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비밀경찰 의혹’ 왕해군 황금 인맥 추적

왕서방 뜨자 서둘러 인연 지우기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윤석열정부와 중국의 관계가 악화일로다. 국제인권단체 ‘세이프가드 디펜더스’가 공개한 중국의 해외 비밀경찰 의혹 문건이 화근이 됐다. 국내에서는 서울의 한 중식당이 비밀경찰 의혹의 중심에 섰다. 중식당 주인 왕해군 동방명주 대표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으나 의혹을 말끔하게 해소하지 못했다.

왕해군 동방명주 대표는 중식당 사업 외에 여러 활동을 이어왔다. 특히 정치권 인사들과의 교류가 끈끈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라인인 국민의힘 친박(친 박근혜)계 인사를 포함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친분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으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 등이 꼽힌다.

세이프가드
의혹 폭로

스페인 마드리드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세이프가드 디펜더스’(이하 세이프가드)는 지난해 9월, 중국이 ‘해외 110 서비스 스테이션’이라는 이름의 비밀 해외경찰서 54곳을 불법 운영 중이라고 폭로했다. 최근에는 한국 등 48곳에서도 추가 시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110은 한국의 ‘112’에 해당하는 중국 경찰 신고번호다. 이 단체는 중국이 비밀경찰서를 통해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 국적자들을 감시하고 괴롭히며 경우에 따라 본국으로 송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이프가드가 공개한 ‘해외 110. 중국의 초국가적 치안 유지 난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중국이 유럽을 중심으로 해외 21개국에 54개의 비밀경찰서를 개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망친 중국 반체제 인사들을 비밀경찰서에서 잡아들이고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 당국은 이 시설들이 주재국 현지에 사는 중국 국적자들의 운전면허 갱신이나 여권 재발급 등 서류 작업에 행정적 도움을 주려는 것이라며 의혹을 부인했다. 코로나19 사태로 해외 공관이 문을 닫는 등 서류 작업이 지연되면서 어려움을 겪은 중국 국적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시설들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세이프가드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이 해외 110 서비스 스테이션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19 대유행보다 몇 년 전이다. 중국 당국의 해명과 달리 중국의 비밀경찰서는 일본과 캐나다 등 세계 곳곳에서 실체가 속속 확인되고 있다.

일본 외무성은 지난달 19일 도쿄 등 2개 도시에서 중국 공안국이 개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비밀경찰서를 파악했다고 보고했다. 또 캐나다 경찰도 지난해 10월27일 토론토 일대에 3곳의 중국의 비밀경찰서가 설치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네덜란드 정부도 지난달 1일 자국 내 ‘중국 불법 경찰서’ 2곳을 즉시 폐쇄했다고 발표했다.

미국도 중국의 해외 비밀경찰서 의혹에 우려를 표명했다. 지난 11월 미 연방수사국(FBI)의 크리스토퍼 레이 국장은 미 상원 국토안보위원회에서 의원들의 관련 질의 때 “매우 우려하고 있다”며 “우리는 그 경찰서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100여곳 존재
일부 국가 조사 후 폐쇄

우리 정부도 범정부 차원에서 국내의 중국 비밀경찰서 실태 파악에 나섰다. 이번 실태 파악은 군과 경찰의 방첩 조직과 외교부 등 관련 정부부처가 동원됐다.


국내 중국 비밀경찰서로 지목된 동방명주 식당 대표 왕씨는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나섰으나 의혹을 말끔하게 해소하지 못했다. 동방명주는 자본 잠식 상태에도 불구하고 5년 동안 영업을 해온 사실 등으로 인해 방첩당국의 의심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3000만원에 달하는 월세를 내지 않아 이 식당의 운영권을 가진 임대인과 갈등을 빚는 상황이다.

적자에도 불구하고 운영을 지속하다 의혹 제기 후 문을 닫았다는 지적에 대해 왕씨는 “총 60년의 계약을 체결하고 이미 45억원 이상을 리모델링 등에 투자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라며 “(영업 종료는)새로 유선장을 인수한 업체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선박 안전 문제가 제기됐던 것이고, 타이밍이 공교로웠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왕씨는 자신을 ▲한화중국평화통일촉진연합총회 및 중국재한교민협회 총회장 ▲중화국제문화교류협회장 ▲서울화조센터(Overseas Chinese Service Center·OCSC) 주임 ▲서울 화성예술단장 ▲동방명주 실질 지배인 ▲HG문화미디어 대표 등으로 소개했다.

중국 정부가 반체제 인사를 중국으로 송환하는 것을 돕는다는 의혹이 제기된 OCSC에 대해서는 “중국 국적의 중환자나 정신질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도운 것”이라며 “반중 인사 강제 연행 같은 일은 절대 없었으며, 그럴 능력이나 권한도 없다”고 강조했다.

법무부·경찰
관계자들 접촉

OCSC는 국내에서는 화조중심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비밀경찰서로 이어지는 통로로 알려져 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OCSC는 국무원 화교판공실의 지원을 받아 현지 중국교포들을 위한 긴급 지원, 통일 교육, 법률 지원, 빈곤 완화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단체다.

하지만 중국 언론의 설명과 달리 OCSC는 단순한 민간단체가 아니다. 2016년부터 화조중심센터 대표를 맡아온 왕씨는 2017년 5월부터 서울 영등포 여의도 인근 한강 유람선에서 주한중국대사관 영사부, 서울 남부 출입국 관리사무소, 재한중국교민협회총회 등을 초대해 화교와 중국인의 고충을 해결해주기도 했다.

이들은 세미나에서 ▲중국인이 귀국 시 국민연금 되돌려 받는 법 ▲취업비자 발급방법 ▲중국 방송 불법송출 예방법 등을 정부 관계자와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왕씨와 부인 배모씨(39)는 평소 ‘친중 행보’를 보여온 것으로 전해진다. 왕씨는 중국 관영매체 <신화통신> 자회사인 한국채널과 문화콘텐츠업체, 재한교민협회, 중국화교연합회 등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개발·여행·문화교류 등 사업에도 참여한 바 있다.

배씨 또한 유명 연예 엔터테인먼트 F사의 사외이사로 이름을 올리고 중국 자본이 들어간 사극 드라마 제작에 참여했다.

2002년 왕씨가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를 설립할 때 “협회의 취지와 방침은 ‘중국의 교민사업’과 ‘평화통일 사업’을 위한 것”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언론은 이들이 “우리는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부의 관리를 받는다” “중국대사관의 지도를 받았다”고 언급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통일전선부는 중국 공산당 하부 조직으로 해외 정계·고위 공직자와의 교류, 중국에 대한 비판 약화 등의 역할을 맡고 있다.

영사 역할
OCSC 실체

OCSC는 중국 반체제 인사들에게 비판적이었던 한국 화교 1세대 인사의 건물에 주소지를 둔 바 있다. OCSC는 2015년 서울 강남구의 한 빌딩에 입주했다. 이 건물은 한국 화교사회의 원로였던 고 한모씨가 소유했다가 현재는 아들 명의로 돼있다.

한씨는 2002년 중국 교민협회를 주도적으로 세웠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이 협회는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며 대만과 홍콩의 독립에 반대하고 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기 위한 취지로 설립됐다. 종종 반체제 인사에 대한 비판 의견도 냈다.

한씨는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비공식 주치의로서 한·중 수교를 위한 ‘비밀특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중국 내 인맥이나 영향력이 탄탄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

OCSC는 중국 국무원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소속 관할구역 ‘대사관’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중국 화교 네트워크’ 홈페이지에는 2015년 ‘한국 화조중심’이라는 제목과 함께 관할구역, 교단명칭, 연락 방법 및 주소와 전화번호 등이 나와 있다.


화조중심은 OCSC의 중국식 표기다. 중국 국무원 소속 화교판공실이 교민들을 위한 정보제공을 위해 운영하는 홈페이지로 일종의 정부 공식정보인 셈이다. 이 게시글에는 관할구역을 뜻하는 관구에는 ‘사관’이라고 적혀 있다. 통상 ‘대사관’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OCSC는 2017년부터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까지 ‘1일 영사관’ 행사를 진행했다. 2017년 5월과 12월에는 한 업체에서, 2018년 10월에는 동방명주에서 진행했다. 이렇게 세 번의 행사에는 주한중국대사관 영사부 직원뿐 아니라 우리나라 경찰청과 법무부 관계자도 참석했다.

윤상현·홍문표·김두관…
정치권 막강 라인 과시

경찰청, 법무부 직원들은 이 자리에서 생활안전, 출입국 등에 관해 중국 교민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왕씨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의외의 정치권 인맥을 형성해온 것으로 파악됐다. 2015년 8월 왕씨는 한중민간경제협력포럼 정례회에서 당시 대통령 정무특보였던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과 이기주 전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장석영 전 청와대 미래전략수석실 선임행정관, 유진규 전 동티모르 대사, 정승 전 식품의약품안전처장, 오신환 서울시 정무부시장 등을 만났다.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과의 인연도 있다. 김 의원은 경남도지사 시절 2012년 중국 투자 유치와 경남 관광 홍보를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 김 의원의 자녀는 2004년 베이징에 머물며 공부해 중국인민대학을 졸업해 중국은행 서울지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김 의원은 2020년 10월 동방명주에서 열린 ‘태권도 세계화 개척의 역사 사진 전시회’에 참석했다. 당시 월남전 파견 교관단과 국회태권도협회장인 국민의힘 홍문표 의원과 윤 의원, 윤영석 의원,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 김두관 의원, 서춘수 전 함양군수가 참석했다.

김 의원은 같은 해 11월12일 왕씨와 동방명주에서 ‘코로나 시대 한·중 문화 및 경제 활성화를 위한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왕씨와 김 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한·중 발전을 위한 기자협의회’ 발대식이 열리기도 했다.

2021년 6월에는 조선족 경제인들의 구심체가 되는 재한동포경제인연합회가 창립됐다. 이 자리에는 김 의원을 포함해 문희상 전 국회의장, 민주당 이해찬·이낙연·송영길 전 대표, 정세균 전 국무총리, 김무성 국민의힘 전 의원 등이 참석했다.

여야 가리지
않고 친분

중국 측에서는 중국 외교부 산하 아주경제발전협회 권순기 회장과 왕씨가 자리했다. 같은 달 열린 서울차세대영화제에는 윤 의원과 이왕재 서울대학교 교수가 참석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형식적 자리에 간 것이지, 왕씨와 깊은 친분이 있는 분들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도 “윤상현 의원이 실제로 왕씨와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며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게 논란이 될만한 일은 아니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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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