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중국의 개혁을 이끈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회자되는 명언으로 꼽힌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논리인데, 어떤 이념을 추구하든 이익이 되면 상관없다는 소리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의 요즘 행보도 이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진보 진영 내에서는 알게 모르게 금기하는 불문율 같은 법칙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칭찬이다. 한두 마디로 잠깐 언급하는 것은 그간 빈번하게 있었던 사례였지만, 더불어 민주당(이하 민주당) 진영의 대선후보가 중요한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박 전 대통령을 칭찬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는 이 불문율을 보란 듯이 깨며 선대위 출범을 알렸다.
“편 맞아?”
그는 지난달 2일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 제조업 중심 산업화의 길을 열었다”며 “이재명정부는 탈탄소 시대를 질주하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에너지 고속도로’를 깔겠다”고 말했다.
골자는 에너지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의지였지만, 정치 평론가들과 일반 대중은 이례적인 박정희 대통령 언급에 더욱 주목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이 후보의 박 전 대통령 언급을 두고 “민주당 정권이 갖고 있는 기본 노선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통령 후보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보수의 프레임을 끌고 왔다는 것 자체가 문재인정부의 노선이 실패한 것을 자인한 꼴이라는 말이다. 이때의 논란은 이번 달에 다시 불거졌다. 이 후보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였기 때문이다.
이 후보는 지난 3일 전북 전주를 찾아 청년들과 소맥(소주+맥주) 회동을 가졌던 바 있다. 당시 그는 “존경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께서, 대통령 하시다가 힘들 때 대구 서문시장을 갔다는 거 아닌가”라고 발언했다.
이날의 발언은 연일 매스컴을 도배하며 이 후보를 정치관 논란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논란에 휩싸인 것은 비단 이런 한두 마디의 언급 때문만은 아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당 내부에서도(정치관 논란에 대해) 말이 나온 것은 사실”이라며 “이번 발언뿐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평가라던지, 통일에 대한 접근 방식은 기존의 민주당 입장과는 많이 다르다”고 <일요시사>에 알려왔다.
그의 말대로, 이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 재평가’에 대한 화두를 수차례 던져왔고, 통일 또한 “실리적으로 접근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이 후보는 지난 10월10일 대선후보 선출 수락 연설에서 “박정희 정책·김대중 정책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며 ”국민의 지갑을 채울 수만 있다면 좌파 우파 정책을 가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의 정책이라도 이익이 된다면 어느 것도 가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박 전 대통령의 공과 과를 정확히 분류해 따지자”는 보수진영의 주장과 흡사한 말을 한 것이다.
이 후보는 통일에 대한 시각도 민주당의 전통적인 접근 방식과 결을 달리한다. 오히려 보수 진영의 시각과 더 가깝다. 지난달 20일 이 후보는 충남에서 대학생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통일 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그는 “우리가 통일을 지향하는 건 이미 늦었다”며 “통일, 쉽지 않은 것을 정치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실리적으로 접근하면 좋겠다”고 표현했다. 통일이 국가의 이익에 반한다면 포기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박정희 “재평가 필요”
통일엔 “실리적 접근”
통일에 대한 2030세대의 여론이 좋지 않은 것을 의식한 발언이었지만, 이는 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방하고 있는 문정부의 입장과 다르고, 민주당의 통일에 대한 강령과도 입장이 다르다.
민주당의 ‘통일’에 관한 강령에는 “남북관계의 전면적이고 획기적인 개선 및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교류협력을 활성화한다.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 공감대를 확산하고, 범국민 통일교육 거버넌스를 구축해 통일 기반을 조성한다”고 소개돼있다.
강령에 따르면, 민주당은 이익보다는 통일에 대한 무게를 더 많이 두고 있고, 민주당원들은 통일을 지향해야만 한다는 데 합의하고 있다.
이를 두고, 정계 전문가들은 다양한 시각에서 그의 행보를 분석하고 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이재명 후보의 정치 행보를 보면, 특정 이념을 지향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이 후보는 여론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다가도 언제든지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도 있는 정치인”이라고 해석했다.
신 교수는 “이런 정치인일 경우 특정 이념을 따라 정치한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며 “지방 시정 이력을 가지고 그가 무슨 정치적 이념을 가지고 있는지 판단할 수는 없다. 앞으로 그의 행보를 가지고 판단하면 될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념보다는 여론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어떤 정치 이념을 갖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반면, 최진 대통령리더쉽연구원 원장은 중도층 확장을 위한 전략일 뿐, 그의 정치적 뿌리는 ‘진보주의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국민 재난 지원금이나 국토 보유세, 기본소득 정책을 보고 부자들이나 중산층에서는 너무 과격한 사회주의자 아니냐는 불안과 비판이 있는데 이 부분을 불식시키려는 의도로 해석한다”며 “또 다른 이유는 문재인정부와의 차별화를 위한 것이다. 실용주의는 사실 중도주의와 같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중도층을 끌어들이기 위한 하나의 포석으로 인식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최근 국토보유세 논란은 아무리 자신의 이념이 맞는 진보 정책이라도, 국민이 싫어하고 반대한다면 언제든지 철회하거나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며 “이 후보의 삶 자체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정치에 들어와서도 진보 정치인의 길만 걸어온 인물이다. 진보적 철학이 머릿속에 강력하게 각인돼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도층 공략
실용주의자건 진보주의자건 중도층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만한 후보를 찾아 투표한다. 양당의 골수 지지층을 제외한 중도 표심을 잡는 것이 이번 대선의 승부처다. 그간 행보로 볼 때, 이 후보 측은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이를 위해서 실용주의 노선을 계속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덩샤오핑이 주장한 것처럼, 어떤 색의 고양이건 쥐만 잡으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