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첫 홀부터 큰 실수를 범하고도 평정심을 유지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20세의 어린 골프선수에게 쿼드러플 보기의 ‘충격’은 오히려 약이 된 듯하다. 김주형은 쿼드러플 보기 이후 오히려 집중력을 되찾으며 선전했다. 마지막 날에는 완벽한 경기력을 뽐내며 역전 우승을 일궜다. 한국 최연소 PGA 우승 기록을 경신하는 순간이었다.
김주형은 지난 8일(이하 한국시각)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의 세지필드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윈덤 챔피언십 최종 합계 20언더파 260타로 우승을 차지했다. 4라운드에서 9언더파를 몰아친 결과였다.
흔들린 시작
완벽 마무리
연이은 ‘강행군’이었다. 이번 시즌 김주형은 차기 시즌 PGA투어 출전권을 획득하기 위해 잰걸음을 이어왔다. 김주형은 지난달 스코티시 오픈에서 3위를 차지하며 PGA투어 임시 특별회원 자격을 얻었다. 세계랭킹 상위권 선수 대부분이 참가해 ‘페덱스컵’ 포인트 배점이 높은 대회였다.
임시 특별회원은 PGA투어 무제한 출전이 가능하다.
김주형은 디 오픈 대회를 치른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3M 오픈, 로켓 모기지 오픈에 출전했다. 윈덤 대회까지 5주 연속으로 대회에 참가한 셈이다. 긴 이동거리에 더운 날씨까지. 아무리 젊은 피라고 하더라도 체력적 부담이 우려되는 일정이었다.
그런데도 김주형은 지난주 로켓 모기지 오픈에서 단독 7위라는 호성적을 거뒀다. 차기 시즌 PGA투어 출전권을 사실상 확보했음에도, 그는 정규 시즌 마지막 대회인 윈덤 대회 출전을 강행했다. 혹시 모를 변수를 완벽히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시작은 불안했다. 1라운드 1번 홀에서 샷 미스가 나왔다. 김주형은 고전 끝에 쿼드러플 보기를 범했다. 한 홀에서 무려 4타를 잃은 것인데, 프로 수준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일이다.
체력 부담 속에 출전했던 잃을 것 없는 대회로 시작부터 최악의 실수까지 범했다면 포기할 법도 했다. 하지만 김주형은 포기하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후 1번 홀 이후로 단 한 개의 보기도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버디만 7개를 잡아내며 1라운드를 3언더파로 마쳤다.
김주형의 약진은 2라운드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2라운드에서 6언더파를 몰아쳤다. 단숨에 선두권으로 올라선 김주형은 악천후 속 펼쳐진 3라운드에서 더 줄이며 공동 3위를 수성했다.
컷 통과로 PGA투어 출전권은 이미 확보한 상황. ‘톱(TOP)10’만 기록해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성적이었다. 하지만 김주형은 더 높은 곳을 바라봤다.
‘쿼드러플 보기’ 딛고 역전 우승 성공
임시 회원에서 정식 회원으로 발돋움
김주형은 최종 4라운드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과시했다. 앞선 라운드에선 다소 흔들렸던 샷은 점차 정교해졌고 높은 퍼트 정확도도 눈길을 끌었다.
김주형은 2번 홀부터 6번 홀까지 매 홀 버디 이상을 기록했다. 5번 홀에서 터진 이글까지 묶어 5개 홀에서 단숨에 6타를 줄였다. 당시 2타 앞서 있던 임성재를 제친 것도 모자라 격차를 벌리기 시작했다.
후반에도 집중력이 빛났다. 김주형은 무리하지 않고 파를 잡는 전략을 취했다. 이미 벌려둔 격차를 활용하는 경기 운영이었다. 하지만 버디 기회가 왔을 땐 놓치지 않았다. 김주형은 3~4타 차이를 줄곧 유지해냈고, 결국 ‘챔피언 조’ 경기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 우승으로 김주형은 여러 기록을 새로 썼다. 그는 20세 1개월17일로 역대 한국인 PGA 우승자 중 가장 어리다. 김주형의 ‘우상’인 타이거 우즈보다도 빨랐다. 우즈는 20세 9개월6일의 나이에야 첫 우승을 맛봤다.
PGA투어 전체에선 조던 스피스(미국, 19세11개월14일)에 이어 2번째로 어린 우승자가 됐다. 김주형은 PGA투어 최초의 2000년 이후 출생 우승 선수이기도 하다.
또 PGA투어 역대 처음으로 1라운드 첫 홀에서 쿼드러플 보기를 기록하고도 역전 우승에 성공한 주인공이 됐다. 앞서 김주형은 한국남자프로골프투어(KPGA) 코리안투어 최연소 우승(18세21일), KPGA 입회 후 최단 기간 우승(3개월17일) 등 국내 각종 기록을 갈아치운 바 있다.
김주형은 윈덤 대회를 통해 PGA투어 정식 회원이 됐다. 향후 2시즌간 PGA투어 출전권을 보장받는다. 그의 영어 이름은 톰 김이다. 애니메이션 <토마스 더 트레인(토마스와 친구들)>의 주인공인 장난감 기차 ‘토마스’의 이름을 땄다. 김주형이 각별히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알려졌다.
미국 언론은 김주형을 버디 트레인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높은 적응력
두둑한 배짱
김주형은 17세 때 프로 골프선수가 됐다. 선수 생활 초반에는 주로 아시안 투어에서 활동하다 2020년 코로나 유행을 계기로 국내로 돌아왔다. 지난해 KPGA와 아시안투어에서 동시에 상금왕에 올랐다.
올 시즌에는 처음부터 PGA투어 진출을 목표로 잡았다. 해외 투어에 나선 그는 아시안 투어에서 2승을 거두고, PGA 챔피언십과 US오픈 등 메이저대회에 참가했다. 결국 그는 임시 특별회원 자격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임시 회원 자격이 대회 출전에 큰 도움을 준 건 아니었다. 김주형은 시즌 말에 다다라 임시 특별회원이 됐다. 플레이오프를 제외하면 남은 대회는 3개뿐. 하지만 결과적으로 김주형이 특별회원이 될 점수를 얻은 건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는 얻어낸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김주형은 이번 시즌 PGA투어 9개 대회에 참가했다. 그중 메이저대회를 제외한 순수 PGA 투어 대회는 6개뿐이었다. 지난 12일부터 나흘간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의 TPC 사우스 윈드에서 열리는 페덱스 세인트주드 챔피언십에 나섰다. PGA투어 플레이오프 첫 대회다.
기세는 한껏 오른 상태다. 임시 특별회원 자격으로 출전한 김주형이 올 시즌 플레이오프에 출전할 방법은 ‘우승’이 유일했다. 김주형은 누구도 쉽게 낙관할 수 없었던 ‘경우의 수’를 뚫고 티켓을 확보했다. 김주형의 자신감이 ‘허세’가 아니라 ‘기세’인 이유다.
플레이오프 대회는 PGA투어가 메이저대회 이외의 대회에도 흥미를 높이기 위해 만든 제도다. 정규 시즌 성적을 기준으로 페덱스컵 포인트 상위 125위 안쪽에 진입한 선수만이 출전 자격을 부여받는다. 플레이오프 대회는 내로라하는 PGA투어 선수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만이 나설 수 있는 무대라는 의미다.
갓 스물이 된 김주형에게는 큰 경험이 될 대회다.
참가 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출전 명단이 화려하다. 이번 시즌 4승을 쓸어담고 세계랭킹 1위에 등극한 스코티 셰플러(미국)부터, 캐머런 스미스(호주), PGA투어 2승을 챙긴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 등 톱랭커가 모두 나선다.
다음 도전
어디까지?
이들은 대부분 지난주 열린 윈덤 대회를 건너뛰었다. 이미 플레이오프 출전권을 확보한 상황에서 무리하기보다는 휴식을 취하는 전략이었다.
PGA투어 2시즌 출전권을 확보한 김주형은 앞으로 톱랭커들과 수없이 경쟁해야 한다. 더 큰 목표를 이뤄내려면 경쟁을 뚫고 우승을 노려야 한다. 김주형에게 이번 플레이오프는 향후 2시즌의 메이저대회를 준비하는 ‘모의고사’인 셈이다.
김주형의 강점은 높은 적응력과 두둑한 배짱이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이미 세계 곳곳을 다니며 골프를 배워왔다. 지난달 스코티시 오픈 마지막 라운드에선 잰더 슈펠레‧패트릭 캔틀레이(미국), 토미 플릿우드(잉글랜드) 등과 우승 경쟁을 벌였다.
같은 대회에 출전했던 스미스와 조던 스피스(미국)는 공동 10위로 오히려 김주형보다 순위가 낮았다.
압박감도 크게 줄었다. 김주형은 임시 특별회원 자격을 얻은 이후로도 PGA투어 출전권을 확보하기 위해 5주 연속 대회에 출전했다. 체력적 부담에 압박감까지 더해져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김주형은 압박감을 내려놓고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다.
그는 사실상 PGA투어 출전권 획득을 확정하고 참가한 윈덤 대회에서 보다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치며 정상에 올랐다.
김주형은 이번 대회까지 총 6주 연속 경기에 나서는 중이다. 체력 부담은 어느덧 ‘상수’가 됐다. 하지만 윈덤 대회에서 쿼드러플 보기를 극복한 것처럼, 자신감과 집중력이 최고조에 오른 김주형에게 체력 문제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던 스피스 이어 2번째 어린 우승자
체력적 한계 딛고 플레이오프도 기대
이번 대회에는 기존 정규 시즌 대회보다 더 많은 페덱스컵 포인트가 걸려 있다. 통상 대회 우승자는 500점을 받는다. 하지만 이번 대회 우승자는 그 4배인 2000점을 획득한다. 우승자 이외의 상위 랭커들도 더 많은 점수를 받게 된다.
이 대회 결과는 다음 주에 열리는 플레이오프 2차전 BMW 챔피언십 출전과 직결된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125명 중 55명이 탈락하고, 상위 70명만 2차전에 진출한다. 같은 방식으로 BMW 챔피언십을 거쳐 최종 투어 챔피언십에 나서는 선수는 절반 이하인 30명이다.
김주형의 세계랭킹도 급등했다. 김주형은 대회 종료 후 발표된 세계랭킹에서 평균 3.8837점을 기록하며 21위에 안착했다. 한 주 만에 34위에서 순위가 13계단이나 올랐다.
플레이오프 선전도 점쳐졌다. PGA투어는 홈페이지에서 세인트주드 챔피언십 파워랭킹을 공개했다. 김주형은 12위에 이름을 올렸다. 한때 세계랭킹 1위에 올랐던 욘람(스페인)보다도 한 계단 위다.
PGA투어는 김주형을 “쿼드러플 보기로 1라운드 1번 홀을 시작하고도 5타 차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골프에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20세 선수”라고 평했다.
페덱스 랭킹 34위인 김주형은 1라운드를 35위 셉 스트라카, 36위 케빈 키스너와 같은 조로 출발했다. 평소 끈끈한 결속력을 자랑한다는 PGA투어 ‘코리안 브러더스’ 중에서도 네 살 차이인 임성재와 김주형은 ‘골프 형제’라고 불릴 정도로 가깝다. 김주형에게 우즈가 우상이라면 임성재는 옆에서 본받고 따르는 친한 형이다.
김주형은 우승 직후 임성재를 두고 “성재 형처럼 우승하고 싶었다”며 “평소 ‘형, 이거 이런 느낌 어때요?’ ‘형, 이런 공 칠 때 어떻게 해요”’라고 물으면 형은 참 자상하게 가르쳐준다”고 말했다. 이어 “정말 형에게 많이 감사하다. 제가 한 번 밥을 사야 한다”고도 전했다.
빛나는 오늘
기대되는 내일
당시 임성재는 동생 김주형에게 역전패를 당하고도 환하게 웃었다. 그는 “승부의 세계에서는 늘 이기고 지는 일이 반복된다”며 “PGA투어 특별 임시 회원 신분인 김주형이 우승해 정말 행복하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정말 자랑스럽다”며 칭찬했다. 둘은 윈덤 대회에서 각각 우승, 준우승하면서 새로운 진기록을 일궈냈다. PGA투어에서 한국 국적 선수가 우승·준우승을 독차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경기당 3억원’ 돈방석 앉은 김주형
김주형이 PGA투어 9경기에 출전해 33억원을 벌어들였다. 단순 계산하면 대회당 3억원 이상을 챙긴 셈이다.
김주형은 지난 8일 끝난 PGA투어 정규시즌 최종전인 윈덤 챔피언십에서 우승상금 131만4000달러(한화 약 17억원)를 받았다.
시즌 상금은 252만9338달러(약 33억원)까지 늘었다. 김주형은 상금 랭킹 44위에 올랐다.
김주형은 지난해 10월 CJ컵부터 본격적으로 PGA투어 경기에 나섰다.
그는 지난주 윈덤 챔피언십까지 9개 대회에서 컷을 8번 통과했으며 최종 10위 안쪽에는 3번이나 드는 등 호성적을 거뒀다.
김주형은 더 많은 상금이 걸린 페덱스컵 플레이오프에 출전 중이다.
현재 페덱스컵 랭킹은 34위.
2차전인 BMW챔피언십까지는 무난히 출전할 것으로 점쳐진다.
만약 30명만 출전할 수 있는 투어 챔피언십까지 뛸 수 있다면, 지금까지 벌어들인 상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전망이다.
페덱스컵 플레이오프 1~2차전에는 각각 1500만달러(약 196억원)씩 상금이 걸려 있다.
최종전인 투어챔피언십 상금은 추후 결정된다.
하지만 김주형은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겠다는 반응이다.
김주형은 최근 PGA투어 관련 인터넷 라디오방송 <siriusXM>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얼마나 번 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계좌를 확인하지 않았다”며 “타이거 우즈도 그랬을 것이다. 플레이를 잘하면 모든 건 따라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