떤?”
“내가 전에 강조했던 성공법은 솔직히 말해 차원이 낮아. 현실 초월적인 모토는 물론 영원하겠지만,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은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아. 그래서는 제아무리 애를 써도 성공하기가 힘들겠지. 내가 직접 눈물겹도록 체험한 바이지만….”
“그래서요?”
하숙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한계?
‘정치 종교’ 뉴비전 필로소피 정체는?
그는 작은 눈을 깜박거리더니 주머니 속에서 종잇조각을 꺼냈다.
“자, 이걸 한번 보시라구. 새 시대를 열어 갈 강령이니까.”
“훗….”
“웃지만 말고 이 메모를 토대로 삼아서 뭔가 좀 그럴듯한 헌장을 써 달라구.”
“….”
“왜 그리 눈썹을 찡그려? 우리 이 사업이 잘만 되면 아우님도 무명작가를 벗어나 유명짜하게 성공할 텐데….”
나는 종이쪽지를 펴서 천천히 훑어보았다.
신초월통일협회 강령(초안)
우리는 무슨 신흥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생활 방침을 내놓아 보려고 한다.
기존 철학이나 사상에 기대지 않은 뉴비전 필로소피이며 참다운 정치 종교이다.
우리는 모든 신을 초월한다!
22세기 미래의 우리 현실에 맞지 않고 오히려 방해되는 기존 교회와 성당 그리고 불교 사원 따윈 모두 사갈시한다.
그 속에 모셔 놓은 각종 가짜 신들도….
우리는 현실(지상)에서 필요한 신신(新神)을 모셔 옹립하고 특히 신국 통일을 위해 목숨조차 기꺼이 내놓는다.
여대통령께서 통일대박론을 내놓은 만큼 우리도 물심양면 힘껏 도우리라!
그 외에도 이런저런 소강령이 있었으나 나는 종이쪽지를 슬쩍 던져 밀었다.
“그만하면 괜찮구먼. 뭘 더 고쳐 달라고 하슈?”
“그래도 이 우여곡절 많은 세상에서 써 먹으려면 기름을 좀 쳐야지. 매끄럽게 하면 서로 좋지 뭘. 하핫….”
“정말 실망스럽네요. 그동안 별 깊게 사귀진 않았다더라도, 서로 어느 만큼 가치관을 알 만은 할 텐데….”
“뭘 그리 심각하게 말하시누. 내가 쩐두 좀 챙겨줄 테니께. 물론 나중에 잘 되면….”
나는 맥주를 한 모금 쭉 마셨다. 생각 같아서는 쫓아 버리고 싶었으나 미소 지으며 물어보았다.
“어떤 식으로 고치란 말이쥬?”
“일단 골자만 적어논 거니까 좀 살을 붙이고 윤기를 내 제갈공명의 출사표 같은 명문을 만들어보란 얘기지 뭘.”
“개떡 같은 출사표… 그것 땜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이익을 본 사람도 있겠지 뭐.”
“어쨌든 거창스러운 출사표 따위로 사람의 참 마음 참 정신을 속이고 마취시키고 우롱해 신흥 사이비 교주 궁전을 짓는 데 가담할 생각은 없소이다.”
“신흥이라고 죄다 사이비라면 퍽 섭섭하지. 그리구 사실 우린 거창한 궁전을 지을 계획조차 없어. 그냥 여기 옥탑이면 되지 뭘.”
“하하, 처음엔 그러다가 나중에 혀가 서서히 변질돼 개소리를 지껄이잖아요. 잘 알면서….”
“너무 그렇게 비관적으로 보지 마시게나. 좋은 씨앗은 뿌리면 고운 싹이 나잖아.”
출사표
“흠, 몽상 속에서 잘 한번 해보세요. 그건 그렇고… 가끔씩 다니러 오는 그 영감님… 빨간 귀신 같은 그 영감님은 대체 누구예요?”
“글쎄 뭐, 나두 잘 몰라.”
“뭘 그래요? 소문 들어 보면 이따금 함께 모여 비밀스레 속닥거린다던데….”
“누가?”
“소문이.”
<다음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