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쑥갓, 가지… 소박한 우리네 밥상의 주인공이자 <식재료 이력서>의 주역들이다. 심심한 맛에 투박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무슨 이력이 있다는 것일까. 여러 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칼럼을 기고해 온 황천우 작가의 남다른 호기심으로 탄생한 작품. ‘사람들이 식품을 그저 맛으로만 먹게 하지 말고 각 식품들의 이면을 들춰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나름 의미를 주자’는 작가의 발상.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인간이 식품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나리
조선 중기 문신인 정온(鄭蘊, 1569∼1641)의 작품을 감상해보자.
種芹(종근)
미나리 심다
淺鑿窓前方寸地(천착창전방촌지)
창 앞 조그마한 땅 얕게 파고
貯停洿水種靑芹(저정오수종청근)
웅덩이 물 가두어 파란 미나리 심었네
區區不爲供朝夕(구구불위공조석)
구구한 정성 아침저녁으로 바칠 수 없지만
待得莖長獻我君(대득경장헌아군)
줄기 자랄 때 기다려 우리 임금께 바치리
어린 시절 기억에 노원에는 드문드문 미나리꽝(미나리를 심는 논)이 있었다.
그곳은 언제나 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간혹 미나리를 채취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가고는 했었다.
처음에는 반바지를 입고 맨발로 미나리를 뽑다 두렁으로 나왔을 때 기겁했었다.
다리 곳곳에 거머리가 달라붙어 있고 그 주위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각 손을 뻗어 거머리를 떼어내려 시도했으나 그 일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살피던 어른들이 다가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 불로 거머리를 지져대자 거머리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 미나리꽝에 들어갈라치면 반드시 긴바지를 입은 채 양말로 바지 끝을 감싸고는 했다.
왜 미나리꽝에 거머리들이 득실거릴까.
바로 환경 때문에 그렇다.
미나리와 거머리의 서식지가 논과 같은 습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미나리를 채취하고는 반드시 거머리를 가려내야 한다.
그런데 미나리를 뜻하는 한자 芹(근)이 흥미롭다.
풀을 의미하는 초두변(艹)과 도끼를 의미하는 근(斤)이 합해졌다는 이야기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미나리는 도끼 같은 풀이 되는데 과연 그러할까.
이를 위해 芹의 다른 뜻을 살피면 예물로서 변변치 못한 물건을 의미하는데 이와 관련한 답이 정온의 시 ‘待得莖長獻我君’(대득경장헌아군, 줄기 자랄 때 기다려 우리 임금께 바치리)에 등장한다.
이와 관련한 고사다.
옛날 송(宋)나라에서 농부가 겨울이 지나 봄이 오자 등에 햇볕을 쬐면서 자기 아내에게 “햇볕을 쬐면서도 그 따사로움을 아는 사람이 없소. 이것을 임금님께 알려 드리면 후한 상을 내리실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그 마을의 부자가 말하기를 “옛날 사람 중 콩잎과 미나리 같은 것들을 맛있다고 생각해 고을의 부자에게 먹어 보라고 말한 자가 있었는데, 그 부자가 그것을 가져다 먹어 보니 입이 쓰리고 배가 아팠다네. 이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비웃고 원망했네”라고 했다.
즉 미나리는 임금을 위한 신하의 충성을 비유하는 겸사로 쓰인다.
이제 서거정의 작품 미나리와 미나리 국을 감상해본다.
芹(근)
미나리
芹子由來美(근자유래미)
미나리는 예로부터 좋은 나물인데
晨盤亦可羹(신반역가갱)
아침밥상에 국으로도 좋다네
靑泥今日種(청니금일종)
청니는 오늘날 심은 곳이요
碧澗舊時名(벽간구시명)
벽간은 예전 이름이라네
已入詩人詠(기입시인영)
이미 시인의 읊조림에 들었으니
堪誇野老情(감과야로정)
들판 노인의 정으로 자랑할 만하네
區區吾欲獻(구구오욕헌)
나 역시 구구한 정성 바치고 싶어
曝背坐南榮(폭배좌남영)
남쪽 마루에 앉아 햇빛에 등 쬐네
청니(靑泥)는 …… 곳이요 : 두보(杜甫)의 최씨동산초당(崔氏東山草堂) 시에 ‘쟁반에는 백아곡 어귀의 밤을 벗겨 놓았고, 밥 먹을 땐 청니방 밑의 미나리를 삶아 내었네’라고 했는데, 청니방은 지명이었는바, 여기서는 그와 달리 진흙의 뜻으로만 쓰였다.
임금을 위한 신하의 충성 비유
“가을 배추는 고기에도 견준다”
벽간(碧澗) : 두보(杜甫)의 시에 ‘신선한 붕어회는 은빛 실을 날리고, 향기로운 미나리로는 벽간갱을 끓이었네’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벽간갱이란 미나리 나물에 조미료를 섞어 끓인 국을 말한다.
芹羹(근갱)
미나리국
朝來碧澗採香芹(조래벽간채향근)
아침에 벽간에서 향기로운 미나리 캐와
杜甫羹中欲策勳(두보갱중욕책훈)
두보의 국 가운데 공훈 세우고 싶네
我與野人同此味(아여야인동차미)
나는 시골 사람처럼 이 맛을 함께 하니
區區只欲獻吾君(구구지욕헌오군)
다만 구구한 정성 우리 임금께 바치고자하네
배추
서거정의 村廚八詠(촌주팔영)에 등장하는 작품이다.
菘虀(숭제)
배추김치
西風吹送晩菘香(서풍취송만숭향)
하늬바람이 늦가을 배추 향기 불러오자
瓦甕鹽虀色政黃(와옹염제색정황)
항아리에 김치 담으라 색깔 정말 노랗네
先我周顒曾愛此(선아주옹증애차)
나보다 먼저 주옹이 이를 사랑했으니
嚼來滋味敵膏粱(작래자미적고량)
씹으니 맛이 고량진미와 대적할만하네
상기 작품에 등장하는 주옹은 중국 남제(南齊) 때 은사(隱士,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살던 선비)로, 문덕태자(文德太子)가 일찍이 주옹에게 채소 중 어떤 나물 맛이 가장 좋으냐고 묻자 “초봄의 이른 부추나물과 늦가을의 늦배추였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배추를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왜 필자가 서거정의 이 작품을 인용했을까.
물론 배추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함이다.
배추와 관련 일부 단체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다.
숭채(菘菜, 배추)의 기록이 있는 문헌으로는 훈몽자회(訓蒙字會)가 있는데 중국서 도입된 무역품의 하나로 숭채 종자가 포함돼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 후 중종 때(1533년)와 선조 때에도 숭채 종자가 중국으로부터 수입됐다.
이는 명백한 오류다.
훈몽자회는 1527년 최세진이 지은 작품으로 서거정은 훈몽자회가 모습을 드러내기 한참 이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을까.
여러 기록에 의하면 배추김치의 등장은 여타의 다른 김치에 비해 시기가 상당히 늦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이를 염두에 두고 다시 서거정의 작품 배추(菘, 숭)를 감상해보자.
生菘靑間白(생숭청간백)
파랗고 하얀 싱싱한 배추
一一飣春盤(일일정춘반)
하나하나 봄 쟁반에 담아
細嚼鳴牙頰(세작명아협)
가늘게 씹으면 어금니 울리고
能消養肺肝(능소양폐간)
소화 잘되 폐와 간에 좋다네
誰知能當肉(수지능당육)
고기에 견줄 걸 누가 알겠나
亦足勸可餐(역족권가찬)
밥으로 가하다 권할만 하네
周郞先得我(주랑선득아)
주랑이 먼저 나를 얻었으니
歸去亦非難(귀거역비난)
돌아감 역시 어렵지 않다네
주랑(周郞)은 앞서 이야기했던 주옹(周顒)을 지칭한다.
<계속>