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위기’ 무너지는 성남제일초교, 왜?

땅 내려앉고 벽 갈라져도…문제없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경기도 성남제일초등학교에서 ‘등교 거부 사태’가 빚어졌다. 노후화된 학교 시설 여러 곳에서 균열이 발견된 가운데, 학부모들은 안전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학교 측은 당초 이를 수차례 부인하다가 전문가 경고 이후 태도를 바꿨다. 안전 검사 결과를 근거로 ‘수수방관’하던 교육지원청과 시청 등도 ‘뒷북 대응’ 행렬에 따라나서는 모양새다.

성남제일초등학교(이하 제일초)는 1969년 11월 문을 열었다. 오르막길에 세워진 제일초는 높이 4m 이상, 길이 200m에 달하는 옹벽이 학교 삼면을 감싼 구조다. 개교 53년째, 역사를 함께한 건물과 옹벽도 어느덧 낡은 시설이 됐다. 오래된 연식과 인근 아파트 공사가 맞물리자, 시설 안전 문제가 차츰 수면 위로 부상했다.

붕괴 위험

2018년 아파트 공사가 시작된 이래로, 학교는 꾸준히 금이 갔다. 학부모들은 2020년 2월부터 학교 측에 꾸준히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이들은 그해 1월, 별관 4층 화장실 벽에 균열이 생긴 걸 뒤늦게 알았다. 이후 학교에선 간담회를 거쳐 지반 검사, 보강공사 등을 실시했다.

검사 결과만 놓고 보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제일초 학부모회 관계자는 “당시 LH가 학교 건물은 ‘내진 보강이 필요한 수준이나 주시하면 된다’고 했고, 옹벽은 ‘균열이 발견돼 보강이 필요하지만, 추가적인 균열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며 “이 말대로라면 지금 문제가 없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급기야 학교는 공사 일정과 내용 등을 제대로 알리지 않기 시작했다. 학부모 항의가 계속된다는 게 이유였다. 관련 내용은 당시 학부모회 회장과 운영위원장 등에게만 한정적으로 전달됐다. 일반 학부모가 LH에 직접 문의하고서야 공사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난해 들어 교장이 바뀌었지만, 답답한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여전히 적절한 조치보다 납득 못할 해명이 앞섰다.

지난 4월, 별관 화장실에 재차 균열이 발생했다. ‘단순 외부 균열’이라는 해명으로 흐지부지 넘어간 지 한 달 뒤, 건물에선 물이 나오지 않았다. 성남시청과 성남교육지원청은 각각 인근 공사장과 급식실 용수 과다 사용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내려앉는 땅과 금 간 옹벽, 그리고 단수 현상을 떼놓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50년 된 옹벽 붕괴?…학교 건물·도로에도 균열
지반 침하·단수 사태에도 “안전 점검 이상 무” 

학부모회 관계자는 “바로 옆에 아파트가 들어서는데, 공사장·급식실에서 물 좀 썼다고 단수될 정도면 (아파트)입주 후에는 단수 문제가 심해질 것 아니냐”며 “하중 문제로 중단됐던 물탱크 설치 방안을 누더기로 고칠 생각보다, 제대로 된 단수 원인을 파악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달부터는 건물 하부균열과 지반 침하현상이 목격되기 시작했다. 별동 건물과 지반 사이에는 성인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큰 구멍이 발견됐다. 본관 쪽 고압전기시설 안전망은 이미 10도가량 휘었다. 

결국 학교는 학부모 요청에 따라 별관 교실을 본관으로 이전했다. 이번 2학기부터는 전교생이 본관에서 수업을 듣게 됐다. 


이런 가운데 옹벽 붕괴 징후는 계속 포착됐다. 옹벽 석축의 토사가 유실되면서 나무뿌리 일부가 드러나고, 갈라진 옹벽 틈새에는 이끼가 자랐다. 이에 학부모들은 학교·교육지원청·시청에 재차 민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여전히 “문제없음”이었다.

관련 기관들이 주된 근거로 삼은 것은 이번에도 ‘안전 점검 결과’였다. 제일초는 2019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시행된 정밀 안전 점검·진단에서 줄곧 ‘B등급’을 받았다.

교육지원청 자료에 따르면 B등급은 ‘보조부재에 경미한 결함이 발생했으나 기능 발휘에는 지장이 없으며, 내구성 증진을 위해 일부 보수가 필요한 상태’다. 2020년 한 차례 C등급을 받은 바 있지만, 일부 보수공사를 거친 뒤 곧바로 B등급으로 복귀했다. 지난 2월 실시한 점검에서도 B등급이 나왔다. 

제일초 건물과 도로·옹벽에 간 금이 점차 늘어가는 중에도, 검사 결과는 꿋꿋이 안전을 담보하고 있었던 셈이다.

참다못한 학부모 등교 거부…전교생 절반 동참 
학교 측, 무단결석 처리하려다 뒤늦게 번복

결국 학부모들은 지난 22일부터 등교를 거부했다. 총 400여명(병설 유치원생 포함)에 달하는 전교생 중 절반 수준인 약 200명이 학교에 가지 않았다. 이튿날인 23일에도 비슷한 수가 결석·조퇴했다.

이수곤 전 서울시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가 남긴 소견이 등교 거부운동의 신호탄이 됐다. 그는 지난 21일 제일초를 직접 찾아 “옹벽 붕괴는 이미 진행 중”이라며 “지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국내 토목공학 분야 최고 권위자로, 2011년 우면산 산사태와 2018년 상도유치원 붕괴 사태를 미리 경고한 바 있다.

학부모회는 학교 측에 진상파악과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학부모회 관계자는 “안전불감증 가득한 학교에 아이들을 보낼 순 없었다”며 “그동안 여러 번 문제 해결을 요청했음에도 진전된 건 없었다”고 토로했다.

학교 측은 ‘무단결석’ 처리로 강경 대응에 나섰다. 일부 학부모는 ‘가정체험학습’을 신청했지만 반려됐다. 가정체험학습은 원칙적으로 사흘 전에 신청해야 하는데, 전날이나 당일 신청하는 것은 절차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학부모회 일각에선 학생들을 무단결석 처리한 대목에서 학교 입장을 엿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침상 결석은 인정 결석과 미인정 결석으로 나뉜다. 인정 결석이란 여러 사유에 따라 결석의 정당성이 인정되는 경우로, 결석에 따른 불이익이 사실상 없다. 미인정 결석은 이와 배치되며, 무단결석은 미인정 결석에 속한다.

문제는 인정 결석의 범위가 교장 재량에 따라 폭넓게 ‘인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학교 시설 안전 문제로 결석한 학생에게 인정 결석 대신 무단결석이 주어진 건, 안전 문제를 사실상 부인한 걸로 읽힌다는 게 일각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학교 측이 내세운 안전 점검 결과의 신뢰성을 의심한다. 그는 지난 22일 49페이지에 달하는 자문 의견서를 공개하며 붕괴 위험성을 거듭 경고했다. 해당 의견서에 따르면 앞선 안전 점검은 옹벽 붕괴 진행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의견서 내용을 종합하면 그간의 안전 점검은 ▲조사 표본 수가 부지 규모에 비해 매우 불충분했고 ▲옹벽 석축 인근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탓에 석축 뒤쪽 지질 상태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균열·침하 현상에 대한 원인 규명이 부족했다.

이수곤 교수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아”
관련 기관 이 교수 나서자 황급히 태세 전환

이 교수는 인근 아파트 공사를 옹벽 붕괴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각종 징후를 종합해볼 때, 인근 아파트 공사와 옹벽 붕괴 현상 사이에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며 “옹벽이 붕괴되면서 지반 균열과 침하, 단수 현상 등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석축 인근에서 지하 터파기 공사가 광범위하게 진행됐다”며 “공사 중 보강공사를 했다고는 하지만, 석축 곳곳에서 균열과 튀어나온 지점이 발견된다”고 부연했다. 아울러 “제일초 옹벽은 철저한 보강공사가 시급하며, 일부 보수보다도 전면 개축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짚었다.

자문 의견서가 전달된 뒤, 학교와 교육지원청은 태세를 완전히 전환했다. 제일초는 다시 내부 협의를 거쳐 학생 출석 여건을 보장하겠다는 뜻을 전했고, 교육지원청 역시 문제 재진단을 위한 절차에 돌입했다.

제일초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출석 문제는 ‘기타 인정 결석’으로 처리하기로 다시 협의했다”며 “결석 기록을 꺼리는 학생은 가정체험학습으로 돌릴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안전 점검을 재차 시행하기 위해 교육지원청과 계속 협의 중”이라며 “‘그린스마트 학교’로 선정돼 2025년 리모델링을 앞둔 만큼, 안전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제일초는 내부 협의를 통해 온·오프라인 동시 수업을 추진하고 있다. 학교에 나오지 않은 학생들도 온라인으로 실시간 수업을 듣도록 해 교육여건을 보장한다는 구상이다.

성남교육지원청 관계자는 “2020년에 이어 올해도 관련 민원이 있어 각종 조사와 간담회를 진행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났었다”며 “안전 검사 결과에 대한 반박이 제기된 만큼, 시청과 LH 등에 공문을 발송해 관련 절차를 다시 밟도록 요청할 것”이라고 전했다.

아울러 “해당 사안은 경기도교육청까지 보고가 올라간 사안”이라며 “임태희 경기도 교육감이 직접 현장을 방문해 사태를 파악하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임 교육감은 지난 23일 오후 제일초를 찾아 학부모 간담회를 열었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교육감 간담회 자리에서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학부모들은 간담회에서 교육청에 “점검 대신 옹벽 개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교육청 관계자는 “정밀검사를 진행한 뒤 결정하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대신 “교육청과 학부모 측이 각각 검사 업체를 선정해 비교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학부모들은 “다른 이들도 교육청 제안에 동의할지, 학부모 전체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외에도 간담회에서는 ▲학교 건물 그린스마트 개축 ▲학생 긴급 이동 공간 확보 ▲전기시설 균열 임시 보수 등이 거론됐다. 하지만 교육청은 이마저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사실상 반려했다. 등교 역시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별관·옹벽 등과 달리 본관 건물은 안전하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관련 기관들이 문제를 다시 살피고는 있지만 “사실상 답보 상태의 연장선일 뿐”이라는 불만도 제기된다. 모두 엄중한 상황을 인식했음에도, 시원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곳은 드물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학부모 사이에선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한 학부모는 “기관에서 검토한다는 것도 재점검 여부를 가리키는 것이지, 개축 여부를 논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며 “이번에는 학생 안전을 위한 조치가 최대한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가운데 최근 성남시청 홈페이지 ‘행복소통청원’ 게시판에는 제일초 관련 청원이 수차례 올라왔다. 그중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청원은 접수 나흘 만에 지지수 2100건을 넘겼다. 현재 진행 중인 청원 중 최고치다. 청원인은 게시글에서 ‘학교 시설 폐쇄 및 안전지대 임시 모듈러 교실 설치’와 ‘지반 기초 다지기’ ‘본관과 별관 개축’ 등을 요청했다.

“성남시청
대답해야”

성남시청은 조만간 해당 청원에 대한 ‘답변 영상’을 게시할 것으로 보인다. 성남시청에 따르면 청원 접수 후 30일간 2000명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청원이 성립된다. 성립된 청원은 관련 부서 검토를 거친 공식 답변을 받을 수 있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토목 전문가 이수곤 교수
“반복되는 붕괴 원인은 시스템 부재”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한 지 27년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붕괴 위기·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올해만 해도 광주 화정동 아파트 붕괴 사고, 양주 채석장 붕괴 사고 등이 터졌다. 무엇이 문제일까.

전문가는 ‘구조’에서 원인을 찾는다.

개인의 안전불감증보다도 정확한 상황 진단을 막는 점검 체계 자체가 문제라는 의미다.

이 같은 사실은 이번 ‘성남 제일초 붕괴 위기’ 사례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수곤 전 서울시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정밀 점검 결과가 기존과 다르게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모두들 당시 (점검을) 주관했던 직원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겠느냐”면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시스템이 미비한 것이지, 정해진 대로 따른 사람에게 책임을 다 떠넘겨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 재난관리 시스템은 형해화 상태다. 안전 점검을 할 때 크로스체크가 이뤄져야 하고, 또 이중삼중의 그물망으로 촘촘한 체계가 필요한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며 “공무원들도 업무 범위를 벗어나 판단·행동을 하기가 너무 어렵다. 그래놓고 문제가 발생하면 누구 ‘실수’로 모는 행태는 너무 야박하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사고가 난 뒤 누구 잡아 처벌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 가장 중요한 건 사고를 예방하는 것”이라며 “재난 관리 시스템 아래 예방 대책이 마땅치 않다. 담당 인력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도 큰 문제”라고 우려했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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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