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정치인들은 대의 앞에 소의를 저버리는 경우가 많다.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작은 뜻은 잠시 뒤로 제쳐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잠시’뿐이라는 명분은 때때로 ‘타협하는 습관’이 돼버려 정치인의 신념을 통째로 바꿔버리기도 한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은 이제 곧 대의 앞에 소의를 버려야 하는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선택’은 정치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논란이 된 사안에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것인지, 또 당 대표나 대권후보로 누구를 지지할 것인지, 정치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여러 가지 선택의 순간과 마주한다.
가던 길?
좋은 선택은 무명의 정치인을 거물로 만들기도 하고, 잘못된 선택은 거물 정치인의 정치생명을 끊기도 한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은 매 순간마다 자신의 신념에 따른 선택을 하는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처한 상황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행동에 옮겼고, 결과가 어떻든 자신이 한 선택의 대가를 감내해왔다.
박 의원은 고교 3학년 시절, 본인의 은사가 부당하게 구속되자 학업을 제쳐두고 은사의 석방운동을 펼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엔 반정부 사범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으며, 정치인 시절엔 ‘유치원 3법’(사립학교법·유아교육법·학교급식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해 전국의 관련 유권자들과 척을 지기도 했다.
이렇듯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무기로 21년째 정치 커리어를 이어온 박 의원이지만, 그에겐 늘 ‘비주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지나치게 신념을 좇아온 그의 선택이 하나둘 쌓여 어느덧 치러야 할 여러 대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의 신념은 어떤 이들에겐 ‘정의’이였지만, 또 다른 이들에겐 ‘고집’으로 비쳤다.
이번 대선 경선 기간에도 그는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깊은 대립각을 세워온 것. 지난 7월 대선 출마를 선언했던 그는 지난 5일까지, 민주당 경선 레이스를 완주한 4인 중 한 명이다.
레이스에서 그는 젊은 대통령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사회에 만연한 기득권을 타파하겠다고 공언했다. 공무원연금, 의사, 정규직 등의 기득권을 없애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맹렬히 비판했는데…
이 캠프 합류 여부 관심사
그는 당내에도 기득권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경선 기간 중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 의원은 “민주당은 복지나 진보적 사회 역할을 한다고 하면 ‘보편’과 ‘무상’이라는 단어가 붙어야 하는 낡은 인식에 갇혀있다”며 “보다 적극적인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내놓은 민주당의 복지정책들이 구태의연하고 낡았다는 소리다. 이 같은 시각을 가진 박 의원에게 이 지사의 기본 시리즈도 기득권 시선에서 낸 정책 중 하나였다.
기본 시리즈는 ▲기본소득 ▲기본주택 ▲기본대출 ▲기본의료 ▲기본교육이란 다섯개의 축으로 이뤄진 이 지사의 대표적인 대선 공약으로, 보편복지를 내세운 국가 정책이다.
이 지사는 탄소세와 국토보유세 등 세금 재원을 마련해 노동자들의 기본소득을 보장하고, 무주택 대상자들에게는 장기 공공임대 주택을 제공한다는 등의 구체적인 세부 방안을 경선 기간에 발표한 바 있다.
박 의원은 이에 대해 “당장 표심을 노린 얄팍한 장사”라고 평가절하했다. 재원 마련이 불투명한 현재의 상황에서 지속 가능하지도 않은 정책을 마치 가능할 것처럼 말하는 건 무책임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우리 국민들이 백년 쓸 민생의 솥단지를 만들려고 한다”며 “그에 비해 이재명 후보는 솥단지에 누룽지까지 박박 긁어서 나눠줄 생각만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평가했고 “재원 마련 방법을 물어보니 ‘할 수 있다’는 얘기만 반복하는 게 아쉽고 비판할 지점”이라고 주장했다.
또, 대장동 의혹에 관해서도 철저한 수사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앞서 박 의원은 CBS 라디오 <한판승부>에 출연해 “이 지사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오면 민주당 전체에 큰 악재”라며 “이 사안은 여야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이 가진 아주 본원적인 분노의 문제, 땅에 대한 문제”라고 대장동 의혹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결단 시점 다가오는데…
‘마이웨이’ 그의 선택은?
그러면서 “관련자들을 싹 다 잡아들여야 한다는 게 제 기본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이 지사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일단 처벌하고 보는 게 맞다는 뜻의 발언이었다.
올곧은 신념에 따른 정치를 해온 그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민주당 전통에 따라 이재명 대선캠프에 합류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
경선 기간 내내 기본 시리즈를 구태의연하고 낡은 공약이라 비판해왔고, 대장동 비리 의혹에도 물러서지 않는 입장을 가진 박 의원이 이 지사의 당선을 위해 함께 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정권 재창출’이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의 소의를 잠시 뒤로 미뤄둬야 하는 상황이다. 사실, 박 의원은 이 같은 경우를 한 차례 경험한 바 있다. 2010년 진보신당의 부대표를 지내던 그는 3기 진보신당 지도부 중 유일하게 야권대통합을 주장했다.
그로부터 1년 후, 그는 결국 민주당에 입당한다.
입당 당시 그는 “선거를 치르면서 알았다. 사람들은 옳은 말을 한다고 표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말이 옳으니까 표를 달라고 했다. 그런 것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며 민주당 입당 이유를 밝혔다.
옳은 말은 잠시 내려놓고, 세상을 바꿀 힘을 먼저 기르겠다는 뜻이었다.
박 의원은 이번 대선서도 마찬가지의 선택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박용진 의원실은 “아직 공식적으로 이재명 대선 캠프에 합류한다는 결정을 하지 않은 상태”라고 전했다.
다른 길?
하지만, 이낙연 전 대표의 경선 결과 인정을 촉구하면서 이 지사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는 등 벌써 원팀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간 가장 뜨겁게 대립해온 상대였지만 이제는 같은 팀의 대표가 됐으니 풍우동주(風雨同舟:폭풍우 속에 한 배를 타다) 해 그를 돕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