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아픈 '부동산 집도의' 원희룡 국토부 장관 후보자

메스 들고 대장동부터 도려낼까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원희룡 전 제주지사가 지난 대선 정국을 기점으로 연일 주가를 높이고 있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 4위를 기록하며 여전한 존재감을 과시했고, 이후 선거대책위원회 정책총괄본부장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위원장을 거쳐 국토부 장관 후보자로 발탁됐다. 그동안 여권 부동산 정책 비판에 앞장섰던 원 후보자. 그가 부동산 시장에 내릴 ‘약방문’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 후보자는 1964년 2월 제주도 서귀포시(당시 남제주군)에서 태어났다. 원 후보자 집안은 14대째 제주도에서 살고 있던 ‘토박이’였다. 원 후보자 역시 중문국민학교, 중문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제주 토박이로 자랐다.

운동권 투사
보수 소장파

유년 시절 집안 사정이 좋지 못했다. 같은 동네에서만 10번 넘게 이사를 다녔고, 온 가족이 빚쟁이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원 후보자는 가난의 어려움을 몸소 실감하면서 공부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그의 학창 시절은 수석의 연속이었다. 고등학교 때 전교 1등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었다. 아울러 전국적으로 치러진 시험에서도 12번 모두 수석을 차지했다. 원 후보자는 1982년 제1회 대입학력고사에서도 수석을 꿰차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했다”고 공부 비결을 밝혔다. 원 후보자의 인터뷰는 두고두고 회자되면서 수재들의 유행어가 됐다. 원 후보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으로 진학했다. 그는 “장차 대한민국을 위해 막스 베버와 같은 법사회학자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대학 생활 초반에는 학업에 충실했던 일명 ‘도서관파’였다. 하지만 이후 신군부의 폭압적 정치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이내 운동권에 발을 들이게 됐다.

원 후보자는 서울대 교정 안에서 발생한 ‘전경 여학생 추행 사건’ 항의 시위에 참가했다. 이때 소지품 중 시위 관련 유인물이 발견돼 경찰서로 연행됐다. 며칠 구금된 뒤 훈방 조치됐지만 학교에서는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운동권 활동에 오히려 더 몰입하게 됐다.

1984년,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오거리에서 데모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구속 위기를 맞고, 당국에게 ‘요주의 인물’로 찍혀 수배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야학과 노동운동에도 열심이었다. 원 후보자는 구로공단의 교회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열고 인천 금속공장에 위장 취업해 노동현장을 몸소 느꼈다.

생활비는 과외와 번역으로 근근이 벌었다.

20대의 대부분을 사회운동에 바친 그였지만, 결국 전향하며 운동권에 작별을 고한다.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을 목격한 것이 사상 전환의 주된 계기가 됐다.

제적과 휴학을 반복했던 원 후보자는 입학한 지 8년 만인 1989년 2월이 돼서야 가까스로 대학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군 복무 면제로 ‘군백기’도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기간이 소요된 셈이다.

군 면제 사유는 후천적 발가락 기형이다. 원 후보자 설명에 따르면 그는 5살 무렵 리어카에 올라 타다가 리어카 바퀴에 발가락이 끼어 들어가면서 오른발 2번째 발가락이 골절·일부 절단됐다. 사고 직후 봉합 치료를 받았지만, 발가락을 수직으로 붙인 탓에 끝내 환부가 후천적 기형으로 남고 말았다.


훗날 정치에 입문한 후, 군 면제 이력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때 원 후보자는 자신의 발가락을 직접 공개하면서 논란을 잠재웠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 전국 수석
운동권서 개혁보수 정치인으로

1990년 말부터는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2년간의 수험생활 끝에 제34회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했다. 사법연수원(24기)은 5등으로 수료했다.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경력이 있었음에도 1995년 검사 임관에 성공했다. 초임지는 서울지방검찰청이었다. 그는 검사 재직 시절 재개발조합 사기사건, 딱지어음사건, 다단계 피라미드 범죄 등 주로 경제사범 소탕에 열중했다. 부산지방검찰청 강력부에 있을 때는 지역 내 조직폭력 및 마약사범과 사투를 벌였다.

1998년 8월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활동 기간은 짧았지만 소프트웨어재산권보호위원회 고문변호사, 전국 PC방 연합회 고문변호사, KBS 방송자문 변호사 등 당시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었던 지식재산권·IT 분야 전문 변호사로 족적을 남겼다.

이듬해인 1999년에는 정치에 입문한다. 당시 ‘젊은 피’ 수혈 경쟁을 벌이던 한나라당과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의 전신) 양쪽에서 모두 영입 제의를 받았다.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 측은 원 후보자에게 고향인 제주도 지역구 공천을 약속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서울 지역구 공천을 약속했다.

이때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김부겸 총리가 원 후보자를 영입에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총리는 “힘들겠지만 맡아서 5년 내지 10년을 하면 답이 나올 것”이라며 원 후보자에게 한나라당 입장을 적극 권유했다.

결국 원 후보자는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을 선택했다. 그는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보수를 이루겠다”고 입당 소감을 밝혔다. 운동권 출신이 개혁 보수 정치인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2000년 4월 치러진 16대 총선에서 서울 양천갑 지역구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입당을 권유했던 김 총리와 함께 국회에 입성했다. 다만 김 총리가 임기 중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한 이후로는 다른 길을 걷게 됐다.

논란 일면
정면돌파

당선 이후로는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 정병국 전 의원과 함께 일명 ‘남원정’으로 불리며 당내 개혁을 주도하는 소장파로 자리매김했다. 때로는 당 지도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까지 적극적으로 개혁 의견을 내비쳤다.


이러한 행보 덕택인지, 탄핵 역풍에 휩쓸렸던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생존했다. 당 안팎의 거센 비판 속에서도 소신을 지키고, 지역구인 양천구 목동 곳곳을 돌며 민심을 살핀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총선 직후 치러진 한나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이때 당 최연소 최고위원 기록을 새로 썼다. 

원 후보자는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선거 경선에 나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비록 대통령 경선에서는 탈락했지만 40대 대권주자로 나서 완주하며 눈도장을 찍었다. 이는 차기 대권 유력 주자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2008년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과반 득표로 여유롭게 3선 고지에 올랐다. 2009년에는 당 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돼 당내 쇄신을 주도했다.

2010년 서울시장 자리에 도전장을 던졌지만, 당내 경선에서 탈락했다. 오세훈 후보(현 서울시장)의 대항마를 정하기 위한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나경원 전 의원에게 석패했다.

이후 2010년 7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한나라당 사무총장, 공천심사위원장, 최고위원 등을 두루 역임해 당내 입지를 다졌다.


이를 바탕으로 2011년 당권에 도전했다. 당시 원 후보자는 ‘한국 정당정치의 비정상적 공천시스템 개혁’과 ‘선진 정치를 위한 선거구 개편’을 핵심 의제로 내걸었다. 하지만 차기 총선 불출마라는 배수진까지 쳤음에도 최종 4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이 여파로 2012년부터 1년여간 잠시 정치권을 떠나기도 했다.

당초 행안부·법무부 장관 하마평
대장동 1타·주택찬스 공약 영향?

원 후보자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독일 아데나워 재단‧중국 베이징대 등에서 방문학자 자격으로 수학하고 2013년 말 귀국했다.

2014년 2월, 금융 3사 고객정보 유출 사태가 발생하자 ‘개인정보유출 국민변호인단’을 꾸리며 이목을 끌었다. 당시 원 후보자는 국내 피해자 5만여명을 대리해 무료 공익소송을 주도했다.

같은 해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로 복귀전을 치를 것’이라는 세간의 전망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원 후보자가 새누리당 지도부로부터 ‘당내 중진 차출론’이라는 명목으로 제주지사 출마를 압박받으며 무산됐다.

결국 제6회 지방선거에서 제주도지사에 출마했다. 정치에 입문한 지 1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60%의 득표율로 무난히 당선됐다. 취임 이후에는 제주도 내 부동산 투기 규제 강화 정책과 중국을 비롯한 외국 자본 투자 유치 견제에 집중했다.

이외에도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16위로 최하위권이던 제주 지역 청렴도를 임기 중 4위까지 끌어올리고, 4000억원가량의 지방부채를 모두 상환하는 등 체질 개선에 힘썼다.

임기 중 두 차례나 탈당을 감행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2017년 1월 초 탈당해 바른정당 창당 일원으로 합류했다. 이어 같은 달 말에는 “지역사회에 해결해야 할 현안이 많아 도정에 전념하겠다”며 대통령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2018년 4월에는 바른미래당 합당에 반발해 탈당했다. 이후 2년여간 무소속 상태를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정치적 공감대를 구축해왔던 남 전 지사(자유한국당 복당)나 정 전 의원(바른미래당 합류)과는 각기 다른 행보를 보였다.

원 후보자는 무소속으로 제주도지사 재선에 도전했다. 정당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현직 지사라는 프리미엄을 살린 ‘인물론’ 전략으로 낙승을 거뒀다. 

재선 후 임기 초반 협치를 중시하는 행보를 보였다. 당시 제주도의회 의석을 ‘싹쓸이’한 민주당을 달래기 위한 포석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원 후보자는 지사가 추천하는 제주·서귀포시 행정시장 내정자로 각각 고희범 전 민주당 제주도당위원장과 양윤경 제주 4·3희생자유족회장을 선택했다. 친민주당 성향의 내정자들은 청문회에서 무난하게 ‘적격’ 판정을 받았다.

당선 3달 뒤인 9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경찰 소환 조사를 받았다. 당시 원 후보자는 사전선거운동 위반·허위사실공표 등 총 5개 혐의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검찰에 기소됐고, 2019년 2월 1심에서 벌금형 80만원을 선고받아 지사직은 지켜냈다. 재판부는 “공소 사실이 모두 인정되지만, 기존에 발표된 공약을 발표하거나 다른 후보자를 비방한 게 아니고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같이 선고했다.

이후 검찰과 원 후보자 양측 모두 항소를 포기하면서 형이 확정됐다.

2020년 2월, 박형준 혁신통합추진위원장의 제의를 받아들여 미래통합당 창당에 합류했다. 이후 같은 해 5월 대권 도전을 시사했고, 지난해 8월 들어 제주도지사를 퇴임하며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똑바로
똑똑하게

경선 초반에는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하지만 2차 컷오프 직전 ‘대장동 1타 강사’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덕에 컷오프를 통과할 수 있었다.

유튜브의 한 채널에 출연해 대장동 개발사업 논란을 요약·설명한 것이 계기가 됐다.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자타공인 ‘이재명 저격수’가 된 셈이다. 원 후보자는 최종 경선에서도 이러한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며 자신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후보를 상대할 적임자라고 자부했다. 

경선에서는 최종 4위에 그쳤지만, ‘대장동 1타 강사’ 직함으로 인지도를 끌어올린 것이 기회로 작용했다.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결정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 의해 선거대책위원회 정책총괄본부장에 임명됐다. 차기 정권의 밑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맡은 만큼, 윤석열정부가 탄생하면 중용 가능성이 클 것으로 관측됐다.

지난 1월 초 선대위가 해체되면서 잠시 거취가 불투명해지기도 했지만, 선거대책본부의 정책본부장으로 재신임받으며 가능성을 이어나갔다. 

이후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 하마평에 오르는 등 향후 행보에 대한 예측이 이어졌다.

그러나 대선이 치러지기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원 후보자의 행선지는 대선 승리 이후에나 결정됐다. 윤 당선인이 그에게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위원장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이어 지난 10일에는 윤석열정부 초대 국토부 장관 후보자로 낙점됐다. 

“의외의 인선”이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인수위 합류 이후 원 후보자의 입각 가능성은 높게 점쳐졌지만 직함이 예상 밖이라는 평가다. 원 후보자는 당초 행정안전부·법무부 장관이나 대통령비서실장 하마평에 오르내린 바 있다.

일각에서는 윤 당선인이 해당 장관직에 정치인 기용을 자제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 변수로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아울러 원 후보자가 경선 중 ‘대장동 1타 강사’ ‘주택 찬스 공약’ 등으로 이목을 끈 점이 이 같은 인선으로 이어졌다는 관측도 나온다. 

윤 당선인은 “(원 후보자는)3선 국회의원, 제주지사 재선을 지내며 혁신적 도시 행정을 펼친 분”이라며 “공정과 상식이 회복되어야 할 민생 핵심 분야 부동산 정책에 대한 이해가 높은 분”이라고 발탁 배경을 전했다. 이어 “수요가 있는 곳에 충분히 주택을 공급해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고 균형 발전 핵심 지역인 공정한 접근성과 광역 교통체계를 설계할 적임자라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원 후보자는 발탁 직후 “정부 역량을 집중해 서민과 중산층의 주거를 안정시키고 꿈을 잃은 젊은 세대가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하겠다”며 소감을 밝혔다. ‘전문 경력이 없다’는 지적에는 “국민들의 눈높이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잘 접목시켜 정무적 역할을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고 답했다.

이제 관건은 여소야대 청문회 문턱을 넘는 일이다. 민주당은 발표 직후부터 강력하게 반발하며 험난한 청문회를 예고하고 나섰다. 민주당 고용진 수석대변인은 지난 10일 국회 소통관 브리핑에서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를 국토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공개 저격했다.

이재명 저격
청문회 어쩌나

그는 “원 후보자의 제주도지사 시절 제주 신공항 등 제주 도정에 대한 성과를 보면 전문성, 추진력, 협상력 등을 겸비해야 할 국토부 장관에 적합하지 않다”며 이같이 말했다. 원 후보자의 발탁 배경을 두고선 “지난 대선 과정에서 허위와 과장된 정치공세에 앞장섰던 것에 대한 논공행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며 “국정 운영 파트너로서의 민주당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일방적인 처사”라고 날을 세웠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5전 5승’ 민주당 숙적 원희룡, 왜?

원희룡 국토부 장관 후보자는 적어도 선거에서만큼은 더불어민주당의 ‘숙적’으로 불릴만하다. 1999년 정치에 입문한 뒤 민주당을 상대로 무패행진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민주당 후보를 국회의원 선거에서 3번, 지방선거에서 2번 만나 모두 과반의 득표로 승리했다.

2004년 탄핵 역풍이 거셀 때도, 2018년 보수 궤멸 선거 때도 ‘개인기’를 바탕으로 승리를 거두며 존재감을 뽐냈다.

특히 2018년 7회 지방선거 당시, 원 후보자는 대구‧경북 외의 지역에서 당선된 유일한 보수 진영 광역단체장이었다.

원 후보자는 지난해 대선 경선에 나섰을 때 이 같은 이력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9월 열린  국민의힘 경선 예비후보 1차 TV토론회에서 ‘나는 귤재앙이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민주당과 선거에서 다섯 번 싸워 다섯 번 이겼다. 민주당이 볼 때는 내가 재앙”이라고 발언했다.

이어 “민주당 후보로 예상되는 (민주당)이재명 후보에게 귤재앙의 신맛을 실컷 맛 보여드리겠다”며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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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